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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3대 종파의 형성과 랑카의 독립

기자명 법보신문

태국서 계맥 이어 식민치하 불교 수호

<사진설명>캔디의 아스기리사 아래에 형성돼 있는 스님 마을. 아스기리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랫 마을에는 씨암파에 속하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작은 사원들이 밀집해있다.

1753년 스리랑카에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네덜란드 상선을 이용해 씨암(지금의 태국)으로부터 스리랑카로 건너온 우팔리(Upali) 스님 등 25명의 전법단이었다. 이들은 단절된 스리랑카의 구족계단을 복원하기 위해 스리랑카 국왕의 요청을 받고 도착한 국빈들이었다. 네덜란드에 앞서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의 점령 시기에 자행된 전대미문의 불교 박해로 인해 절멸의 위기에 처했던 승가를 간신히 복원하고 단절됐던 구족계단을 재건하기 위해 스리랑카는 씨암으로부터 구족계 전수를 요청했던 것이다. 씨암의 불교는 13세기 스리랑카로부터 전해진 것이었으므로 그 법맥이 다시 돌아와 단절된 스리랑카의 법맥을 이어주는 뜻 깊은 자리였다.

스리랑카에 도착한 25명의 전법단은 음력 7월 15일 계단을 설치하고 스리랑카 민중운동의 지도자인 왈리위따 핀다빠띠까 스리 사라낭까라(Valivita Pindapatika Sri Saranakara. 1698~1778) 스님 등에게 구족계를 전함으로써 스리랑카 승가의 완전한 재건을 이룩했다.

씨암의 도움으로 구족계단 복원

<사진설명>어느 사원에나 10대로 보이는 어린 스님들이 4~5명씩 있다.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엄연한 출가승이며 재가불자들 역시 승가에 대한 예의로 이들을 대한다. 하지만 그 나이에 마땅히 보이는 호기심과 장난기만큼은 여느 어린이들과 다를바 없다.

이 날의 계맥 전수는 단절됐던 법맥의 재건이라는 의미와 함께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3대 종파의 기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 하다.

우팔리 장로 등 씨암으로부터 도래한 승가는 이후 캔디의 아스기리사(Asgiri Vihara) 등 여러 사원에 계단을 설치하고 구족계를 전했다. 이때 계를 받은 비구 7000여 명과 사미 3000여 명은 현재 스리랑카 불교의 최대 종파인 씨암종을 구성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전통 승가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는 승가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을 중요시하는 측이다. 이 두 갈래의 구분은 기원전 1세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으며 이 같은 구분은 오늘날 까지도 유효하다.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승가는 대부분 소규모의 수행처에 머물며 개인의 수행에 치중한다. 수행 중심주의의 스님들은 사원의 운영 등 일체의 세속적인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 자신들이 머무는 사원의 운영까지도 재가 신도들에게 맡기고 있다. 스님들은 오전에 탁발을 나가 얻어온 음식을 수행하는 스님들과 함께 나눠 공양한다. 오전시간에는 주로 목욕이나 빨래 등 개인의 일을 처리하고 오후가 되면 나무 밑이나 동굴 등에서 좌선을 한다. 또는 정해진 장소에서 경행을 하기도 한다. 오후불식을 철저히 지키므로 오후 시간에는 탁발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수행으로 보낸다.

이에 비해 교육 중심주의 승가의 사원은 대부분 마을 중심이나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스님들 역시 오후 불식을 고수하긴 하지만 직접 탁발을 나가는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 대신 신도들이 아침과 점심 공양을 사원으로 갖고 온다. 스님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경전 공부 등으로 보내며 법회나 상담 등을 통한 신도 교화와 포교에 주력한다.

교육중심주의 승가는 크게 세 종파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스리랑카 불교계의 약 80%를 차지하며 불치사리를 봉안하여 법통을 잇고 있는 중심 종파 씨암파를 포함해 아마라푸라파(Amarapura)와 라마냐파(Ramanna)이다. 아마라푸라파는 씨암의 계맥이 전해진지 55년 후인 1808년 5명의 사미승이 미얀마의 아마라푸라종단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돌아와 형성했으며, 라마냐파는 1864년 아마라푸라파로부터 분파돼 형성된 종파이다.

종파는 셋이지만 승가는 ‘하나’

<사진설명>기도를 마친 스님들이 불자들 손목에 흰 실을 감아주고 있다. 교육 중심주의 승가는 이같은 법회와 기도 등을 통해 포교와 신도교육에 주력한다.

이러한 종파의 형성 과정은 각 종파의 특징과도 연계돼 있다. 국왕의 요청으로 계맥을 전수받은 씨암파에는 귀족 등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출가가 이뤄졌으며 출가 자격에도 제한을 둬 지금까지도 자연스럽게 스리랑카의 상류계층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아마라푸라파와 라마냐파는 씨암파의 이러한 귀족중심주의가 출가 비구의 순수성을 읽게 하는 원인이라며 반발, 출가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하층계급 출신이 대거 출가해 종파를 구성하게 되었다. 특히 아마라푸라파는 현재까지도 서민적인 성향이 강한 종파로 남아 있다.

하지만 각 종파는 모두 팔리(Pali)어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택하고 있으며 계율이나 의식 등에서도 거의 차이점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다.

각 종파의 구분은 형성과정에서의 차이와 출가에 대한 자격 조건 정도의 차이를 의미할 뿐이지 우리나라의 종단처럼 독립적인 행정체계를 의미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총무원과 같은 행정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며 한 종파 안에 여러 명의 종정 스님이 있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점이다. 씨암파의 경우 캔디의 아스기리사나 말왓타사(Malwatta Vihara) 등 중심 사찰을 중심으로 승가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 두 사원에 각각 우리의 종정 스님에 해당하는 ‘마하 나야께 대로(Maha Nayake Thero)’가 추대돼 있다. 굳이 우리의 개념과 비교한다면 종정에 해당하지만 그보다는 일단의 승가를 대표하는 승정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마라푸라파의 경우 규모가 큰 사원마다 종정이 추대돼 있어 그 수가 20여 명에 가깝다.

스님들은 대부분 독립된 사찰에서 5~10명씩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스리랑카 정부의 불교부가 2001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3개 종파에 속한 사원의 수는 모두 8204개며 스님(비구)들은 모두 2만9877명이라고 한다.

<사진설명>스리랑카에는 작은 사원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지만 대규모 법회가 열리거나 의식일이 되면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찾아와 함께 기도하고 고양한다.

이 같은 스리랑카 종파의 형성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로 인해 불교가 쇠약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영국의 점령이라는 암울한 시대에도 법맥을 잇고 오히려 앞 시대에 쇠약해진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눈물겨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스리랑카 불교계는 외국의 식민지배하에서 싱할라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민중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불교 민족주의’라는 독특한 스리랑카의 정서를 형성해 나갔다. 불교를 구심삼아 민족정신과 문화를 지켜나가는 민중운동을 주도한 것이 바로 불교계와 스님들이었기 때문이다. 불교계의 이 같은 활동은 1948년 스리랑카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비로소 완전한 독립을 이룬 이후에도 불교계가 정치계와 민중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국가차원의 불교 우대 정책으로 반영되기도 했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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