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는 불교를 믿는 이들이다. 사단법인 세계불학원에서는 ‘바웃다’라고 한다. 바웃다는 붓다를 따르는 이들을 뜻한다. 바웃다, 즉 불자 가운데는 출가자도 있고, 재가자도 있다. 출가든, 재가든 불자라면 누구든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한국불교 출·재가자들의 불교 신행은 어떨까. “불자가 지켜야 할 기본 가운데 하나인 ‘삼귀오계’ 등을 잘 지키고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불자라고 말하려면 어떠해야 할까. 다음 몇 가지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첫째, 적지 않은 한국불교의 불자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게 아닌가 한다. 거기에 더 큰 문제는 무엇인가. 술을 마시는 파계행위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곡차’라는 말로 포장해 즐기며 파계하는 것을 마치 ‘호탕한 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둘째, 비시불식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 때나, 다시 말해, 때가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자는 음식 섭취를 절제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아무 때나 먹거나, 더 달라고 하거나, 먹는 데 목숨을 걸 정도로 개걸(丐乞)스럽게 먹는 것은 수행자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셋째, 위의(威儀, 몸가짐)가 수행자, 불자답지 못한 분들이 많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데, 앉을 때 허리를 굽히고 편하게 앉거나, 기대고 앉는 등의 자세는 결코 수행자의 위의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앉고 서고 걸어야 한다. 집중하지 않고 어떻게 수행자라고 할 수 있으랴.
넷째,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많다. 수행자는 좌정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로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현대는 탁발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므로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으면 그 길에 집중해서 신도의 보시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현대의 불자는 일반 사회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므로 일반 사회의 법과 관습을 따라야 한다. 아직도 출가 수행자들은 자신을 “스님”이라고 불러 스스로를 높이고 있다.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이 높여 부르는 것이지, 자신이 스스로를 칭하며 “스님”이라고 높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여섯째, 프로필에 실명을 쓰자고 해도 안 하는 분들이 많다. 세상의 성도 버리고 이름도 버리고 하는 것이 진정한 출가일까. 진정한 출가는 욕망을 떠나고 나와 나의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할 때 진정한 출가자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하나라도 지키려고 해야 불자이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아울러 보시하지 않는 인색한 마음으로는 도업이 성성해지기 어렵다.
인색한 사회가 어떻게 극락세계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하도 인색하니 수륙재를 통해 무차(無遮)로 음식을 나누라고 하였다. 지금은 배가 고픈 세상이라기보다 스스로 고독하고 고통이라는 환상 속에 외로워하는 이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랑이 부족한 사회일 것이다.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나눠주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배고픈 시대의 수륙재에서는 배는 부르나 자기밖에 모르는 데서 오는 불신과 고독, 힐링이 필요한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어 주는 그런 무차대회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마이뜨레야, 미륵이 오는 세상, 십선이 행해지고 모두의 자애로운 벗이 되는 세상이 미륵이 오는 세상일 것이다. 이 시대를 만드는 것은, 불자의 역할을 회복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이성운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
[1754호 / 2024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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