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반 동안 한국불교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 객관적 현실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외부를 향한 시선은 때로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덮기 위한 수단인 경우도 있지만 이 연재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단지 외부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객관이란 결국 자신을 성찰하는 힘이기 때문에 한국불교 세계화는 곧 한국불교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절한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화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화는 과거에 경험할 수 없었던 시간과 공간의 압축을 가져왔다. 한 지역의 경제위기가 다른 지역의 경제에 바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한 지역의 환경재앙이 전 지구의 재앙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한국불교의 문제는 불교만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에만 한정된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전통과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해 템플스테이, 사찰음식과 더불어 세계무대에 내세우는 한국불교의 대표주자는 간화선이다. 간화선을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하여 최근까지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이 수행법이 한국에서 전승되고 있는 특수한 수행법임은 분명하다. 간화선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한국불교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간화선 한 방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그것이 “동양정신문화의 정수”인지, “세계정신문화를 선도할” 수행법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문제가 단지 1700년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를 제대로 알리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세계인들이 공감할 부분이 진정 있었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여러 명상모임에
포스트모던 시대 소비의 특징 중 하나는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맛만 아니라 문화도 함께 소비한다. 예를 들어 고급 프랑스요리를 먹는 것은 음식의 맛만 아니라 프랑스 문화까지 함께 소비하는 것이다. 특별한 날 비싼 프랑스요리 레스토랑에 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요리인 스시도 마찬가지다. 원래 서양 사람들은 생선을 날로 먹지 않지만, 19세기 말 미술계의 자퐁니즘의 유행과 1960년대의 젠붐을 통해 일본문화가 고상한 취미로 간주되면서 스시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되었다. 서양에서 스시를 먹는 사람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이처럼 스시를 먹는 사람은 일본문화의 아우라도 함께 소비한다. 사찰음식에 대한 우리들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출가 전에
템플스테이와 사찰요리는 어느덧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것들은 한국불교 세계화의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되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작은 성공이나 외국인의 평가에 호들갑을 떨 만큼 한국불교의 현실이 열악한가하는 씁쓸함도 없지 않다.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대표적 전통문화인 불교를 국가브랜드로 만들려는 정부의 정책과 연계되어 있으며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지난해 뉴욕과 올해 파리에서 행해진 사찰음식 소개 행사는 국고지원을 받고 있다. 굳이 국가정책에 반대하고 국고 지원을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기왕 하는 것이라면 작은 상업적 성공이나 민족적 우월감에 도취되지 말고 불교정신과 문화를 전할 수 있도록 기획해야 한다. 얼마 전 미국불교 관련 자료를 찾던 중 2006년도 뉴욕타임지에 실린 한국 템플스테이 관련 기
그동안 해외의 한인사찰은 해외포교에 관심을 가진 몇몇 사찰이나 승려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러나 개인의 원력에만 기대다보니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사찰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사찰의 규모나 신도 수에서도 한인교회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승려의 자질과 수이다. 고작 1~2명의 승려로는 겨우 사찰만 운영하는 정도이고, 미국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한 포교는 물론 이민 2세를 위한 한국어 교실이나 어린이, 청소년 법회는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서 불자들마저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해 한인교회를 가게 되고 그것은 곧 신도의 이탈로 이어진다. 신도의 감소는 다시 사찰재정의 악화로 귀결된다. 이 때문에 일부 스님들이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경우도 있다. 관음선종의 한 사찰에서
‘법화경’의 비유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배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불교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일부에서는 한국불교가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나거나 왜곡되었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한국불교는 상당히 중요한 측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계승하고 있다. 비구니 승가와 더불어 전통 승가의 존재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불교의 탁월한 장점 중 하나이다. 얼핏 보아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한국 승단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반론이 있겠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올 봄 대만에서 열렸던 세계불교학대회에서 대만 비구니 스님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작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을 때 전국 각지의 전통
지난 5월 태국에서 열린 세계여성불자대회와 대만에서 열린 국제불교학대회에서 아시아비구니 승단 복원 문제는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다. 당사자인 아시아 여성 뿐 아니라 서양 여성과 남성들도 깊은 관심을 갖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처음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서양 여성들에 의해서다. 아시아에서 불교수행을 하려고 했을 때 그들이 거부감을 느꼈던, 아니 그들을 거부했던 것은 바로 여성출가 문제였다. 비구니 승가가 없는 곳에서 서양 여성들이 출가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일부 서양 여성들은 수계를 받지 않은 채 수행을 계속 했지만, 일부는 대만이나 한국, 또는 미국에서 계를 받는 우회로를 택했으며 아시아 여성들도 그들의 선례를 좇아 외국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뒤 본국에 돌아가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한국여성이다. 비구 승가 중심의 한국불교에서 한국여성이 그 대표라면 의아해할 사람이 있겠지만 불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한국불교에서 여성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더구나 지난번 연재에서 말한 것처럼 여성불자의 신행은 여러 면에서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주된 요소이기 때문에 그 의의가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한국불교를 세계적에서도 독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구니 승가의 존재이다. 비록 비구니 스님들이 아직까지 종단 내에서 대표성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비구니 승가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난 연재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의 다양한 불교전통이 도입되어 한국불교를 변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 불교인들의 인적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인적 교류 역시 한국불교를 알리는 통로이다. 올해 벌써 세계여성불자대회, 세계불교학대회, 대장경학술대회, 그리고 며칠 전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간화선 국제학술대회까지 크고 작은 국제행사들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국내외에서 더 많은 국제행사가 열릴 것이고 그와 더불어 한국불교를 알릴 기회도 더 많아질 것이다. 이 행사들을 통해 외국불자들이나 학자들은 한국불교의 어떤 면을 볼까? 올해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에는 박사 후 연수를 했던 스미스대학의 피터 그레고리 교수와 제이미 허버드 교수, 그리고 테네시대학의 미리엄 리버링 교수 등 잘 아는 외국학자들이 초청되었
‘한국불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색창연한 산사와 삭발염의한 스님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태고사나 뉴욕 한마음선원 등 몇몇 사찰은 한국 전통양식으로 지어져 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한인들에게는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인사찰은 미국식 건물이다. 한국에서도 새로 건축되는 도시 사찰은 현대식 건물로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기능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는 주변 여건 상 한옥은 현대 사찰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기능을 행하거나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과 같은 외형적인 요소 뿐 아니라, 명상이나 의례 등 종교적 수행의 핵심적인 부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삼십 년 전만해도 외도 수행
한국을 떠나 타국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얼마 전 참가했던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날 식탁에서 나눈 대화는 동양인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이었다. 동양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을 금기시한다고 같은 식탁에서 공양하던 어떤 미국인이 말을 꺼냈다. 죽을병이 걸린 사람이 자신의 병에 대해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설사 가족들이 그 사실을 다른 경로로 알게 되었더라도 암묵적으로 그 사실을 알더라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 동양인의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중국계 미국인인 에이미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의 어머니가 갖고 있는 동양적 관습과 사고방식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아이들과도 갈등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얼마 전 세계여성불자대회와 세계불교학대회에 참석차 태국과 대만을 다녀왔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였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보안검사장으로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남학생도 더러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중고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학생들이여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그들은 어느 연예인을 기다리고 있는 팬덤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라 놀랍고 신기해서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연예인은 놀랍게도 장근석이라는 신한류 스타였다. 방송에서는 일본에서 인기 있다고 하더니 대만에서도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이처럼 한류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미국에 갔을 때 곳곳에서 한류 이야기를 들었다. 미
한인사찰에 온존하고 있는 전근대적인 관습이 한국불교를 전파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한인사찰에서 이루어지는 법문의 문제점을 지적할까 한다. 사실 법문은 기도나 명상보다 더 중요하다. 이민자들이 바쁜 생활 속에서 부처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인사찰에서 이루어지는 법문은 한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법문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우연히 들렸던 한인사찰에서 젊은 비구 스님의 법문을 들은 적이 있다. 신세대적 감각을 갖춘 스님이었기 때문에 내심 큰 기대를 했지만 그날의 법문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법문의 요지는 많이 소유할수록 번거로운 일이 많아지니까 무소유가 좋다는 것이었다. 큰 집을 장만하면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 잔디 깎을 일이
그동안 미국 주류사회에서 부는 불교 붐과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의 문제 때문에 이민 2세들에게 불교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현재 한인사찰이 그런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인사찰은 이민 2세들이 한국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장소이지만 한국 전통 중 불합리하고 전근대적인 요소가 온존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권위주의이다. 한국 유학생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대체로 한국여자들은 미국에서 잘 적응하는 반면, 한국남자들은 적응을 잘 못한다고 한다. 이는 한국에서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다 보니 어디서든 적응할 수 있는 자생력을 갖춘 반면, 권위주의에 익숙한 한국 남성들은 낯선 문화에서 약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날카롭
서양인에게 불교를 설명할 때 몇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대자대비를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여 말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이렇게 했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서양에서 어머니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사랑과 희생이 아니라 강한 고집과 냉정함으로 표상된다. 내가 만난 미국인 중 어머니에 대하여 동양인과 같은 감정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춘기 반항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머니와 심리적 갈등을 겪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설명하면서 “어머니처럼”이라고 말하면 서양 사람들은 감동은커녕 거부감을 보인다. 그러므로 서양에 불교를 전할 때 문화적 차이를 잘 고려해야 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오랫동안 미국에서 공부했던 스님을 만나 여러 가지 조언을 들었다. 그
불교가 명상을 통해 서양에 알려졌지만 최근엔 다양한 불교수행법이 소개되고 있다. 기복적인 성향이 강한 창가학회를 비롯한 일본 신흥종교들이 서양에서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보면 한국불교가 지나치게 간화선 하나만 고집한다는 생각이 든다. 간화선 이외에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108배 참회가 서양에 알려져 있다. 내가 있던 미국 동부의 작은 도시에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와 일본 조동종 계열의 선센터가 있는데 그 중 선센터와 인연이 닿아 자주 그 곳을 찾았다. 어느 날 그 곳에서 108배를 하는 노신사를 만났는데, 그는 프로비던스에서 숭산 스님의 지도를 받은 뒤, 선센터에서 가르치는 다른 수행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큰스님이 시킨 대로 매일 와서 108배를 한다고 했다. 몇 년 수행하면 바로 지도
스미스 칼리지에서 연수를 하는 동안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을 만났는데 그 중 티베트 출신 학생들도 있었다. 이 대학에서 티베트불교를 가르치는 제이 가필드 교수의 배려로 특별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 한 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학생이었다. 제이미 허버드 교수의 강의를 청강할 때 만났는데, 생김새도 분위기도 다른 티베트인들과 전혀 달랐고 유창한 영어에 자연스럽게 미국학생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라마’라는 성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미국학생들과 달리 나에게 무관심한 그의 태도 때문에 학기가 한참 흐른 뒤에 그 학생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짧은 대화를 통해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뉴욕주에 있는 사원이 집이며 아버지가 티베트 스
새해 들어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국제포교 인력양성을 위한 조계종 국제불교학교가 개원되었고 해외교구 설립을 위한 논의도 활발하다. 국제선센터의 설립과 국제포교 프로그램의 개발과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처럼 훌륭한 교육시설과 행정지원이 있더라도 교육과 포교현장을 연결하는 면밀하고 통일된 전략이 없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하여 현대사회의 흐름을 바로 알고 그에 맞는 포교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얼마 전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한 방안으로 외국인을 위한 포교와 해외한인의 포교를 이원화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외국인 포교를 위해 해당 언어에 능통하고 그 문화를 잘 이해하는 외국인 스님들을 활용하고, 해외 한인을 위한 포교는 한국인 스님들이 담당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한인교회의 실상과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놓고 지루하게 이웃종교 이야기를 하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웃종교의 성공과 실패담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소중한 정보이다. 오히려 놀라웠던 점은 한인2세들이 한인교회를 떠난다는 이야기는 십여 년 전부터 공공연한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들의 시야가 좁다는 이야기이다. 기독교나 가톨릭 교계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나 잡지, 학술지를 살펴보면 매번 불교 관련 기사와 논문이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불교의 현황을 살피면서 좋은 점이 있으면 바로 가져다 쓴다. 49재나 명상을 가톨릭에서 가져다 쓴 것이 어제 오늘의 일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2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다. 가정에서는 한국식으로 행동해야 하고, 학교나 사회에 나가면 미국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받는다. 간단한 예로, 미국학교에서는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먹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한국 가정에서 어른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 밥을 먹었다간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반면, 집에서는 찌게나 반찬을 늘어놓고 함께 먹지만 미국인과 식사할 때 이렇게 행동했다간 비위생적이라며 기겁을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생활했던 어느 소설가의 아들이 일본에서는 상대방에게 밥 먹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식사예절 때문에 그릇을 들고 식사하도록 배웠다가 한국에 온 뒤 그릇을 들고 식사하는 것이 쌍것들이나 하는 짓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