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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광성의숙

전통·신학문과 민족의식 고취…만암 스님 철학 담긴 교육의 장

만암 스님 등 발의로 백양사, 불갑사 등 기금 모아 1909년 설립
불교, 한문, 일어, 산술, 지리, 국사, 측량 기술 등 다양한 교육
숙감 맡아 실질적인 운영 책임…대중과 생활하며 평등정신 실천

광성의숙은 청류암에 세워졌다. 이곳은 동학농민운동 때 전봉준이 피신하고, 구한말 항일 의병들이 드나들었던 백양사 내의 사회운동 거점이었다. 사진은 1920년대 청류암 모습.

격변의 시대, 쇄국의 빗장이 풀리면서 새로운 문물·기술·종교·사상이 밀려들었다. 서당·서원 위주의 교육방식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885년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교육시설이 늘더니 1905년부터는 전국 곳곳에 근대식 사립학교가 들어섰다. 불교계에도 경성에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는 등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었다.

1907년 해인사로 떠났던 만암 스님은 2년간의 강사 생활을 마치고 백양사로 돌아왔다.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대가람 해인사에서 견문을 크게 넓힐 수 있었다. 해인사가 운영하는 명립학교(明立學校, 1908년 해명학교로 개칭)도 그중 하나였다. 1906년 설립된 명립학교는 2년제로 불교 외에 국어, 한문, 일어, 산술 등 다양한 언어와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만암 스님은 불교가 시대를 읽지 못하면 다시 뒤처지고 대중의 신뢰를 잃을 것임을 알았다. 훗날 “온갖 시설 중에서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에 교육사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밝힌 것도, 평생 인재 양성의 길을 걸은 것도, 교육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근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구한말 등장한 의숙(義塾)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의연금을 모아 세워진 교육기관이다. 1909년 가을 설립된 광성의숙(廣成義塾)은 만암 스님의 시대 인식이 반영됐다. 발기인은 만암 스님과 배학산, 백화은, 임재근, 박한영(석전), 김종래 등 6명이었다. 백양사 관할 30여 사암 모두 의숙 건립에 호응하고, 백양사, 불갑사, 용흥사, 연흥사 등 9개 사찰은 설립 기금을 내놓았다. 방장은 환응 스님, 숙장(교장)은 석전(1870~1948) 스님, 숙감(학감)은 만암 스님이 맡았다.

광성의숙은 청류암에 세워졌다. 이곳은 동학농민운동 때 전봉준이 피신하고, 구한말 항일 의병들이 드나들었던 백양사 내의 사회운동 거점이었다. 무엇보다 청류암에는 법전, 관음전, 진영각, 요사 등 큼직한 건물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었다.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은 백양사보다 건물 규모가 2배가량 커 많은 학인을 수용할 수 있었다. ‘화엄경’, ‘법화경’, ‘원각경’, ‘반야경’, ‘능엄경’, ‘기신론’ 등 경전을 두루 갖춘 것도 장점이었다.

강사진은 만암 스님과 이종근, 신현국, 김종래, 타니 츠쿠마사(谷紹允), 오시마 야스타로(大島安太郎) 등이었다. 김종래는 법주사로 출가해 순창 구암사와 산청 대원사, 광성의숙에서 한문을 가르쳤던 뛰어난 학승이었다. 포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호남포교소 개교사로도 활동했다. 신현국은 일제강점기 여주의 저명한 유학자이며 항일운동가였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될 때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가 하면, 을사늑약에 분개해 일본을 꾸짖는 글을 써 대구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타니 츠쿠마사는 1912년 5월 임제종 묘심사파 부산포교소의 초대 주지를 역임한 일본인 강사였다. 이들 일본인은 신학문이나 일본어 등을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전통 학문인 ‘내전(內典)’과 새로운 학문을 이해할 수 있는 ‘외전(外典)’ 교육이 폭넓게 이뤄졌다. 구한말 편찬된 국사와 지리 서적을 과목에 넣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우리 국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측량, 제도, 산술 등을 가르치는 측량강습소가 운영됐다.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안목을 넓히고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였다.

광성의숙의 운영은 불교계 안팎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저기서 공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오래지 않아 100여 명의 젊은 스님이 입학을 신청했다. 적막하던 산중 암자에 활기가 넘쳤다.

백양사의 살림살이는 어려웠다. 다른 본산들은 사찰 소유의 땅이 많아 연중 수입이 양곡 수백에서 수천 석에 이르는 사찰들이 많았다. 백양사는 산내 암자를 다 합해도 한 해 40여 석에 불과했다. 교통이 불편한 탓에 신도들의 시주금도 적었다. 빠듯한 재원으로 대중들이 한 해를 살아야 했고, 불사를 진행해야 했다.

여러 사찰이 건립 기금은 냈더라도 의숙 운영의 험난함은 예견된 일이었다. 숙장을 대표하는 석전 스님은 외부 일이 잦았고, 나중에는 구암사·내장사·연대암·만일사의 4곳 주지를 겸했다. 석전 스님의 빈자리가 커질수록 만암 스님이 의숙의 관리에서 운영까지 모든 업무를 총괄했다. 풍족하지 않은 절 살림에 100여 명의 숙식을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의숙에서 공부하려면 학비를 내야 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만암 스님은 의숙의 목적이 배움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옛날 스님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다투면 부족하고, (아무리 적더라도) 양보하면 남는다(爭之不足 讓之有餘)’고 했듯, 서로 나누면 될 일이었다. 실제로 광성의숙에 입학한 학생이 학비를 못 내 그만둬야 하는 일은 한 차례도 벌어지지 않았다. 반면 먹고 입고 자는 일상은 더 궁핍해졌다. 방장 환응 스님도, 학감 만암 스님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대중공양은 평등했다. 간혹 만암 스님의 밥상에 별도의 반찬이 올라오면 그때마다 대중들의 그릇에 섞은 뒤 나누어 먹었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니 나중에는 별도의 반찬이 올라오는 일이 아예 없어졌다. 학감이기에 방사도 따로 마련됐지만 늘 큰방에서 대중들과 생활했다. 만암 스님이 평생 일관되게 실천한 의식주 절약과 평등주의 신념이었다. 학인들은 부담스러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오직 공부에 더 매진할 수 있었다.

만암 스님을 지켜보는 대중들도 감탄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차질 없이 의숙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스님은 일상에서도 수행할 때처럼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바쁜 업무를 책임지면서 자신이 담당하는 과목을 결강하는 일이 없었다. 스님의 일관된 삶의 자세는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모범이 됐으며, 더욱 강한 신뢰와 존경으로 이어졌다.

오래지 않아 광성의숙은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강사진의 학문 역량이 출중한 데다가 학생들이 기품 있다는 칭찬들이 이어졌다. 1910년 11월 26일자 ‘매일신보’에 전남의 7개 학교가 소개됐을 때도 광성의숙이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광성의숙은 민족정신 함양에도 적극적이었다. 일경에 의해 출판이 금지된 국사와 지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서적들을 배우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전통 강원 교육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일본에 저항 의식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을 수시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인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챈 일경은 청류암에 대한 감시와 순찰을 강화했던 것으로 전한다.

일제는 1915년 ‘충량한 (일본의)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일본)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일본) 국어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교육시설 통제, 교과서 검열 강화 등으로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915년 3월까지 졸업생을 배출한 광성의숙이 문을 닫은 시기도 이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만암 스님이 운영을 총괄했던 광성의숙은 6년여간 유지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의미는 자못 크다. 의숙 졸업생들은 불교계를 이끌 인재로 성장했다. 1913년 3월 25일 제1기 졸업생은 박장조, 김종열, 오혁년, 이동석, 황성연, 김지현 등 6명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의숙 졸업생이 지속적으로 배출됐다. 그들은 교육, 포교, 사회사업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펼쳤다. 그중 제1회 졸업생 봉하(峰霞, 박장조, 1887~1978) 스님은 의숙에서 세부측량과(1910년), 보통학교(1913년), 불교전수과(1915)를 마치고 동국대 전신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백양사 불교전문강원을 이끌었으며, 선운사·불갑사 주지, 정광학원 대표이사, 불교전남종무원장 등을 역임하며 불교중흥과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해안(海眼, 김봉수, 1901~1974) 스님도 광성의숙 1회 졸업생이다. 스님은 불교중앙학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만암 스님의 지원으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2년간 공부할 수 있었다. 귀국 후 부안 내소사 지장암에 야학을 개설하고, 후에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만암 스님을 도와 칠보포교당·태인포교당·기양포교당·부안포교당·미룡포교당 등을 맡아 활발한 전법 활동을 펼쳤다.

광성의숙은 외세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에서도 민족의식을 잃지 않기 위한 의도를 충실히 이행했다. 만암 스님은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 사회적 책임과 민족적 자긍심을 함께 심어주려 했다.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 속에서 자칫 무력해질 수 있었던 불교계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한 중요한 전략이었다. 광성의숙은 이러한 만암 스님의 교육 철학을 실현하는 중요한 장이었다.

광성의숙은 백양사 위상을 크게 높였다. 그리고 만암 스님의 의숙 운영 경험은 해방 후 백양사 한글강습회와 정광중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의숙을 원활히 운영한 만암 스님이 백양사 본말사 내에서 인지도가 크게 높아진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30대 후반의 만암 스님은 어느새 백양사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1750호 / 2024년 10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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