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의 규모도 비교적 작지 않고 도회지 인근에 있는 전통사찰인데 초하루 법회 참석 인원이 2명뿐이란다. 요즘 지방 사찰에는 초하루에 한 명도 신도가 오지 않는 절도 적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10여 년도 더 된 것 같다. 물론 더 한 곳도 있을 것이다.
출가자가 줄어드는 것은 인구 절벽 시대에 너무나 당연하다. 거기다가 비교적 물질의 궁핍함이 적은 요즘, 세상의 즐거움을 내려놓고 고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수행자의 길에 들어서는 이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더 이상하다.
미래에도 우리 사회에 사찰과 불교가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근대 이전에는 국가에서 주는 도첩을 받고 국가나 왕실의 안녕을 기도하는 존재, 즉 사제로 오랫동안 존속해 왔다. 그 유습은 현대까지 불교가 사회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교 국가의 핵심 의례였던 제례의 대행과 인력으로 넘기 어려운 재앙의 해결자로서 불교는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 역할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전통사회의 문화였던 제례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변하므로 불교의 역할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을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불교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과학이나 기술 등으로만 재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난망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이는 세상의 본질도 바르게 알기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업연의 세계를 어찌 쉽게 알 수 있을까. 고도로 발달한 현대 의학으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며칠 전이었다. 평소 아픔이나 전조증상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던 집안 조카가 심정지가 와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불교라고 해서 갑자기 불어닥친 난관을 해소하는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현대 의학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불교가, 불자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무상하다는 것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하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의 양상을 분명히 읽는 힘을 길러 무상과 무아를 진리로 체득해서 대처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단생(單生)의 사고가 아니라 다생(多生)의 윤회적 세계관으로, 변화를 바로 인지하여 대처함으로써 유위를 뛰어넘어 고통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닥쳐오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흔들림 없이 고통의 삶을 뛰어넘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불교가 하고 있고, 걸어가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결론은 간명하다. 불교로 사고하며 자신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몸을 지키는 호신,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이 진언을 염송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것이 최상의 답은 아닐 것이다. 정답은, 나와 세상을 바로 보며, 늘 깨어 있는 것이다. 수행하는 것밖에 없다.
수행하지 않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불교가 없으면 사찰이 존재할 이유는 더욱 없다. 나를 닦는 수행이 없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불교의 근거지인 사찰은 존속의 명분을 잃고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불교의 수행은 경전을 보고, 염불하고, 참선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바로 멈춤이고, 바르게 살핌이다. 멈춤은 삼매의 다른 말이다. 멈춤은 욕망에서 멈추는 것이고, 비운 마음으로 편견 없이 바르게 나의 마음과 세상을 바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 힘이 정력(定力)이고 관력(觀力)이다. 정력과 관력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찾아 해소함으로써 소원의 충족을 위해 찾아오는 불자를 도울 수 있게 된다. 결론은 간단하다.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 없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이성운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
[1757호 / 2024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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