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만암’이라는 사언절구 한시.[백양사 제공]](https://cdn.beopbo.com/news/photo/202411/326052_125801_5028.jpg)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과 백파긍선(1767~1852) 스님은 선 수행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견해는 달리했으나 추사도, 백파 스님도 서로의 깊은 안목을 인정했다. 백파 스님이 입적하자, 추사는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는 비문을 남겼다. 금석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 비문은 만년의 추사가 백파 스님을 화엄종주와 대율사로 찬탄하는 내용이다. 백양사에는 추사가 직접 백파 스님에게 써주었다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글이 전해온다. ‘만암(曼庵)’이라는 사언절구의 한시다. 만암 스님의 법호 역시 여기에서 유래했다.
曼庵(만암)
天花不染(하늘 꽃은 물들지 아니하고) / 獅子頻申(여래의 사자빈신삼매에 들어) / 轉此義者(이와 같이 법을 전하는 자는) / 如意法輪(법의 수레바퀴를 자유자재로 굴리리라)
伊闇(이암)
이암은 추사의 다른 호다. 이 시는 추사가 법호 3개를 직접 써서 백파 스님에게 보냈다는 일화와 관련이 있다. 만암(曼庵)·석전(石顚)·다륜(茶輪)이 그것이다. 설두(雪竇)·환응(幻應)을 포함해 5개를 건넸다는 얘기도 있다. 추사는 후대 스님 중에 불법의 이치를 깨친 ‘식도리자(識道理者)’가 나오면 이 호를 전해주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널리 알려졌으나 정작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만암’이라는 호가 백양사에 전하는 추사의 글씨에서 유래한 것은 분명하지만 백파 스님과의 관련성은 찾기 힘든 것이다. 당시 선 논쟁으로 백파문중과 만암 스님이 속한 연담문중 간에 갈등의 골이 깊었음을 감안하면 백파문도에서 연담문도의 법손에 ‘만암’이라는 호를 주었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그렇기에 추사가 백파 스님에게 ‘만암’ ‘석전’ 등 법호를 건넸다는 얘기는 훗날 만들어진 설화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렇더라도 만암 스님과 석전(박한영) 스님이라는 두 선지식의 출중함이 이런 이야기의 배경이 됐을 것임은 분명하다.
‘종헌 스님’이 ‘만암 스님’으로 함께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10년 무렵이다. 만암 스님이 광성의숙을 운영하고 임제종 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명성이 백암산을 넘어갔고, 추사의 기대에 부응하는 인물로 만암종헌 스님이 부각됐음을 의미한다.
만암 스님이 강학과 수행에만 오롯이 전념하지 못했던 건 굴곡의 세월 때문이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탄압을 본격화했다. 1911년 불교계가 원종과 임제종으로 나뉘어 맞설 때였다. 조선총독부는 그해 6월 불교계를 통제할 전문 7조의 사찰령을 공포했다. 전통불교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으로 백양사도 통한의 세월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사찰령의 내용은 △사찰 병합·이전·폐지는 조선총독부 허가를 받을 것 △사찰은 법회·포교 및 승려의 거주 목적으로만 사용할 것 △각 본사는 사법(寺法)을 두어 총독의 허가를 받을 것 △사찰에는 반드시 주지를 둘 것 △사찰 재산 매각 시 총독의 허가를 받을 것 △이를 위반하면 징역이나 벌금에 처할 것 △사찰령에 명시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총독이 임의로 법을 제정할 수 있음 등이었다. 총독부가 사찰의 인사권 및 행정 전반을 모두 관리·통제하겠다는 의도였다.
한 달 뒤인 7월에 발표된 사찰령시행규칙은 더 치밀하고 구체적이었다. 전 조선의 사찰 중 30개의 큰 사찰을 본사로 지정해 30본산 체제로 전환했다(1924년 11월 구례 화엄사가 본사로 승격됨으로써 31본산 체제가 됨). 나머지 사찰들은 해당 지역의 본사에 소속된 말사로 일괄 편입시켰다. 본사 주지는 선거로 선출한 뒤 총독 인가가 있어야 취임할 수 있었다. 말사 주지도 본사 주지가 임명하되 지방 장관에게 인가받도록 의무화했다. 주지가 되면 사찰 토지·삼림·건물·불상·문서·경전과 기타 귀중품까지 목록을 작성해 반드시 총독에게 제출하도록 명문화했다. 사찰의 재정을 장악하는 동시에 본·말사 주지가 총독부의 눈 밖에 나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악법이었다.
일제는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며 불교계를 통제하고자 했다. 승가를 서열화하고 본사 주지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일본의 고급 관료로 대우받았으며 매년 총독부 관저에서 열리는 신년하례회에 정식 초청됐다. 말사에 대한 영향력도 매우 컸다. 주지 임명권과 더불어 말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항을 일일이 보고 받고 허가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은 일제가 식민 통치를 원활히 하려는 관리체계였다. 불교계 반발이 거셌으나 식민지 치하에서 이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 승가의 전통과 규범을 약화하고 일본불교가 빠르게 잠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산중공의제(山中公議制)의 붕괴였다. 전통적으로 사찰의 크고 작은 일들은 스님들이 모여 토론하고 합의하는 방식이었다. 사찰령 체제에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본사 주지는 본사 재적 스님과 산내 말사에 승적을 가진 스님이 참여하는 선거로 이뤄졌다. 세속의 선거제도가 산중의 오랜 전통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선거제도는 선거 후 내부 갈등, 위계질서 문란, 수행풍토 약화 등 부작용을 낳아 승가를 병들게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선거로 존경받고 화합하는 인물이 본사 주지로 선출되면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시류에 영합하는 인물이라면 전횡과 갈등이 잇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불교 전체가 극히 위험한 시험대 위에 오른 것이다.
![백양사는 1916년 7월 7일 만암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며 지금의 사격을 갖추었다. [출처=문화유산청]](https://cdn.beopbo.com/news/photo/202411/326052_125800_4829.jpg)
백양사는 장성·정읍·고창·순창 등 지역의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로 지정됐다. 백양사 역시 초기에는 사찰령 시행에 반발했다. 총독부가 본사 주지 선출 결과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이를 차일피일 미루며 저항했다. 1911년 9월 수원 용주사가 강대련 스님을 주지로 선출한 것을 시작으로 각 본사에서 속속 주지를 추천해 올렸다. 조선총독 데라우치는 선거로 선출된 스님들을 본사 주지로 임명했다.
백양사도 총독부 지시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중들은 환응 스님을 첫 본사 주지로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계율이 청정하고 학덕이 높은 데다가 오랜 세월 운문암에서 강의했기에 스님을 따르는 대중들이 많았다. 정작 당사자인 환응 스님은 한사코 마다했다. 수십 년간 산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듯 세속의 일에 얽히기를 극도로 경계했다. 다른 본사들의 주지 인선이 마무리 되어감에 따라 백양사를 향한 총독부의 압박이 더 심해졌다. 환응 스님도 총독부의 요구를 끝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형식적인 선거 절차가 진행된 뒤, 1912년 12월 19일 백양사의 첫 본사 주지로 취임했다.
연로한 데다가 대외활동을 꺼리는 환응 스님을 돕고 나선 것은 애제자 만암 스님이었다. 사찰 일과 관공서 업무에서부터 외부 행사들까지 만암 스님이 일일이 챙겼다. 광성의숙을 운영하고 임제종 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을 것임은 자명하다. 나중에는 지역 내 불교활동도 만암 스님의 몫이었다. 역사학자 이능화는 당시 상황을 ‘불교진흥회월보’(1915.4)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성 백양사 주지 김환응 화상은 계율을 지킴이 엄정하여 일생토록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나 사방의 인사가 그 소문을 듣고 공경해 우러르고 부처님 믿듯이 했다. 본사(백양사) 송만암 화상은 부지런히 오가며 일을 도모해 정읍에 불교회를 설립하니 본래 말 타며 활쏘기했던 장소가 장차 사찰[鍾魚之堂]이 될 것이라 했다.’
만암 스님은 1914년부터 백양사 주지 대리로 활동했다. 불교진흥회 설립총회, 30본산주지 정기총회, 30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 총회 등 중앙 불교계 회의에도 만암 스님이 백양사를 대표해 참석했다. 만암 스님은 1916년 7월 7일 백양사 주지에 정식 취임했다. 이후 일제 말기까지 약 24년간 총 7차례 주지직을 맡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이끌었다. 스님의 헌신으로 백양사는 명실상부한 호남의 대가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엄정한 계율과 수행가풍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가 백양사를 전국 최고의 모범도량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300년 백양사의 장구한 역사에서도 만암 스님을 으뜸으로 숭상할 정도로 그 발자취는 심원했다. 백양사 주지에 취임한 만암 스님은 조선 최고의 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예견대로 본격적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자유자재로 굴리기(如意法輪)’ 시작했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754호 / 2024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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