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우리 후배스님들을 위해서 20년을 결사하자”는 어른스님의 한마디에 30년도 넘은 기억을 꺼내들었다. 어떤 법문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온 말씀이었다. 나는 비구니계를 받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겨울의 초입 즈음에 산사의 새벽 기온은 제법 추웠다. 그 차가웠던 날씨보다 더 추웠던 건 파란색 방수포를 대걸레로 썩썩 밀어내고 비구니계를 수계한 기억이다. 좀 더 형식을 갖추고 여법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한국비구니계를 이끌어 갈 출가자 탄생을 존중하고 축하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의례적인 행사를 치르듯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는 신 냉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나토의 민주주의 동맹과 옛 공산세력인 중국·러시아라는 두 대척점이 형성되고 있다. 새 정부는 한미동맹이라는 군사적 힘에 의지하며 전자의 세력에 합류하고 있다. 세계는 군비를 확충하며 끝없는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강대국들 이해관계에 의해 흔들리는 한반도는 이럴수록 중도와 중립의 외교정책으로 오히려 힘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주위에서는 세계 최고의 화약고가 된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한다. 선에 대한 인간
JTBC가 지난 6월8일 새 드라마 ‘인사이더’를 선보이면서 사찰 법당에서 스님과 여러 도박꾼들이 거액 판돈을 걸고 도박하는 장면을 길게 방영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TV방송 드라마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십수 년 전부터는 ‘겨울연가’ ‘대장금’ 등의 드라마가 국내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방영되면서 한류 열풍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겨울연가 촬영지에는 일본과 동남아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라오스·캄보디아 오지에서 TV로 이 드라마를 즐기는 이들을 만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2017년 이란 여행 때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우리
불교의 명상수행법을 현대적인 방법론과 접목한 많은 수행법, ‘현대적 마음챙김 수행’이라 부르는 수행법들이 알려지고 있다. 서구에도 큰 열풍이 불 정도로 그 수행법은 현대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하는 방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불교를 널리 알리고 보급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한 수행법들이 지닐 수 있는 위험성과 한계에 대한 비판 또한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졌다. 로널드 퍼서(Ronald Purser)가 현대적 마음챙김 명상이 ‘맥도날드식 마음챙김(McMindful-ness)’이며 신자본주의를 고착화하는 것이라 비판한 것이
거실 탁자 위에 낯선 봉투 두 개가 놓여 있다. 발송인은 동부경찰서이고 수취인은 내 이름이다. 놀라서 뜯어보니 제목이 길었다. ‘위반 사실 통지 및 과태료 부과 사전 통지서’. 일주일 사이에 두 번이나 같은 장소에서 교통 법규를 위반했다는 사실을 한꺼번에 통보한 일종의 내용증명서였다.서너 달 사이에 벌써 대여섯 번째다. 위반 장소와 시간이 무미한 건조체로 적혀 있고, 아래 칸에는 벌금 액수가 볼썽사납게 박혀 있었다. 원인 제공의 현장은 바로 그때 그 자리였다. 남산 2호 터널을 나오자마자 녹사평역 방향으로 이어지는 지하차도 입구까지
코로나에 걸릴까봐 오는 것도 가는 것도 꺼려지던 시절을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났다. 지나는 길에 사찰에 들려 예불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특별함으로 오는 여행이었다. 무작정 들렸던 주지스님의 방에 ‘休(휴), 억지로라도 쉬어가소’라는 글귀가 마음에 훅하니 들어왔다. 진심을 다해 객을 맞아주었던 스님의 환대에 오래 전 소임 시절 객들을 귀찮아하던 속 좁은 마음을 반성했다. 옛 기억 속에 쥐꼬리 같기도, 뱀이 똬리를 튼 것 같기도 했던 미시령 옛길을 새벽에 트래킹 했다. 미시령에서 바라본 울산바위가 여명을 받아 깨어나고 있었다. 이
정의(正義)는 사회와 인간, 인간과 인간 간에 발생한 다양한 문제를 어떻게 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오랜 농업이나 유목 생활에서 점차 도시화와 국가체제를 만들어 오는 과정에서 정의의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대두되었다. 관계에서 발생한 도덕이 윤리로 승격되고, 윤리가 법으로 강화되면서 삶은 더욱 더 자율과 타율이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제는 사소한 시빗거리도 법에 의지하는 시대가 되었다.새 정부는 이러한 법을 다루던 사람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정부의 요직에 검
얼마 전 공직을 퇴직하고 귀향한 옛 동료를 만나러 경북 영주에 다녀왔다. 그와 함께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돌아본 뒤, 불현 듯 풍기읍내에 있는 작은 절 영전사 주지스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 왜 갑자기 이 생각이 났을까.1994년 이른바 개혁불사 이후 조계종 포교원이 의욕을 갖고 1996년을 ‘불교청소년의 해’로 선언한 뒤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실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파라미타청소년협회 출범이었다. 많은 분들이 전폭 지원해준 덕분에 파라미타는 빠르게 성장‧발전하였다. ‘캠프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1996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공약(公約)들이 공약(空約)으로 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그것을 사납게 비난하는 여론이 일고, 또 안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는 변명이 이어지는 진부한 정치적 행태가 일어나고 있다. 정치인의 말, 그것은 어느 누구의 말보다도 무거워야 할 것이다. 여러 사람의 앞에 나서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겠다는 정치인의 말이 가벼우면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어떤 말보다 믿지 못할 것이 정치인의 말이라는 것이 우리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행태들의 연장선에서 대통
고인(故人)이 된 어느 대통령이 ‘갱제’를 살리기 위해 ‘강간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시중의 놀림감이 된 적이 있다. 복모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대통령이 ‘경제’를 ‘갱제’로 ‘관광’을 ‘강간’으로 발음하는 바람에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몇 가지 발음은 여전히 잘 안 된다. ‘ㄱ’과 ‘ㄲ’, ‘ㄷ’과 ‘ㄸ’, ‘ㅓ’ 와 ‘ㅡ’, ‘ㅅ’과 ‘ㅆ’ 등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추장’은 ‘꼬추장’이고 먹는 ‘밤’은 ‘빰’이며, ‘성공’은 언제나 ‘승공’이고 ‘쌀’은 죽으나 사
20년 전 나는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어떤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지구환경’이라는 거대한 일은 당장 나의 일이라기보다 누군가가 대신하는 사회운동쯤으로 여겼다. 다급하지 않았고 취사선택을 해도 되는 일 중에 하나였다. 지율 스님이 안동댐 지류인 내성천에서 환경운동을 할 때였다. 솔직히 나는 환경운동을 하는 스님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냥 있기도 염치가 없어 방문한 적이 있다. 강가에서 사계절을 비닐 움막 하나로 추위와 더위, 해충,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협박 속에서도 굳건한 스님의 모습에 참 미안하기도 했고, 꼭 저
4월은 만물이 겨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날이다. 개나리, 진달래에 이어 목련과 벚꽃이 화려함을 더하고, 메말랐던 가지에선 연초록 잎이 앞다퉈 솟아난다. 신기할 뿐이다. 그러나 딱 100년 전 토머스 엘리엇은 그 유명한 ‘황무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라고 읊었다. 인류의 지옥문이 열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문명 파탄의 원인을 욕망에서 찾는다. 자본, 과학, 국가가 한패가 되어 지구를 황폐화하고, 절망의 비가 대지를 적시던 때다. 결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