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이 없음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 특이점이 되어 세계의 특이성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 그것이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추구하는 삶이고, 유(有)를 아는 이가 사는 방식이다. 그것을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隨處作主)는 임제의 말(‘임제록’, 장경각 60)처럼, ‘주인’으로, 혹은 ‘주인공’으로 세상을 사는 방식이라고 해도 좋을까? 이때 ‘주인’이란 어떤 이일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의지대로 세계를 만들어가는 자? 자신의 의지대로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자? 혹은 사물이나 집을 소유하고 그
존재의미는 어느 한 사람이 부여하는 게 아니라, 관련된 존재자들의 관계들이 서로 엮이고 중첩되며 만들어진다. 예컨대 ‘폭풍의 언덕’ 인근의 마을에서, 이전에 사라졌던 히스클리프가 나타났을 때(그 세계 안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 세계는 이전과 아주 다른 세계로 바뀌어버렸다. 이때 히스클리프의 존재의미는 그를 사랑하던 캐서린에게, 캐서린의 남편인 에드거에게 아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캐서린이 에드거와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는 한,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조차 단지 되돌아온 사랑의 대상일 수만은 없다. 에드거와 반발하면서 캐서린을 상
불법이 공(空)을 설함은 잘 알려진 일이다. 불교 문헌에서 빈번히 만나게 되는 ‘무(無)’라는 말조차 실은 언제나 공을 뜻한다. 그저 ‘없음’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떠난 중도”의 무를. ‘없음’을 뜻하는 말뿐 아니라, 무언가를 부정하는 말들도 많은 경우 그러하다. 가령 ‘금강경’의 유명한 문장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음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말에서 ‘상 없음’으로 번역된 ‘비상(非相, 상 아님)’이 그러하다. 여기서 상(相)을 부정하는 말은 단지 상이 없는 텅 빈 공허를 뜻하는 게 아니라
풍혈이 대중설법을 했다.중생과 부처의 세계가 다르지 않지만분노로 만든 세계가 부처세계는 아냐그때마다 손가락 세워 그곳서 나와야“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이를 두고 원오는 묻는다. “말해보라, 한 티끌을 세워야 옳은지, 세우지 않아야 옳은지를.” ‘나라(家國)’라는 말은 앞서 했던 것처럼 ‘세상’이나 ‘세계’라고 해석해도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흥성하다’나 ‘멸망한다’는 말이 어색하게 된다. 하여 여기에선 ‘국가’라고 해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이에 대해 원오는 이렇게 말한다
‘폭풍의 언덕’이 보여주는 세계, 손가락을 들 때마다 일어나는 다른 세계들은 어쩌면 고작 두 집을 둘러싸고 있는 아주 작은 세계일뿐이라고, ‘세계’라는 말에 값하긴 너무 작고 국지적인 세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손가락을 따라 일어나는 세계는 그 세운 손가락 인근에 만들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손가락을 세울 때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까?첫째, 각자가 사는 세계란 형식적으로 그 범위를 따지자면 나라 전체, 지구 전체, 아니 우주 전체로 확대되겠지만, 대개는 TV나 신문 아니면 내가 알지도 못
구지(俱胝)는 손가락 하나로 남은 선사다. 어느 암자에 머물고 있을 때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들어와 삿갓도 벗지 않고 선상(禪床)을 돌며 “말할 수 있으면 벗겠소”를 반복했지만 말 한 마디 하지 못한다. 이에 분심이 일어 선지식을 참방하며 행각하겠다 결심하지만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나 그럴 것 없다며 떠나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다음날 천룡(天龍)이 암자를 찾아오자 그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며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자 천룡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여주고, 이를 본 구지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후 누가
어떤 스님이 고덕 귀종(古德 歸宗)에게 물었다. 천지와 만물의 보편성에만 머물면눈앞에 핀 꽃을 제대로 볼 수 없어 특정한 조건 속 개체의 특이성이만법이 돌아가야 할 바로 그 하나“깊은 산 가파른 벼랑처럼 전혀 사람의 자취가 없는 곳에도 불법이 있습니까?”“있지!”“어떤 것이 깊은 산속의 불법입니까?”“돌멩이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지.”깊은 산 속의 불법, 그것은 사람이 있든 없든 작용할 불법의 요체를 묻는 것이다. 돌멩이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다는 말은 어디서나 적용될, 어쩌면 하나마나한 말이다.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형이상학’이란 말은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모태가 된 중국의 도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가령 정명도와 정이천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그것을 형성하는 질료인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것이고, 그 모든 사물이나 기의 형상을 이루는 것, 원리나 이치에 해당되는 리(理)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이라고 대비한다. 이 말대로라면 ‘형이상학’이란 사물이나 질료를 규정하는 형상이나 원리에 대한 학문이란 뜻이니 서양의 메타피직스와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공이란 연기적 조건에 기대 있기에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중도연기적 조건은 만법
어느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현상·사물 하나로 설명하려는 시도서양에선 형이상학이라 말하지만하나의 원리 찾아내려는 노력은신학과 철학·과학이 다르지 않아“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내가 청주에 있을 때 무명적삼을 한 벌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근이더군.”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이를 묻기 전에, 저 스님이 던진 질문에 대해 자세히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양과 서양, 불가와 도가, 불학과 도학 등이 만나고 흩어지는 중요한 교차로요 분기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멋진 질문이기 때문이다.선이 모든
유머는 대개 웃음을 동반하고 웃음을 긍정한다. 그렇지만 유머는 단지 농담이 아니며, 유머감각이란 남들을 웃기는 말재간을 뜻하지 않는다. 유머란 차라리 웃음을 위해 무언가를 망가뜨리거나 웃음 때문에 무언가가 망가짐을 견디는 능력이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든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유연성을 갖는 능력이고, 주어진 상황을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능력이다. 그렇기에 유머감각을 가진 이는 웃음을 통해 주어진 상황에서 몸을 빼 여백과 거리를 만들어내고, 그럼으로써 몸을 돌려 상황을 돌아보며 치고 들어가 사태를 바꾸어버릴 수 있다. 반대로 주어진 것에
이른바 ‘원시사회’에 대한 관찰 속에서 인류학자들은 ‘농담관계’와 ‘회피관계’라는 특이한 두 가지 관계를 찾아낸 바 있다. 그러나 농담관계란 단지 ‘농담을 주고받는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예컨대 멜라네시아에서는 젊은 남자의 경우 길을 가다 사촌을 만나면 그에게 모욕을 주는 관습이 있다. 그다음에는 모욕을 당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다시 비슷하게 모욕을 주게 된다. 이는 아마존 지역 같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처럼 농담관계란 어느 한 쪽이 상대방에게 조롱하거나 괴롭히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고, 다음에는 상대방이 그에게 그렇게 하도
단하 천연(丹霞天然)은 지존의 수준에 이른 유머 감각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듣자마자 뇌리에 박혀 깊이 새겨진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는 유명한 공안이 그렇다. 단하가 혜림사란 절에 머문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밤 혹독하게 추웠다고 한다. 하여 땔감을 찾았지만 밤에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땔감을 찾던 단하는 급기야 불전에 들어가 목불을 하나 들고 나와 그것을 빠개 불을 땠다. 그런데 절의 살림을 맡아보던 원주(院主)가 이 얘기를 듣고 쫓아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목불을 태워 사리 얻겠다는 단하무위의 가르침을 웃음으로 승화역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확고한 것을 추구하고 명확한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던 젊은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이 쓴 책 ‘논리 철학 논고’의 마지막 문장이다. 불이법문에 대한 물음에 침묵으로 답했던 유마의 길을 여기서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유마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은지극한 도 가르치는 선사 해야 할 일침묵이든 할·방이든 반드시 말해야반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지극한 도란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은 단지 불법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알다시피 노자(老子)가 쓴 ‘도덕경’의 유명한 첫 문장이 바로 그렇다. “도를 도라 하면, 그 도는 제대로 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서양의 신학에서도 이런 입장을 표명한 이들이 있다. 신은 무한자인데, 말은 어떤 것도 유한한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말하게 되니, 그 말은 모두 신의 진상을 제대로 말할 수 없다. 말도 어떤 표현도 그 자체가 신처럼 무한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무한자인 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
‘벽암록’에서 원오 불과(圓悟佛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석가모니불이 세상에 출현하여 49년간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벽암록’, 상, 250). 잘 알려진 것처럼 석가모니는 자신이 처음 깨달음을 얻은 직후, 그 위없는 깨달음이 너무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에서 남들에게 말하길 망설이는 장면을 ‘아함경’은 전하고 있다.그렇긴 하지만 제석천의 설득으로 그 깨달음을 전하기로 결심했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오지 않았던가? ‘숫타니파타’, ‘아함경’에서부터 수많은 경전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개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은 개가 절에서 설법을 듣고 득도하여 부처가 되는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불성이나 부처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 고정된 모습(相)에 지나지 않는다. 개의 불성은 차라리 낯선 이를 보고 사납게 짖어대다가도 주인이 그에게 하는 언행을 보고 ‘아, 아니군!’ 하며 얼른 짖는 소리를 낮추거나 짖기를 멈추는 능력이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향해 그저 짖을 줄만 안다면, 그 개는 불성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취해서 쉼 없이 마셔 대는 것처럼업식 성품 따르면 불성 작용 안해먹을 때 먹고 쉴 때 온전히 쉬어야기계라면 어떨
불성(佛性)이란 ‘열반경’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부처의 성품, 즉 부처가 될 능력을 뜻한다.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대반열반경’인데, 이는 사람의 본성이 정해져 있다면서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일을 하라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반대하여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음을 설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면서도 일천제(一闡提)는 제외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일천제란 세속적 욕망이 강한 자로서 선근을 단절하여 불교를 믿지 않고 심지어 방해하는 자를 뜻한다. 이런 불성 개념의 배경
유정(有情), 정식(情識)이 있는 것을 뜻한다. 정식이란 정(情)과 식(識)이니, 감정이나 지각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유정이란 감정이나 지각능력을 갖고 있는 것, 대개는 생명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중생이라 번역되기도 했던 사트바의 번역어다. 반대로 정식이 없는 것을 뜻하는 무정(無情)이란 생명 없음을 뜻하는 말일 텐데, 산천초목을 그 예로 드는 것을 보면 생명/비생명과 유정/무정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인지는 약간 의아스럽다. 아마도 풀이나 나무에겐 정식이 없다고 알던 당시의 통념 속에서, 초목은 생명이 있지만 무정물
매일매일의 생활, 하나하나의 언행을 산출하는 물결들이 바로 마음이다. ‘배고프면’, 혹은 ‘때가 되면’ 밥을 먹고자 일어나는 마음,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는 마음이다. 부서진 신체의 표면에 떠오르는 마음은 그 부서진 신체를 조건으로 하는 마음이고, 배고픈 신체 표면에 떠오르는 마음은 배고픈 신체를 조건으로 하는 마음이다. 표면적이기에 조건이 변함에 따라 끝없이 변하는 잔물결 같은 마음들이다. 그런 물결 같은 마음 하나하나에서 애증에 물들지 않는 것, 얻으려 치달리지 않고 밀쳐내려 인상 쓰지 않는 것, 그것이 마조가
프랑스의 작가 조에 부스케는 1차 대전에 참전했다 포탄을 맞아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대개는 그 사고를 감당하기 힘들어 그나마 남은 목숨마저 끊어버리고자 하게 된다. “스무살에, 나는 포탄을 맞았다. 내 몸은 삶에서 떨어져나갔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는 우선은 내 몸을 파괴하려 했다.”(부스케, ‘달몰이’, 11쪽)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실은 삶에 대한 애착에서 나온 것이다.그러니 삶의 애착과 죽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얼마나 번민이 지대했을 것인가!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되었는데 하는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