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회통한 근대 스승 1969년 4월 17일 입적 설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한 대표적인 스님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으면서도 『선문촬요좭에 토를 달고 『벽암록(碧巖錄)좭, 『무문관(無門關)좭등 교학 강의 있어서도 당대 제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설봉 스님은 1890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출가하기 이전부터 이미 스님은 『논어좭와 『맹자좭등 유학(儒學) 서적들을 두루 섭렵했다. 25세 되던 해 안변 석왕사에서 성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설봉 스님은 이때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법을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뿐 아니라
1980년 4월 5일 입적 김동화 박사는 비록 일제강점기 대동화 전쟁을 위한 징용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는 등의 글을 남겨 친일 행각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초지일관 불교학을 연구해 근현대 한국불교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교학의 밑바탕이 없던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김동화 박사는 『불교학 개론』, 『불교교리발달사』등과 같은 기초교리서를 발간해 교학의 체계를 마련하는가하면 강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해 한국불교학의 토대를 다졌기 때문이다. 김동화 박사는 1902년 경북상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 상주 동해사로 출가해 이듬해 상주 남장사에서 사미계를 수지 했다. 이후 1919년 상주 남명학원에서 사집과를 수료하고 23년 김룡사 지방학교를 졸업한 김동화 박사는 출가 이후 자신
35세에 개안…혜월 스님이 인가 재가불자 위한 「경책시편」남겨 1946년 4월 1일 입적 운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오직 깨달음을 위해 초지일관 정진했던 대표적인 선사로 대변된다. 일제 강점기 격변의 시기를 살았지만 흔들림 없이 오로지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을 벗어나지 않으며 구도를 위한 정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신이 구축한 공간 속에서 궁극의 경계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오갔던 전형적인 선승이었다. 188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 때 일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5세 되던 해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당대 대표적인 강백이었던 회응 스님으로부터 교법을
89년 1월 8일 입적 비구니 스님들에게 수행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수행을 통해 몸소 실천해 보인 광호 스님(1915∼1989)은 비구니계의 큰 별로 평가받는다. 일생을 혹독한 수행과 무주상 보시를 실천하며 용맹정진에 힘써온 까닭이다. 스님은 1915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1923년, 우연히 어머니를 따라 경상북도 운문사를 방문했을 당시 어느 행자승의 삭발식을 유심히 지켜본 이후 스님은 출가하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비구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이가 아홉 살이다. 17세가 되던 1931년, 비구니 혜원(慧圓) 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21세 때 통도사서 해담(海曇) 율사를 계사로 대소승계를 받은 스님은 23세에 영축총림 통도사 윤고경(尹古鏡) 대강백 회하에
1967년 1월10일 입적 동국대 초대학장 포광(包光) 김영수 거사는 근·현대 한국불교학의 초석을 세운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한국불교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한국불교사를 종합 정리한 『한국불교사상논고』라는 유작을 남겼는가하면 ‘화엄사상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해 한국불교학계에 화엄학 연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1894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2세가 되던 해 1895년 경남 함양 영원사에서 환명 정극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포광은 여러 스님들로부터 체계적으로 불교학을 배우게 된다.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서장』,『능엄경』,『기신론』, 『화엄경현담』등 전통강원 교육을 모두 수강한 포광은 1906년 그의 나이 26세에 영원사 강주(講主) 소임을 맡으면서 학승으로서
1975년 1월 13일 입적 전강(田岡) 영신 스님은 20대 초반에 개안(開眼)을 이루고 30대에 조실의 지위에 오른 현대 한국 선종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특히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스님 등 당대 최고의 선지식을 찾아 직접 법거량을 통해 인가를 받는가 하면 육조 혜능과 마조, 임제의 사상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경허와 만공 스님 이후 선종의 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전강 스님은 189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나이 16세 되던 해인 1913년 유기 행상을 하다 만난 한 스님과의 인연에 의해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출가 이후 피나는 수행과 정진을 계속하던 스님은 도반이었던 사미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삶의 허망함’을 깨닫고 이 때부터 만공 스님으로
1966년 2월 7일 입적 화산 수옥 스님은 금룡(金龍)·혜옥(慧玉)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비구니 3대 강백으로 후대 비구니들의 지표로 추앙받는 스님이다. 오늘날 비구니를 대표하는 니승이라면 대부분이 그의 제자라 할 정도로 비구니계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비구니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해 평생을 후학 양성과 주력해 온 수옥 스님은 16세에 출가해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에 몸을 담았다. 스님은 그 해에 법희(法喜)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으며 다음 해에 비구 청월(淸月)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견성암에서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은 19세가 되던 해 전문강원이 있는 해인사를 찾아 고경화상(古鏡和尙) 밑에서 2년 동안 사집과를 수료했다. 28세 봄이 되던 해, 스님은 서
1940년 2월 24일 입적 용성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격동기 속에서 불교사상가이자 우국지사로 명성을 날린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이다. 스님은 대각 운동을 펼쳐 침체된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작업에 주력함으로써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앞장섰다. 또 3·1운동 당시 만해 스님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에 불교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 강점기 속에서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도 최일선에 섰던 인물이다. 스님은 열여섯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수도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다시 해인사에서 출가를 한다. 해인사에서 승려로서 기본 소양을 배운 용성 스님은 이후 의령 고운사를 찾아 수월 스
1999년 2월 27일 입적 광덕 스님은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용성, 동산, 소천 스님의 뒤를 이어 부처님의 대각 사상을 현실적으로 대중화 시켜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철저한 지계를 바탕으로 평생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으며 반야바라밀 실천운동을 전개해 생활불교 운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2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한국대학 재학시절 한관섭 선생을 만나면서 일생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한관섭 선생의 소개를 받아 금정산 범어사 선방에서 처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처사의 신분으로 범어사 선방에서 정진을 하던 광덕 스님은 1952년 당대 최고의
1948년 2월 29일 입적 석전 박한영 스님은 선암사 금봉 스님, 화엄사 진응 스님과 함께 태고 보우 국사의 선맥을 잇는 태고 선종의 3대 강백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삼장 강설을 주로 하면서 경사사집과 노장학설을 모두 섭렵하고 일제 강점기 만해 스님과 함께 불교 유신운동을 펼쳤는가 하면 올바르게 시대를 이끌 수 있는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근현대 대표적인 선지식이었다. 1870년 8월 전북 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석전 스님은 17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가 전주 위봉사 금산 스님에게 들은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법문을 전해주자 크게 발심해 출가를 결심했다. 19세 되던 해 금산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정호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이후 백양사 운문암에서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64년 3월 14일 사망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범어사에 모인 1만여 불자들은 참고 참았던 울분을 이 한마디로 토해냈다. 그리고 이들의 행렬 선두에 그가 있었다. 억눌려 있던 그의 가슴은 결의에 찬 용기로 뜨겁게 차올랐다. 일평생을 불교와 나라, 후학양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김법린 선생은 승려일 때는 선지식, 이후 학자로는 동서양의 깊은 천리를 꿰뚫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했다. 양휘허(揚揮虛)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한 이래 1917년 범어사 강원에서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하고, 20세가 되던 기미년에 불교계 만세운동을 지도하다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경으로 도피했다.
1951년 3월 22일 입적 한암 스님은 수행을 ‘소치는 구도행’이라고 비유하며 ‘돈오점수’를 설파했던 근대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일명 ‘오대산 도인’, 오대산의 학(鶴)이라 불린 한암 스님은 27년 간 일체의 외부출입을 금하며 오로지 수행에 매진해 밝은 선지(禪旨)와 높은 학문으로 수많은 납자들에게 존경받아온 시대의 선지식이다.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한암 스님은 천성이 영특하고 총기가 빼어나 한번 의문이 나면 답을 구할 때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 경허 문하서 수행 정진 스님은 22세가 되던 해 소시적부터 궁금했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수행이라는 결론을 내고 행름(行凜) 노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수도를 시작한 한암 스님
1973년 3월 27일 입적 부처님의 제자 주리반특가는 머리가 둔한 데다가 배운 것도 없어 매우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수행정진에 임해 마침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평생을 가야산 총림에서 수행정진에 임했던 지월 스님은 해인사의 ‘주리반특가’로 불린 인물이었다. 서슬 퍼런 선기나 출중한 면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마침내 선지식의 경지를 이룸으로써 모든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품과 생애가 주리반특가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1911년 2월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지월 스님은 16세에 출가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지암 이종욱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상원사 한암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