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강연을 경청한 불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미국, 유럽, 호주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콜로세움에서 어떤 내용의 설법을 듣고 왔노라”고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세계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데 콜로세움 강연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홍콩에서 불법을 펼치는 강연은 빈승이 인간불교를 국제적으로 펼치는데 있어서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왜 일까요? 제가 홍콩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면 이미 밤 9~10시가 되는데 불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마침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다음 날 아침이 밝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수 만의 많은 청중들이 동참할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가장 주요한 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 가져오고 가정에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가져 와 불교가 사람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인간불교’에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즉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법문을 했다는 의미로, 이것이 아주 중요한 원인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노래와 무용을 법문에 융합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강연을 하기 전 먼저 문화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시대에 이러한 것은 아주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빈승이 의란에서 매주 수
“홍법 초기 대만에 절은 있었지만 불교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누구를 말하는 이름인지, 불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직 민간신앙만 있었습니다. 민중 대다수가 신명의 가피를 바라는 민속신앙이 아주 보편적이었습니다. 저는 불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대만에 불법은 없고 민속신앙만이 번창한 것을 풍자하는 ‘성군선녀가 세속에 내려오다(星君仙女下凡塵)’‘종교동맹대회’라는 제목의 동화를 쓰기도 했습니다.”반복해서 탐구하고 마음을 쏟고 노력하면서 모든 부처님 말씀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
“빈승에게 다른 재주가 없었기에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방법을 찾으면서 단지 한 걸음 한 발자국 발전하였습니다. 현재는 불광산의 청년 빈승에 의지하여 런던, 베를린, 파리, 마드리드, 네덜란드 심지어는 세계 곳곳의 많은 유명도시에 절과 도량을 지었습니다.”빈승은 면세로 비용을 줄이면서 미국에서 홍법의 길을 시작했습니다.자장과 의항 스님이 아주 능력이 있었던 덕분에 다음날 오후 그 스님들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2명이 탈 수 있는 차를 운전해서 돌아왔습니다. 차 가게주인이 “종교인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면서 차 값 1만 달러에
“불광산 창건 이후인 1975년 정부에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 경축행사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또 저를 파견하였는데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니 저에게 불교를 위해서 한바탕 사업을 펼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삼천 세계에 두루 비추고 불법의 법수가 오대주에 널리 흐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에 중생제도의 자비원력을 품고 몸은 법의 바다와 같이 배를 묶어 두지 않으며 일생으로 무엇을 추구했는지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빈승은 끝없이 ‘평안함과 행복으로 오대주를 비추리라’라고.” 빈승은 동년에 출가한 이후로 자신의
"빈승 개인의 밥 한 그릇 죽 한 그릇은 모두다 남들이 준 인연으로 허기를 채울 밥이 저에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빈승의 봄여름가을겨울에 입는 옷가지도 비록 몇 벌로 갈아입고 있지만 매번 입을 때마다 모든 수많은 인연을 마음 가득하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죽 한 그릇, 밥 한 공기 힘들게 온 것임을 생각해야 하고 실 한 가닥 한 가닥이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처럼 수많은 인연이 없었다면 어찌 제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 30년 전 어느 날, 타이베이 보문사에서 머물고 있을 때 한 노부인
“선생님과 어른 스님들의 매질과 욕설 교육, 수많은 억울함과 난감함, 손바닥 매 맞기, 벌로 무릎꿇기 등은 수시로 겪던 일이었지만 선생님들께서는 저에게 성장의 인연을 주신 것입니다. 저와 원한 관계도 아닌데 왜 저를 때리고 욕하셨겠습니까?”요즘 ‘돈(錢=前과 동음)을 향해서 봐라’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돈이 그리도 중요할까요?‘돈을 향해서 보는 것’ 이외에도 세상에는 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갖 공연을 좋아하기도 하고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 ‘불광친속회(佛光親屬會)’를 특별히 개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부모님과 가장은 우리들의 친족이자 사돈 집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딸이 불광산으로 결혼해서 들어온 것과 같고 우리들이 받아들였으니 가족이고 사돈인 것입니다. 친속회를 열어 부모님이 자신의 자녀를 보러 와서 불가에서도 전도가 유망하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불법을 탐구하고자 기독교도가 불자가 되기도 합니다.빈승이 불법을 펼치던 초기 대만 사회에서 불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웅양화(熊養和)’라
“세계 각국의 천지신명도 성지를 순례하고 불타기념관에서 함께 만나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등 세계의 일체 신들을 종교교류를 통해 불광산에서 세계평화를 기원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부처님의 광명이 두루 비추고 불법의 법수가 오대주에 두루 뿌려지고 있습니다.”불타기념관을 건설하던 기간 중에는 원숭이도 찾아와서 놀고 근처 고병계 하천의 백로도 날아와서 먹이를 찾기도 하고 심지어는 공사장 인부들이 먹던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50여 마리가 넘는 유기견이 몰려들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은 불타기념관이지 빈승이 개를
“신도들이 불광산에 와서 저를 찾으면 “스님은 주방에 계세요”라는 말에 국수를 끓이고 있는 저를 보게 되더라도, 말을 나눌 시간이 없어도 “대중들이 먹을 수 있도록 국수 좀 날라다 주세요”라는 저의 말에 그들도 기꺼이 나서서 도왔습니다. 대만 자원 봉사자의 성장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 저는 1975년 정월을 맞으면서 매일 주방에서 국수를 끓였는데 하루에 큰 솥으로 50솥 이상을 끓였습니다. 신도들이 불광산에 와서 저를 찾으면 “스님은 주방에 계세요”라는 말에 주방으로 찾아와도, 국수를 끓이고 있는 저를 보게 되더라도, 말을
“불광산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이것을 기증해주는 사람이 있고 저것을 기증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빈승은 사람들에게 한번도 무얼 기증하라고 입을 뗀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이 내놓지 말고 보시는 가늘고 기다란 물줄기처럼 조금씩 하라고 사람들에게 항상 말합니다.”빈승이 일생에서 먹어봤던 음식은 모두 잊지 못하고 일체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수십년 전 타이베이 김지고(金枝姑) 선생의 집에서 마셨던 시원한 우유 한잔은 마치 감로수와도 같아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70년전 진강의 ‘일지춘(一枝春)’이라는 작은 국수집에서
“저의 기쁨과 낙관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기쁨을 버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누구나 남이 주는 것을 내가 받아야 기뻐하지만 사실 베푸는 것은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재산을 지니게 되면서 남한테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다가 마지막에는 자식들 간에 재산 싸움이 되면서 사회에서조차 어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저의 기쁨과 낙관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마음 속 샘물에서 흘러나오고 사상의 통로에서 나오고 대중과 함께 하는 속에서 나오며 인간관계의 감사함으로부터 나오고 열심히 일하여 성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