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고 싶은 인면어 포뇨와 소년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 소녀 물고기 포뇨는 인면어입니다. 생명의 원천 바다를 다스리는 아빠 ‘후지모토’와 관세음보살 엄마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호기심 많은 물고기 소녀 포뇨는 따분한 바다 생활에 싫증을 느끼지요. 급기야 아빠 몰래 동경하던 땅으로 가출을 감행합니다. 해파리를 타고 바다 속까지 비추는 햇살에 반해 땅으로 땅으로 향합니다. 그 와중에 바다 속 쓰레기를 치우는 배의 그물에 걸려 유리병에 갇히고 맙니다. 다행히 해변에 놀러 나온 소년 ‘소스케’의 도움으로 구출된 포뇨는 소년이 마련한 초록 양동이에서 즐거운 육지 생활을 시작합니다. 포뇨는 곧 아빠에 의해 바다로 돌아가지만 소스케
▲평범한 행복을 꿈꾸었던 이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은 분별심이었다. 승가원장애아동시설에 갔을 때 일입니다. 처음으로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손이 없는 아이, 침을 흘리는 아이, 눈이 먼 아이들…. 마주 한 지 10분도 못돼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한 동안 다시 찾아가지 못했지요. 마음이 아파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장애’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마음속 ‘장애’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분별은 가끔 폭력적인 일을 낳기도 하지요. 승가원장애아동시설을 박차고 나왔을 때, ‘정상’과 다른 부류로 아이들을 분별했던 마음가짐은 ‘사람’을 둘로
마음의 눈을 뜬 길손이와 감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 눈은 엄마가 걸음마도 못하는 동생 길손이를 불길 밖으로 구한 후 당신은 타들어 갈 때, 그 때 닫혔습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어느 덧 씩씩해진 길손이가 제법 누나를 아껴 줍니다. 늘 제 손을 잡고 걷는 길손이는 제게 세상을 보여줍니다. 길손이처럼 따듯하게 세상을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빨간 단풍잎을 좋아하는 누나에게 예쁜 누나 손을 닮았다고 합니다. 개똥지빠귀를 만나 슬프게 노래한다며 새들의 노랫소리도 전합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들 향기도 가르쳐줍니다.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병아리 가슴털 같이 뽀송뽀송 털이 났어. 저기 저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보다. 그치?” 산
영화는 거짓말 속에 감춰진 진실을 그린다. “코카콜라를 구할 수 없을 때 대용품으로 드시면 좋아요.” 이런 펩시 광고 문구를 본 적이 있나요. 코카콜라는 “콜라는 설탕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들 좋아합니다. 앞으로 계속 이용해주세요”라고 광고를 합니다. 이렇게 솔직한(?) 광고는 처음입니다. 현실 속 이야기냐고요. 물론 아닙니다. 모두가 ‘진실’만을 말하도록 사람들이 태어났다면 어떨까요. 여과 없이 속내를 밝히는 세상. 거짓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회사에 전화해 “그냥 당신들이 보기 싫다”는 이유를 대고 결근을 합니다. 또 다른 이는 길 가는 부모와 아이에게 “얘가 꼭 쥐처럼 생겼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집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마루 위 인간세상으로 뛰어든 10cm 소녀 아리에티. 안녕하세요. 호기심 많은 소녀 아리에티랍니다. 올해 열네 살인데 좀 작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꼭 10cm이니까요. 제 얘기 한 번 들어볼래요. 귀를 기울여 주세요.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식구입니다. 우린 교외의 오래된 저택 마루 밑에서 삽니다. 마루 위 사람들한테 들키면 우린 이곳을 떠나야 한답니다. 속삭이듯 말해도 귀를 기울여 주세요. 우린 사람들의 물건을 몰래 빌려 쓰며 살지요. 훔친다고요?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만 빌려 쓰니 오해하진 말아주세요. 마루 위 사람들에게 우리가 빌리는 것들은 그렇게 큰 게 아니랍니다. 각설탕 1개, 빨래집게 하나 없어진다고 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니
소중한 이의 행복한 마지막을 그린 “굿’ 바이”. 바르르. 손끝이 떨립니다. 잊었던 아니 잊으려했던 아버지의 얼굴이었습니다. 30년 넘게 소식이 없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안부가 시신을 수습하라는 부음이라니요. 매정하게 외면했습니다. 아내가 간곡히 원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자고. 한 생각 돌이켰습니다.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싸늘히 누워있는 아버지. 장의사는 너무도 무례하게 아버지의 시신을 관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 손들을 뿌리쳤습니다. 아내가 그들에게 말을 합니다. “제 남편은 납관사에요.” 합장을 하고 몸을 정갈히 닦았습니다. 이승의 피로와 고통, 번뇌를 씻는 동시에 저승으로 떠나는 ‘영원한 여행’을 도왔습니다.
미국의 검은 욕심을 파헤치는 밀러 준위. 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경. 고요했던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는 화염에 휩싸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은 사라지고 고통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한 도시는 아비규환 그 자체가 됩니다. 미국의 바그다드 대공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내세운 명분은 바로 민주주의 안착과 이라크 내 대량 살상 무기의 제거였지요. 정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2001년 9.11 테러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미국은 2002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했습니다. 1년 뒤 미국은 명분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하기에 이릅니다. 정말 미국은 민주주의의 안착과 대량 살상 무기의 제거를 위해
인간의 욕망에 맞서 숲을 수호하는 모노노케 히메와 들개. 삶은 끝없는 욕망입니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을 넘어 더 맛있는 음식을 찾게 마련입니다. 더 멋진 옷, 더 안락한 집, 더 많은 돈. 배불리 먹고 편히 잘 수 있으면 ‘더’라는 단어가 붙지요. 그렇게 ‘더’라는 단어 한 글자를 삶에 덧붙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는지요. 쉽게 알기란 어렵습니다. 무턱대고 휴지 한 토막을 뚝 끊어 씁니다. 그와 동시에 나무 몇 그루가 사라집니다. 가슴에 와 닿으시나요. 자연과 신, 인간이 동등하게 서로 공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부족의 용맹스런 소년 아시타가는 재앙신이 된 멧돼지와 맞닥뜨립니다. 멧돼지를 죽인 원흉은 다름 아닌 인간의 욕심 덩어리였습니다. 멧돼지의 원망을
이별은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사진은 ‘토이스토리 3’.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직장을 옮긴 아버지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삿짐을 다 옮기고 난 후 뒤늦게 알았습니다. 아톰 장난감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늘 손에 쥐고 놓지 않았으며, 아톰은 하늘을 날고 정의를 위해 싸웠던 친구였습니다. 그를 잃어버렸지요. 그날 저녁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소중했던 무언가와 이별을 겪으며 조금씩 어른이 되는 가 봅니다. 손때 묻고 추억이 서린 장난감. 그들을 잊거나 잃어버렸을 때, 어린 시절과의 이별을 겪을 때의 슬픔은 우리들만의 감정은 아닐 테지요. 장난감에, 소중한 그 무엇에 서린 추억이 손때처럼 그들에게도 남아있을 테니까요. 어린
꿈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접히는 꿈속 공간. 꿈을 디자인하는 현실의 세계가 있습니다. 때는 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 생각을 훔칠 수 있는 가까운 미래입니다. 코브는 생각을 지키는 요원이자 훔치는 전문가이지요. 그러나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채 도망자가 됩니다. 어느 날 거대기업 후계자의 꿈속에 침투해 새로운 생각을 심어 기업의 합병을 막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의뢰인의 조건은 바로 거액의 돈과 코브가 누명을 벗고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의 귀가를 간절히 바라는 코브는 팀을 꾸려 생각을 심는 ‘인셉션’ 작전을 수행합니다. 코브 일행은 꿈속의 꿈 그리고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들어갑니다. 코브는 일을 마치고서도
꿈을 잊고 지내던 이들에게 희망의 하모니를 선사하는 영화 코러스. 흥얼거려 봅니다. 그러면 지치고 힘들었던 오늘 하루가 조금 가벼워집니다. 인순이의 ‘거위의 꿈’을 부르며 삶에의 의지를 다져보기도 합니다. 혹여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다면 어깨까지 들썩입니다. 노래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해줍니다. 절망까진 아니더라도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니까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하모니를 전해 준 ‘코러스(The Chorus, Les Choristes)’. 이야기는 한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에서 시작합니다. 수많은 청중을 사로잡는 교향악단의 지휘자 모항쥬는 어머니의 부음 소식에 고향인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돌아옵니다. 그에게 옛 친구 페피노가 낡은 일기장을 들고 찾아오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평소 말수가 적으셨습니다. 일을 마치면 꼭 집에서 저녁을 드셨습니다. 자식들에게 따듯한 말보다는 야단이 우선이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던가요. 모두가 큰 아들의 생일을 잊고 있었을 때, 아버지는 퇴근길에 케익을 사오셨습니다. 웬 케익이냐며 모두가 의아해했습니다. “큰 아들 생일이잖아.” 이 한마디는 가족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얼마 전 허리를 다치셔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향의 병원에서 뵈었습니다. 걱정 하지 말라며 어서 서울로 올라가 직장 생활 열심히 하란 말씀 뿐이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들은 어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약해지셨다. 평생 가족만 보고 일만 하시던 분이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한 장면. 삶은 죽음이 있어서 더 빛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그 사실을 잊고 삽니다. 언제 무슨 일로 먼저 맞이할 수도 있지만 아직 죽음이라는 삶의 과정이 쉽게 다가오지 않아서 이기도 하지요. 삶이 유한하다는 진리가 삶을 더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해롤드 크릭이라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그는 숫자에 아주 민감하고 정확합니다. 양치질하는 횟수와 넥타이를 매는 공식, 출근 버스를 타러 가는 곳까지의 발걸음 숫자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반복된 일상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는 국세청에서 일합니다. 미납세자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을 하
돌고래 살육이 벌어지는 일본 해안가. 한 무리의 돌고래들이 바다를 가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10여 마리의 돌고래들이 무리에서 뒤쳐집니다. 무리 가운데는 하얀 배를 수면 위로 내놓은 채 가라앉는 돌고래가 있었지요. 놀라운 장면은 주위 돌고래들의 행동입니다. 숨쉬기 어려운 그 돌고래를 온몸으로 들어 올립니다. 40여 분 후, 결국 그 돌고래는 숨을 거두지요. 그러나 주위의 돌고래들은 죽은 돌고래 곁을 한참 빙빙 맴돕니다. 언젠가 우리나라 해양학회에서 국제해양학회에 보고했던 영상입니다. 2010년 제82회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인 영화 ‘더 코브-슬픈 돌고래의 진실’ 은 일본의 포경마을 ‘타이지’에서 벌어진 대규모 돌고래 포경의 참혹한 실태를 비밀리에 촬영해 고발합니다
‘줄무늬 잠옷을 입은 소년’ 영화 포스터. “유년기는 이성의 어두운 시간이 자라기 전에 소리와 냄새와 시각에 의해 재단된다.”(영국 시인 존 베처먼) 유년기에 우정은 갑자기 타오르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꺼져 버리기도 합니다. 결코 한결 같지는 않죠. 그러나 언제나 격렬합니다.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이 지구를 황폐화시킬 무렵 나치 장교 아빠를 둔 여덟 살 소년의 마음에 불편한 우정이 찾아옵니다. 바로 철조망 속 유대인 소년이지요. 영화 ‘줄무늬 잠옷을 입은 소년’은 나치 장교의 아들인 브루노가 아빠의 근무지 이동으로 따라간 곳에서 유대인 포로수용소를 바라본 모습을 그렸습니다. 겨우 여덟 살 소년의 눈에는 수용소가 농장으로, 그 속에 갇혀 지내는 유대인은 이상한 줄무늬
기도하고 있는 수도사. 사람이 입을 닫았습니다. 주변은 숨소리만 남고 내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 많은 소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침묵이 낯선 탓입니다. 좋든 싫든 하루 종일 말과 말 사이를 오가니까요. 텅 빈 방에 홀로 들어갈 때 침묵이 싫어 TV를 켜놓고 나오기도 합니다. 해발 1300m 알프스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교 카르투지오 수도회 그랑드 샤르트뢰즈(La Grande Chartreuse) 수도원의 모습을 그린 ‘위대한 침묵’은 잊고 지낸 소리를 찾아줍니다. 수도사의 삶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2시간 42분 동안 ‘지나치게’ 조용합니다. 수도원은 영화 촬영을 허가한 대신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적 소리 외에 어떤 음악도 추
영화 ‘작은 연못’의 한 장면. “아무나 죽어서 꽃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 가슴 안에 한 송이 꽃이라도 피운 적이 없는 사람은 그저 죽어서 한줌 흙이 되는 것으로도 감지덕지 할 일이다”(이외수,『청춘불패』) “당신은 노근리 사건을 아시나요?” 이 질문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감각적 욕망과 미래에 펼쳐질 편리한 세상만을 꿈꾸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은 쉽게 잊거나 외면하고 잊고 살아갑니다. 특히 불편한 과거이거나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이유 모를 무차별 공격에 스러져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주민들에게도 전쟁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달이 두 개라면, 날아다닐 수 있다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다면, 동물과 식물이 말을 한다면 어떨까요. 엉뚱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상상입니다. 어린 시절 불가능이 없는 이런 상상 속에 빠진 적은 없었나요. 엉뚱하고 행복한 상상은 반복돼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영국 아동문학 작가 루이스 캐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팀 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엉뚱하고 소심한 소녀 앨리스 킹슬리를 마땅찮게 바라봅니다. 사실 앨리스는 매일 이상한 나라를 방문하는 꿈을 꾸고 아침마다 6가지 불가능한 일들을 상상합니다. 조끼 입은 토끼와
1993년 개봉한 ‘쿨러닝’은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들의 실화를 그린 스포츠 영화다. 차마 몰랐던 사실을 접했을 땐 감동을 받곤 합니다. 일상 속 틈바구니에서 발견한 낯선 풍경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위틈에서 싱그러운 생명을 뽐내는 이름 모를 풀꽃들과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꽃을 피워낸 민들레를 만났을 때 어떤가요. 올림픽이라는 세계적 스포츠를 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 선수들과 겨루는 국가대표를 열렬히 응원합니다. 그러나 금메달의 갯수로 순위를 정하는 모순적인 순위 매김에 현혹돼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만 열광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볼 일입니다. 고된 연습의 시간을 온통 땀으로 보냈지만 메달과 인연이 닿지 않아 눈물을 흘리는 선
‘집행자’는 사형집행관의 인간적 딜레마를 파고든다. 오늘 출근해서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세상은 그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고 울부짖습니다. 죽여도 괜찮다고 말해봅니다. 그러나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세상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죽입니다.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여야 하는 이들의 고통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까요. 최진호 감독의 ‘집행자’는 상대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또 다른 살인’을 해야 하는 사람, 사형집행관의 인간적 딜레마를 파고듭니다. 신입교도관 재경과 베테랑 종호, 정년퇴임을 앞둔 김 교위는 영화 안에서 12년 만에 부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