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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진과 오도

보배 칼을 마음대로 쓰고 밝은 거울은 앞뒤가 없도다

1918년 무렵 학명 선사 권유로 물외암서 정진하다 깨달음
어디에도 걸림 없고 분별 벗어난 대자유 체득했음을 노래
세상에 굴림 당하지 않고 세상 굴릴 수 있는 내면 힘 갖춰

만암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물외암은 백양사에서 운문암으로 이르는 계곡 중턱에 있다. 1351년 각진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승들이 정진했던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풍우에 쇠락하다가 1980년 재건됐으나 1988년 봄 건물이 붕괴된 후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물외암 터. [출처=‘장성 백양사 물외암지’]
만암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물외암은 백양사에서 운문암으로 이르는 계곡 중턱에 있다. 1351년 각진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승들이 정진했던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풍우에 쇠락하다가 1980년 재건됐으나 1988년 봄 건물이 붕괴된 후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물외암 터. [출처=‘장성 백양사 물외암지’]

만암 스님은 경전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강백이었다. 허나 태고보우 스님의 18대 법손임을 항시 가슴에 새겼다. 이는 수행자로서의 본분사(本分事)를 잊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권상로가 쓴 만암 스님 비문에는 ‘신축년(1901) 여름부터 벽면안거(壁面安居)하여 선지(禪旨)를 참구한 지 또 10년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가원이 찬술한 비문에도 ‘신묘년(1891)에서 경술년(1910)까지 책을 짊어지고 제방(諸方)을 유력하면서 교의를 연구했고, 이어서 면벽관비(面壁觀鼻)하면서 선의 오지(奧旨)를 참구한 지가 거의 20년이 됐다’고 적고 있다.

옛 선사들은 ‘어디서건 화두를 놓으면 중생이요, 화두를 잡으면 열반의 길’이라 했다. 이 같은 비문의 기록들은 만암 스님이 경론을 펼치면서도 견성의 문고리를 틀어쥐기 위해 줄곧 화두를 놓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럼 만암 스님이 언제 어디서 깨달음을 이룬 것일까. ‘만암문집’에는 ‘물외암에서의 오도송(於物外庵中悟道頌)’이 소개돼 있다. 물외암은 고려시대 창건된 백양사의 산내 암자로 만암 스님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증득했음을 알 수 있다.

寶刀飜遊刃
明鏡無前後
兩般一樣風
吹到無根樹

보배 칼을 마음대로 쓰고
밝은 거울은 앞뒤가 없도다
두 가지가 한 모양인 바람이
뿌리 없는 나무에 불어 닿는다

吾將無刃劍
割來露地牛
屠蘇兼供養
何處有恩讐

내가 날 없는 칼을 잡아
노지의 흰 소를 잡아서
도소주와 함께 공양을 올리니
어느 곳에 은혜와 원수가 있을고

만암 스님은 게송에서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보배 칼’ ‘밝은 거울’ ‘두 가지가 한 모양’ ‘뿌리 없는 나무’ 등에 비유했다. 이를 통해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자신과 대상을 가르는 온갖 분별에서 벗어났음을, 그리고 철저한 무아의 경지를 체득했음을 노래했다. 뒤의 게송에서도 ‘날이 없는 칼’로 언어가 끊긴 경계를, ‘노지의 흰 소’로 순수무잡한 불성의 자리를, 설날 먹으면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장수한다는 ‘도소주(屠蘇酒)’를 들어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은혜와 원수’를 들어 취하고 꺼리지 않는 지극한 도에 이르렀음을 선언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학명계종(鶴鳴啓宗, 1867~1929) 선사가 만암 스님의 오도를 찬탄하며 자신의 게송을 덧붙인 ‘만암선사께 부치다(附寄曼庵丈室)’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物外千古事
寒窓對無言
白岩一輪月
猿嘯過山原

물외 천고의 일은
찬 창에 마주 앉아 서로 말이 없건만
백암산 밝은 달 아래
원숭이가 울부짖으며 산마루를 지나가네

吾家底事物
共戱曼庵堂
枯木花爛漫
焰裡放寒光

우리 집 살림살이를
만암선사와 함께 희롱하니
고목에는 꽃이 만발하고
불꽃 속에서 찬 빛을 놓네

학명 선사는 환응 스님과 더불어 만암 스님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선과 교학, 예술에도 정통했던 학명 선사는 용성, 한암 선사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일컬어진다. 농사지으며 선을 닦는 선농결사(禪農結社)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1927년 조계사 전신인 각황사에 선원을 연 뒤 “백학명 선사는 조선불교에 있어 선(禪)으로나 교(敎)로나 모두 한 손에 꼽는 것은 일반이 생각하는 바”라며 학명 선사를 회주로 추대했다. 앞서 1922년 수좌 35명이 의기투합해 전통불교를 되살리고 중생구제에 나서자는 취지로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설립할 때도 학명 선사의 이름을 가장 먼저 배치할 정도로 수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학명 선사는 전남 영광군 불갑면이 고향으로 19세 되던 1886년 불갑사로 출가했다. 붓을 만들어 팔다가 구암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이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을 보고 크게 발심해 산문에 들었다. 백파 선사의 7대 법손이 된 그는 1890년 구암사에서 공부를 시작으로 지리산 벽송사·영원사, 조계산 선암사·송광사 등에서 방대한 경전과 어록들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1900년부터 학명 선사는 구암사, 운문암에서 학인들을 지도했다. 그러다 경전 내용을 완벽히 체득하지 않는 한 번뇌의 굴레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1902년 그는 화두에 들었다.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사나운 맹수처럼, 어떻게든 무쇠 소의 등짝을 뚫겠다는 모기의 무모함으로 화두참구에 매진했다. 그렇게 10년, 학명 선사는 1912년 부안 월명암에서 일체 걸림에서 벗어난 격외가(格外歌)를 부를 수 있었다.

학명 선사와 만암 스님은 구암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수학하며 자연스레 가까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세속 나이는 학명 선사가 만암 스님보다 아홉 살 많았으나 법랍은 일찍 출가한 만암 스님과 같았다. 두 스님의 삶의 궤적은 상당 부분 겹친다. 배움의 시기가 그렇고, 강사 시절이 그렇다. 학명 선사가 본격적인 선승의 길을 걸을 무렵 만암 스님은 광성의숙 설립과 임제종 운동 참여 등으로 분주한 나날들을 보냈다. 만암 스님이 백양사 주지를 맡아 불사를 진행할 때 학명 선사에게 백양사 조실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학명 선사는 이를 받아들여 3~4년간 만암 스님의 곁에 머무르며 선원 수좌들을 지도했다.

불교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김소하(대은 스님)가 1929년 10월 ‘불교’(64호)에 쓴 ‘남유구도예찬(속)[南遊求道禮讚(續)]’에는 당시 상황이 잘 소개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학명 선사는 누구를 만나든지 항시 참선을 권했다. 그런데 학명 선사는 만암 스님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전혀 선을 권하지 않았다. 만암 스님은 백양사 1차 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업무 관계로 경성에 자주 오갔다. 비로소 학명 선사는 “이제부터는 자신의 일을 닦아보지 않겠냐”며 간곡히 선을 권했다. 1918년 만암 스님이 30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常置員)으로 활동하던 시기일 것으로 가늠된다. 학명 선사는 오랜 세월 경을 공부하고 선을 닦아온 만암 스님에게 깨달음의 기연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디려는 결연함이 있다면 확철대오를 할 것이라 여겼다.

만암 스님은 학명 선사가 크게 깨달았음을 알았다. 저명한 불교사학자 이능화(1869~1943)가 만암 스님에게 “학명 스님은 행리(行履)에 있어서 어떠합니까?”라고 물었을 때였다. 만암 스님은 ‘반야심경’ 내용을 인용해 “심무가애(心無碍) 무유공포(無有恐怖)겠지요”라고 답했다.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분노나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였다. 학명 선사는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나 유유히 하늘을 나는 학이었다.

만암 스님은 학명 선사의 참선 권유를 받아들였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물외암에 자신을 가두었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단코 이곳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만암 스님은 척량골을 바로 세우고 화두를 붙들었다. ‘시심마(是甚麽)’, 이것이 무엇인가? 육조혜능 선사는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이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만암 스님도 스스로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졌다.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쇳덩이를 달구고 두드려 강철을 만들 듯 자신을 매섭게 담금질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망념의 구름이 걷히고 몰록 ‘나’라는 집착이 끊겼다. 숱한 날들을 경전을 읽고 궁구했지만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였다. 한 생각이 일지 않자 지혜가 환히 빛나고 고요한 가운데 모든 게 밝게 드러났다. 문 없는 문을 꿰뚫고 일천의 성인도 전하지 못한 언어 이전의 언어를 깨친 것이다.

학명 선사에게도 만암 스님의 대오(大悟) 소식이 전해졌다. 속세 밖의 세계, 유무와 주객의 분별이 끊긴 세계라는 물외(物外)의 공간[庵]에서 오랜 도반이 마침내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학명 선사는 만암 스님의 오도를 찬탄하는 게송을 지어 보냈다. 수천 마디 말보다 더 절절한 침묵으로 언설이 끊긴 경계를 이심전심으로 나누었다. 원숭이처럼 날뛰는 분별망상에 다시는 휘둘리지 않을 것임도 드러냈다.

만암 스님은 세상에 굴림 당하지 않고 세상을 굴릴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스님은 평생 정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스님이 스스로 밝혔듯 분별심이 끊어진 보소(寶所)에는 이르렀으나 미세한 번뇌의 습기는 남아있다고 보았다. 스님이 대중들과 늘 함께 정진하고 한순간도 방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수행자 사표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약사암 입구에서 바라본 물외암지. [출처=장성 백암사 물외암지]
약사암 입구에서 바라본 물외암지. [출처=장성 백암사 물외암지]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1747호 / 2024년 10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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