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류암은 백양사에서 산길로 2km가량 떨어진 산내 암자로 만암 스님은 이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사진은 청류암 전경.[백양사 제공]](https://cdn.beopbo.com/news/photo/202409/324871_121968_337.jpg)
만암 스님은 운문암에서 강의를 시작해 다시 청류암(淸流庵)에서 강사 활동을 이어갔다. 청류암은 백양사에서 산길로 2km가량 떨어진 산내 암자로 고려 각진국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소요태능 스님 등 고승들이 수행했던 도량으로, 청정한 행과 마음으로 선정(禪定)에 든다고 해서 청류암이라 이름 붙여졌다. 조선 말기 백양사가 자연재해로 막대한 피해를 본 것과는 달리 청류암은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에는 만암 스님의 문중 어른들인 연담, 양악, 침송, 허주, 한양 스님의 진영이 봉안돼 있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도량이어서 더 각별했다.
청류암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마지막 피신처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압정이 시발점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국내외 정치 판도를 바꾸었다. 당시 동학과 불교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동학 교주 최제우의 제자로 남접(南接)을 이끌었던 서장옥(?~1900)은 30년간 불문(佛門)에 있다가 입교한 인물이다. 법명이 ‘일해(一海)’였던 그는 김개남, 전봉준, 손화중 등의 스승으로, 충청·전라 지역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서장옥은 불교의식과 사상이 동학 깊숙이 자리 잡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그의 활동은 불교계가 동학에 호의를 갖도록 했다. 백양사 수연(水演), 불갑사 인원(仁原), 선운사 우엽(愚葉) 등 스님이 주요 동학 집회에 참여했던 것으로 전한다. 당시 많은 스님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했다. 이들 스님은 백성을 위로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며, 동학 농민군의 항쟁을 지지했다. 폭정과 외세의 침탈로 벼랑 끝에 내몰린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백성을 살리기 위해 스님들이 전장에 뛰어든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동학 지도자들에게도 불교는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다. 1892년 손화중이 선운사 도솔암에서 비기를 꺼내기 위해 스님들 도움을 받는가 하면, 숱한 동학 지도자가 절에서 49일 기도로 깨달음을 얻고 포덕 활동과 교단을 체계화했다. 불교는 동학 지도자들에게 정신적 깨달음을 제공하며, 그들의 활동에 영감을 주었다. 불교의 사상적 깊이와 함께 의식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들불처럼 확산하던 동학농민운동이 강한 탄압을 받았을 때 스님들도 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만암 스님 은사인 취운 스님의 사형으로 백양사 주지를 지낸 응운우능(應雲雨能, 1854~1896) 스님도 이때 희생됐다.
만암 스님에게는 사숙(師叔)이었던 그는 뛰어난 강백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호탕했다. 응운 스님은 ‘동사열전’(1894)에 “영구산·조계산·지리산의 강원(講院) 강주들을 찾아다니면서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도 공부하는 데 몰입했다. 정토사(백양사)에 돌아와 지혜의 향을 피우고 강당에 앉아서 경전을 들고 의문 가는 부분을 묻기 위해 오고 가는 학인들을 맞아 강론을 펼쳤다. 사방에 걸림이 없고 바람을 관찰하는 무리도 물이 바다로 돌아가고 구름이 모여들 듯 밀려들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님의 학문적 깊이와 넓은 견문이 많은 학인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대강백 경담 스님이 운문암 중건 불사에 응운 스님을 화주로 추천했을 때였다. 스님은 여러 고을을 돌며 쌀을 탁발해 운문암을 일으키는 데에 앞장섰다. 그런데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자 정의감이 강했던 응운 스님이 봉기에 뛰어들었다. 오래지 않아 지방 교도들을 이끄는 접주(接主)를 맡아 크게 활약했다.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이 조선 정부와 일본군에 진압당하면서 응운 스님은 곧바로 붙잡혀 갔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백양사 스님들은 장성 관아로 몰려갔다.이대로라면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백양사 스님들은 응운 스님을 석방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응운 스님은 완산(전주) 감옥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온갖 수모와 고초를 받아들여야 했고, 1896년 6월 옥사했다. 스님의 나이 42세였다. 그 죽음은 동학과 불교의 깊은 연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불교계가 백성과 고통을 나누고자 했던 결의도 잘 보여준다.
응운 스님이 옥에 갇혔을 때 그의 곁에는 상좌 기룡 스님이 있었다. 관에서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기룡 스님은 음식을 구걸해 어떻게든 은사를 살리려 애썼다. 응운 스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시신을 거두어 돌아온 것도 열여섯 살의 기룡 스님이었다. 백양사 대중들은 응운 스님의 다비식을 치러주었다.
만암 스님은 이 사건을 잊지 않았다. 끝끝내 변화를 거부하다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능한 조정,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가슴 밑바닥에 새겼다. 만암 스님이 인재 양성에 진력하고, 백양사를 대대적으로 개혁·중창한 것, 해방 후 일제 청산 운동을 주도했던 것도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응운 스님의 죽음은 만암 스님을 더욱 단호하게 전통과 민족의 길로 이끌었다.
일제강점기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불교계는 그 역할과 존재 이유를 재정립해야 했다. 만암 스님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불교가 단순히 산중의 종교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에 맞서야 한다는 의식을 키워갔다. 이는 동학의 저항 정신과도 맞닿아 있었다.
만암 스님은 전통적인 교육 방식을 중시했다. 그러나 고루하지는 않았다. 옛것에 근간을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았다.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도 않았다. 이 같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교육철학은 생애 내내 일관됐다. 출가자들에게 전통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자긍심을 강조했다. 동시에 이를 현시대에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를 지도했다. 만암 스님에게 있어 교육은 단순한 학문적 전달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스님은 학인들이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그 뿌리에서 새로운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만암 스님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청류암에서 강의를 지속했다. 망국으로 치닫던 시대에 산중이라고 조용할 리 없었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오적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불교계는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에 참여하며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스님들은 국가의 위기에 승병(僧兵)을 조직해 왔던 전통을 이어받아, 을사늑약 이후에도 스님들로 구성된 의병대를 조직했다. 여러 사찰의 스님들이 의병 활동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저항했다. 또 의병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불교계의 활발한 저항은 일제의 탄압에도 이어졌으며, 스님들은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했다.
특히 용성·만해·초월 스님을 비롯한 많은 스님이 일제강점기에 항일 운동을 선도했다. 이러한 활동은 불교계가 단순히 종교적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민족적 저항 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만암 스님은 청류암에 더 머물기 어렵게 되자 다시 백련암, 천진암을 전전하며 학인들에게 경전을 강의했다. 스님은 출가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전통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자긍심이라고 보았다. 이제부터라도 각계에서 인재들을 양성한다면 언젠가는 일본의 침략을 극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본이 아니더라도 다른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해 영영 벗어날 길이 없을 게 분명했다.
만암 스님의 이름은 백암산을 넘어 전국 사찰로 퍼져나갔다. 1907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서 강의를 요청해 왔다. 스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해인사는 고려대장경이 봉안된 법보종찰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가람이었다. 가르침보다 더 혹독한 가르쳐짐이 없다는 말처럼, 가르침을 통해 배우고 견문을 넓히는 기회가 되리라 여겼을 듯싶다. 스님이 행장을 꾸려 해인사로 향하자 청류암 학인 10여 명도 따라나섰다. 당시 강원은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로 나뉘어 강의가 진행됐으며, 이 과정을 모두 이수하려면 10년에서 11년이 걸렸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수능엄경’ ‘대승기신론’ ‘금강반야경’ ‘원각경’을 배우는 사교과와 ‘화엄경’ ‘선문염송’ ‘경덕전등록’ 등을 배우는 대교과를 맡아 2년간 집중적으로 강의했다. 당시 스님의 강의를 듣는 학인이 50~60명에 이르렀고, 전국 강원에서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만암 스님은 이제 ‘전국구 강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편 훗날 만암 스님이 백양사 주지로 취임한 뒤 기룡 스님에게 원주의 소임을 맡겼다. 기룡 스님이 아내를 얻어 취처승이 된 뒤에도 행정 일을 계속하도록 했다. 믿음직한 문중 사제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스승을 등지지 않은 의리와 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응운 스님이 입적한 뒤 44년이 지난 1940년 만암 스님은 뒤늦게나마 기룡 스님을 도와 응운 스님의 비를 세웠다. 비문을 쓴 석전영호 스님은 응운 스님의 죽음을 기리며 참수의 칼날을 봄바람처럼 여겼던 선종 제2조 혜가(신광) 선사에 비견했다. 만암 스님도 응운 스님 진영에 직접 글을 썼다.
‘花能感應 氣壓風雲 彷彿眞相 嵬然出群’
(꽃까지 능히 감응하고/ 기운은 풍운을 눌렀네/ 참모습 꼭 그대로 닮았으니/ 무리에서 우뚝 뛰어났도다)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만암 스님의 영찬시 번역은 김호성 동국대 교수님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 교수님은 첫 구절의 ‘화(花)’가 ‘화(化)’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럴 경우 첫 구절은 ‘교화는 능히 감응을 부르고/ 기운은 풍운을 눌렀네’로 해석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1745호 / 2024년 9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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