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생활은 나를 담금질 한 시간 참선후 우유부단-열등감 사라져 선원생활은 생활 그 자체가 수행이었다. 이런 저런 일로 선원에 와서 선사님께 자신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도반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런 중 언뜻언뜻 내 어두움과 탐욕과 어리석음이 드러나 머리를 쳤다. 또 무심코 내뱉는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잘못 살고 있는 증거가 드러나고 그것을 내 눈으로 내 귀로 직접 보고 듣게 되었다.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뼈아픈 참회로 이어졌다. 전부 다 내 탓이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주위의 아픔은 모른 체 자기 연민에만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내 과거가 뼈에 사무치도록 부끄러웠다. 주위의 인연들에게 참 미안했다. 특히 휘둘려 사느라 편안한
잭 콘필드는 동남아시아에서 10여 년간의 긴 출가수행을 하면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정서적인 문제들(비난하는 경향, 두려움, 인정과 거부 등의 심리상태)을 교정하고, 인관관계를 맺는 방식을 자각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법과 인간관계의 강한 힘을 통해 배워가는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시작했다. 한 때는 출가 수행자였던 잭은 승복을 벗고 이제 집단 치료와 개인 치료를 통해서 그리고 가슴을 중시하는 명상과 자아초월 심리학과 때로는 성공적이지만 때로는 괴로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치유의 과정을 밟아갔다. 잭은 먼저 자기 가족사와 어릴 때의 경험을 검토하고, 현재의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검토하는 작업에서 출발했다. 현재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내와 딸과의 어려웠던 관계의
열심히 살았지만 늘 허탈-괴로움 교직원연수를 계기로 불교에 눈떠 과거의 집착과 탐욕 때문에 생긴 고집에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고 그로부터 생긴 상처가 어둠이 되었다. 그 어둠 속에서의 시간은 고달픈 여정이 되고…. 언제부터인가 내 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내면의 어두움은 늘 나와 함께 했다. 그전에 학교 다닐 때에도, 결혼하고 나서도 이 어두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왜 우리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 책도 뒤지고 생각도 했지만 시원하게 알지 못해 ‘고통이란 해답이 없고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단념해 버리고 지냈다. 결혼 후 아이를 갖고 낳는 일이 나에게는 참 힘들었다.
無知 알면서 탐욕-성냄 줄어 ‘게으르지 말자’ 다짐하며 정진 수행이 깊어질수록 들뜬 마음은 가라앉고 호흡과 마음을 주시하게 되니 조금씩 선정의 단계를 접하게 됐다. 슬픔이 오면 슬픔이 오는구나. 괴로움이 오면 괴로움이 오는구나.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집착은 조금씩 소멸돼 갔고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망상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욕망과 갈망, 즐거움으로 깨어나지 못했던 한 중생이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이 깨어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게 되었고 현재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일들이 얼마나 무한히 평화로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호두마을을 찾은 도반은 모두 5명. 우리 다섯 도반은 당시 누구하나 모자람 없이 열심히 정진하는 수행자였다. 3개월 뒤 회향식은 봉행됐고 은사 스님은 우리들에게 수행
13세 때 불공 갔다 발심출가 운봉 스님은 백양사 운문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번뜩이는 선기로 후학들을 제접했다. 천하의 선객 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운봉 성수(雲峰 性粹) 큰 스님은 1889년 음력 12월 7일, 부처님 성도일 전날 밤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속가의 성씨는 동래 정(鄭), 이름은 성수였고 운봉은 법호이다. 13세 때 부친을 따라 경북 영천 은해사에 불공을 올리러 갔다가 발심하여 김일하 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득도하였고, 23세에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만하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등 천하의 명산고찰을 찾아다니며 당대의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고행정진하던 중 호남땅 백암산 운문암에서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게송을 읊었다.
남편과 불화…시간 갖기 위해 절 찾아 처음접한 수행…고요한 분위기에 매료 수행을 시작하기 전 나의 삶은 고통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편과의 성격차로 다툼은 잦았고 삶에 대한 불만은 하루하루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남편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질 않으니 당분간 떨어져 생활할 것을 요구했다. 남편의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불같이 화를 내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남편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자 알기에 이내 허락을 했고 대학을 갓 졸업한 딸아이에게 살림을 부탁하고 무작정 인연 있던 절로 길을 떠났다. 이왕 온 길 제대로 한번 불자가 돼보겠다는 생각에 절하는 법부터 새로 배웠고 부처님 공부도 하나씩 시작했다. 그렇게 절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인도 이외의 땅에 전해질 때, 각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와 조화를 이루면서 토착화되었다. 전통문화에는 종교와 사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간 신앙과 세계관이 내포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에 전해진 남방상좌불교는 각 지역의 민간 신앙과 종교적 심성과 어우러졌다. 티베트에 전해진 인도 대승불교는 전통 신앙인 본교와 결합하면서 린포체 사상으로 승화되었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천태학과 화엄학 등의 고도의 교학불교를 잉태하였고,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가장 중국적인 불교인 선불교를 잉태하였다. 한국에 전해진 불교는 전통적인 샤마니즘과 습합되었으며, 중국불교의 영향 아래에 선불교를 한국불교의 정통불교로 정착시켜면서도 티베트불교의 진언 수행이나 염불 수행 등 폭넓은 수행의 전통을 아우르는 종합불
아침마다 참선·간경…주변서도 도움 이제부터는 도움주고 베푸는 삶 서원 밑 없는 절망에서 발견한 실낱같은 희망. 걱정과 근심이 앞섰지만 참선을 하면서 생긴 용기로 무언가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솟았다. ‘그래 한 번 다시 해보자’라는 각오로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 금정선원에서 만난 대명화 보살님은 우리가 시작할 수 있도록 정말 많은 힘이 되어주셨다. 인생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모두가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분이 주신 용기와 희망은 ‘세상은 혼자만 잘 살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합심해서 사는 것이다’라는 진리를 다시 깨닫게 해주셨다. 예전에 절에 다녀도 불교의 참된 진리를 이해하는 마음 없이 가곤 했지만 이때부터는 정성을 다해 매일 아침 6시, 『천수경』, 「화엄경 약찬게」를 틀어놓고
IMF로 사업 실패로 빚더미 올라앉아 절망서 참선 한 후 비로소 희망 가져 더웠던 올 여름,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려가며 무더위와 싸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시원한 가을바람을 기다렸나 보다. 오늘은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절로 힘이 났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그러나 지금의 행복이 있기까지 나도 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을 겪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내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분들에게 이 이야기들이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쓴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런대로 좋은 집안으로 시집와 자상한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풍족한 여유로움을 누리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
숲속에 자리한 수행처에서는 매년 25번이 넘는 집중수행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이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미국불교의 중심 문제를 조셉 골드스틴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협회(Insight Meditation Society, 이하 IMS로 약칭)를 설립한 잭 컨필드는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Jack Kornfield, ‘Is Buddhism changing in North America’, Buddhist America : Centers Retreats, Practices, edited by Don Morreale, Santa Fe: John Muir Pub., 1988, pp. xi-xxviii) 1989년 ‘배리 불교센터’ 건립 첫 번째는 민주화(democ
버려진 이들 60명 가족처럼 돌봐 숱한 고난 경전 독송하며 이겨내 버려진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개를 사육해 마련한 수입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불자가 운영하는 저렴한 복지시설’이 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서 전국 각지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며 자기 가족을 맡아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식구는 점점 늘어났다. 20명이 30명이 되고 30명이 다시 40명이 되더니 결국 60명이 넘는 이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게 됐다. 장소가 협소해 컨테이너를 개조 목욕탕과 식당, 화장실 등으로 사용하다 보니 불법 건축물에서 환자를 수용한다며 관청으로부터 제재가 시작됐다. 당시의 고초와 어려움을 어찌 다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다시한번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신축해 정식 절차를
고봉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의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삼천리강토가 가난했던 탓에 덕숭산 정혜사의 절 살림도 늘 빈궁하기 그지없었다. 수행자는 많고 식량은 모자라니 그해 겨울 삼동안거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정혜사에 있던 모든 수행자가 걸망을 메고 양식을 탁발해 오기로 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 후 어떤 분은 열흘을 탁발한 뒤 걸망에 곡식을 가득 짊어지고 돌아왔고, 또 어떤 분은 보름을 탁발한 뒤 곡식을 짊어지고 절로 돌아와 양식을 보탰다. 숭산(崇山) 법호 하나에 담긴 스승의 뜻 고봉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의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삼천리강토가 가난했던 탓에 덕숭산 정혜사의 절 살림도 늘 빈궁하기 그지없었다.
조셉은 오늘날 미국에서의 위빠사나 붐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 전통은 20세기 초부터 미얀마와 태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미얀마에서는 레디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의 스승인 밍군 제타완 나라다 사야도가 있었고, 태국에서는 아찬 문을 위시로 많은 수행승들이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출가 수행승들 중심의 수행법이 점차 재가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본 「법보신문」의 ‘세계의 수행자들’에서 이 스승들을 소개해 왔다. 이번 호부터 이러한 남방의 수행법을 1970년대 중반부터 약 30년 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 가르치고 있는 재가 수행지도자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소개하고자 하는 이는 조셉 골드스틴(Joseph Goldstein)이다. (조셉에 대한 자세
아이 못낳는 괴로움 속 자살시도 정신질환자 도우며 희망 되찾아 지금 나의 삶은 평안하다. 비록 규모는 소박하지만 노인요양원을 운영하며 요양원 식구들과 하루하루를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매일 오전 4시에 눈을 떠 『금강경』 독송으로 하루를 시작해 저녁 12시에나 취침에 들 때도 『금강경』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러나 예전의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나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싶다. 25년 전 나도 남들처럼 결혼을 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유있고 행복한 생활이었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6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돌며 검사와 진료를 받아야 했고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만 갔다. 결국 정신적인 문제까지 동반하
Q : ‘마음’과 함께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의 작용이란 무엇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 것입니까? A :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었는데 물질은 오온의 색(色)이며 정신은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합니다. 그러나 정신을 세분화하면 식은 아는 마음이며 수, 상, 행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작용을 빨리어로는 쩨따시까(cetasika)라고 하는데 마음에 속하는 것, 또는 심소(心所)라고도 합니다. 마음의 작용은 항상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함께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능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마음의 작용은 마음이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있어서 마음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의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하는데 이
절 꺼리던 남편이 독실한 염불행자로 시어머니 등 가족도 염불하며 큰 가피 내가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하루하루 지옥 같은 생활에 더 이상 견디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염불은 막연히 갖게 된 고정관념, 그중에서도 ‘금생에 열심히 수행해서 다음 생에는 남자 몸으로 태어나 출가해 참선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던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 몸으로, 그것도 수미산 같은 업보중생의 몸으로 정토에 갈 수 있다는 말은 기쁨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나는 열심히 염불하고 또 염불했다. 그리고 나를 염불의 길로 이끌어준 혜명화 보살님을 따라 경주 미타사에 가서 큰스님의 법문을 듣기도 했다. 처음 절에 간다는 얘기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남편도 나중에는 차로 경주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렇지만 법당에
권위주의 남편 탓에 하루하루가 고통 매주 3000배 하다가 아미타염불 시작 지난 96년 불교에 처음 입문 했을 때 처음 만난 노스님께서는 “너는 놋그릇과 같다. 놋그릇은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난다. 잘 닦으면 극락에 갈 것이다”라고 하시며 『아미타경』을 한권 주셨다. 하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저 덕담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가까운 곳에 사시던 한 분이 해인사 백련암에 다니셨는데 그 분을 따라 매주 토요일마다 절에 다녔다. 108배도 해 본적 없는 나에게 무작정 3000배를 시작했고 매주 토요일 밤이면 삼천 배를 하면서 전생의 업장이 두터운 탓인지 따르는 고통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같이 삼천 배 수행하던 분 중 성철스님께서 아끼시던 보살님의 아드님을 알게
1960년대 말부터 인도를 여행하던 서양인들에게 명상수행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던 재가 스승들이 몇 분 있다. 본지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S. N. 고엥까-지는 1969년부터 서부 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는 미얀마에서 9년간 수행과 교리를 공부하고 돌아온 아나가리카 문인드라 바루아 법사(Achariya Anagarika Munindra Barua, 1914~2003)였다. 이 분을 사람들은 문인드라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문인드라-지라고 불렀다. 문인드라 지는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출신이었다.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은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탈로 인도불교가 모습을 감춘 후부터 현재까지 인도불교의 명맥이 이어져온 곳이었다. 문인드라 지는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온 바루
매일 금강경 15독…시어머니도 변화 “밥은 굶어도 금강경은 꼭 독송” 다짐 나는 매일 4시 30분경에 일어나 제일 먼저 금강경 1시간 독송으로 하루 생활을 시작한다. 출근해서 일과 시작 전, 점심, 그리고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15독까지 독송을 하기 시작했다. 많게는 20독을 넘길 때도 있다. ‘여시아문 일시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머리속에서 늘 금강경 글귀를 떠올리며 생활해 온지 2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부처님께 받았다.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내가 입은 가장 큰 가피가 나의 병을 일찍 발견한 것. 언젠가 꿈에 넓고 넓은 하천에 서 있었는데 발아래 물이 아닌 뱀이 끝없이 꾸물거리며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뱀은 업장소멸이라고 하였는데, 내 업이 그렇게 녹아내리고
만암 스님은 백양사에 주석하며 계율청정을 엄격히 해 칼날같은 승풍을 확립했다. 만암 스님은 흉년에 끼니를 굶는 백성들의 참상을 가장 마음 아파 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는 정도면 늘 백양사 안에서 도와주려고 애썼다. 개울에 보를 쌓게 하고 양식을 품삯으로 준 것도, 산에 나무 심는 일을 시키고 품삯을 양식으로 준 것도 모두 굶고 있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해의 흉년이 아니라 2년, 3년 계속된 흉년은 만암 스님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고 속 곡식 자갈과 뭐가달라 흉년이 거듭된 어느 해 보릿고개를 당해서 만암 스님은 소달구지에 자갈을 담은 가마니를 몇 개 싣고 어떤 부잣집을 찾아갔다. 그 부잣집 곡식창고 안에는 해묵은 벼가 가득 쌓여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