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암 스님이 주창한 일하면서 정진한다는 반선반농의 정신은 백양사의 가풍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토요일마다 울력하는 백양사 스님들. [백양사 제공]](https://cdn.beopbo.com/news/photo/202412/326578_127745_377.jpg)
백양사는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 연간 40여 석에 불과한 양곡 수입으로 사찰 대중이 1년을 지내고 선원과 강원을 운영해야 했다. 낡은 전각을 수리하기도 버거웠기에 새로운 불사는 엄두조차 못 냈다. 만암 스님이 백양사 재건의 뜻을 세우고 대중이 이를 적극적으로 돕더라도 새로운 재정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면 사실상 중창불사는 불가능했다.
만암 스님이 활로를 찾은 것은 노동을 중시하는 선의 오랜 전통에서였다. 인도불교에서 출가자는 무소유를 지향했다. 수행자는 노동을 일체 않고 탁발로 생활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렸고, 수행자는 사람들에게 법을 펼쳤다. 수행자를 공경하는 문화가 정착한 인도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중국으로 넘어온 불교는 상황이 달랐다. 보시가 일상화되지 않았기에 교단은 백성들보다 왕실과 귀족들 후원에 주로 의존했다. 이는 불교의 자생력이 견고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교단을 후원하는 왕실과 귀족들이 탄압으로 돌아서거나 후원을 끊으면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렸다. 5~10세기 무렵 중국에서 4명의 황제에 의해 벌어졌던 대대적인 폐불 사건인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때 교단이 초토화됐던 것도 자립 기반이 허약했던 상황과 직결된다.
반면 선종은 폐불의 거센 파고에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작았다. 선종에서는 노동과 수행을 병행한 자급자족의 전통이 일찍부터 형성됐다. 선종의 제5조 홍인(601~674) 스님은 기주 황매의 쌍봉산에서 500여 대중이 함께 노동과 수행을 겸하는 수행 집단을 형성했다. 스님은 “낮에는 노동에 열중하며 대중을 공양하고 밤에는 좌선하기를 새벽까지 하였으며, 일찍이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라고 밝힌 데에서도 그 특성이 잘 나타난다. 이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당나라 백장회해(720~814) 스님의 청규에 따라 선종의 자급자족 가풍이 확립됐기에 폐불 시대에도 꿋꿋이 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다. 절에서 지낸다고 마냥 수행과 경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궁핍한 시절에 스님들이 농사짓는 것은 사찰의 흔한 풍경이었다. 이런 가운데 근대기 접어들어 농사를 단순한 노동이 아닌 수행과 연결하려는 본격적인 시도가 이뤄졌다. 반선반농(半禪半農) 또는 선농불교(禪農佛敎)가 그것이다.
반선반농은 자급자족이라는 경제적인 동기와 더불어 선수행과 승풍 진작을 위해 사찰 대중이 선사의 지도하에 노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사는 대중과 함께 노동하면서 대중들에게 도에 드는 방편을 보일 수 있고, 대중은 노동의 전후에 좌선할 수도 있다. 이렇게 선(禪)과 농(農)을 병행하며 농사가 곧 선이 되는 것이 반선반농이다.
그동안 반선반농의 효시로 주목받았던 인물은 학명(1867~1929) 스님과 용성(1864~1940) 스님이다. 학명 스님은 만암 스님을 깨달음으로 이끈 선지식으로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정읍 내장사에서 반선반농의 공동체운동을 이끌었다. 학명 스님은 대중을 모아 농사가 곧 선이라는 공부법을 제창했다. 일종의 청규인 ‘내장선원 규칙’을 마련해 선원 목표가 반선반농에 있으며 스스로 선을 닦고 자력으로 먹을 것을 마련한다는 운영 준칙을 명확히 했다. 스님은 선원 대중에게 교학을 가르치고 일상에서 선의 이치를 드러내 보였다. 호미를 들고 밭을 매면서 자신이 직접 지은 불교 가사도 불렀다. 반선반농의 가풍을 알려지면서 많은 수행자와 신도가 모여들었고 건물 개축·신축 등 불사도 자연스레 이뤄졌다. 석전 한영 스님은 내장사의 변화를 두고 “이렇게 내장사가 새롭게 빛나니 참으로 예전의 내장사가 아니었다”고 찬탄하기도 했다.
용성 스님은 1927년부터 10여 년간 경남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華果院)을, 중국 간도 용정에서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설립해 반선반농을 전개했다. 스님들이 결혼하고 고기 먹는 풍토를 비판하며 승적을 던져버린 용성 스님에게 반선반농은 새로운 불교운동의 일환이었다. 용성 스님은 반선반농을 주창하면서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되 남에게 기대어 살지 말자”고 했다.
수만 평 규모의 화과원에 밤나무와 감나무 등 유실수 1만여 그루를 심고 다양한 채소를 재배했다. 간도 용정에도 땅을 매입해 스님과 재가자가 함께 농사를 지었다. 스님들에게는 농사가 수행과 자급자족의 실천이었고, 조국을 떠나와 살길이 막막했던 교민들에게는 생활의 터전이 되어주었다. 용성 스님은 대중 스님들에게 농사에 힘쓰되 계율을 어기지 말고 정진할 것을 강조했다. 그 수행에는 참선을 비롯해 염불·주력·간경 등이 포함됐다. 이렇듯 용성 스님에게 반선반농은 자주불교·전통불교를 이루겠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일각에선 학명·용성 스님이 반선반농을 가장 먼저 실시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실질적인 반선반농의 선각자는 만암 스님이었다. 스님은 수행과 일상을 분리하지 않는 반선반농을 일찌감치 주창했다. 학명·용성 스님의 반선반농이 6~10년에 그쳤지만 만암 스님의 반선반농은 1917년부터 1947년 고불총림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것도 의미가 깊다. 특히 1925년 백양사 8층 석탑에 모실 사리를 기증할 정도로 만암 스님과 교유했던 용성 스님은 백양사의 반선반농 수행 가풍을 지켜본 뒤 함양과 용정에서 반선반농 운동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다.
만암 스님의 반선반농 운동은 백양사 중창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만암문집’에는 이 같은 사실이 명확히 소개돼 있다.
‘만암 스님은 자급자족의 이념을 내세워 사찰 내 승려와 신도들로 하여금 짚신과 대나무 그릇의 제조와 양봉의 강습 등을 권장하고 또 반선반농으로 직접 경작하는 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이같이 반선반농의 제도를 확립하여 만암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였던 때에는 수 칸의 요사채밖에 없던 황폐한 사찰을 새롭게 중수하여 호남 굴지의 거찰로 일신하였다.’
만암 스님의 반선반농은 백양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사찰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었다. 이전까지는 신도들 보시가 일정하지 않았기에 중장기 계획을 세워 일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진행하는 백양사로서는 더욱 그랬다. 반선반농은 사찰의 안정적인 재정 마련에 크게 도움이 되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절에 많은 스님이 생활하고 있는 데다가 논밭으로 개간할 공간도 많았다. 만암 스님은 절에서 생활하는 스님과 신도들에게 짚신과 대나무 그릇을 만들도록 하고 양봉을 장려했다. 또 본사 주지인 만암 스님이 솔선수범해 틈틈이 짚신을 삼고 직접 농사를 지음에 따라 반선반농은 빠르게 정착돼 갔다. 그 결과 연간 양곡 수입이 40석에 그쳤던 백양사는 10년 만에 연간 800여 석을 생산하는 호남 굴지의 거찰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반선반농은 백양사의 새로운 수행문화 조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1920~30년대 초 문헌에는 ‘백양사에는 간화선 수행이 중심이 돼 있다’는 기록들이 여럿 남아있다. 또 만암 스님의 지론을 소개할 때 ‘낮에 경작에 힘쓰고 밤에 참선한다’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이라는 용어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1927년 1차 중창불사가 마무리될 때는 이미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반선반농의 백양사 수행 가풍이 정립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면 백양사의 반선반농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1947년 음력 12월 8일(양력으로는 1948년 1월 18일) 결성한 고불총림(古佛叢林) 청규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찰의 모든 대중은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이치를 철저히 깨닫고 증득할 것과 함께 화두를 드는 수좌든 경전을 공부하는 학승이든 사찰 업무를 담당하는 사판이든 오후 5시에서 7시까지는 예외 없이 노동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노동의 중시는 평상시의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는 선종의 지향점과 맞아떨어지며 백양사에서 거주하는 대중 모두 일하면서 수행하는 독특한 가풍을 만들어 갔다.
만암 스님의 반선반농 중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과 불교정화운동기, 입적 직전까지도 이어졌다. 1953년 대종정으로 추대된 이듬해에 제시한 ‘새로운 면목’에서도 만암 스님의 반선반농 사상은 잘 드러난다.
‘옛날 우리 교단생활은 정신상의 활동에 부단한 노력은 있었으나 육체적 노력은 혹 부족하다는 비난도 있었다. 금후로는 반선반농의 생활과 주경야독의 고풍을 준수하여 자작자급(自作自給)의 미풍을 발휘하고 또 옛 선사의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의 가풍을 실천하게 되는지라, 이도 우리 교단의 근로 생활을 권발하는 취지에 새로운 면목이라 이르겠다.’
만암 스님은 오랜 세월 전해오는 사찰 재산과 신도들 보시로 교단이 유지됐지만 노동하지 않아 세상의 비난을 자초했다고 판단했다. 자급자족은 선종의 오랜 전통이고 이를 되살릴 때 출가자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불교도 거듭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만암 스님이 백양사 주지를 맡은 이후 보여준 일관된 신념이었다.
반선반농은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도 크게 높였다. 불교를 경원시했던 유생들이 탁발 문화를 깎아내리고 반사회적으로 낙인찍은 상황에서, 자급자족의 반선반농 운동은 스님들도 생산의 주체라는 인식을 높여주었다. 만암 스님은 반선반농이 불교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도 대단히 유용할 것으로 전망했다. 스님이 “한국불교는 원래 대승적 견지에 기인하여 자기의 수양에만 한함이 아닌지라 반선반농주의를 일반적으로 보급케 하여 민족의 모범으로 만들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만암 스님은 반선반농를 통해 백양사의 대대적인 불사와 수행가풍을 이뤄냈으며, 한국불교의 체질을 변화시키려 했던 근대 한국불교의 반선반농의 주창자이자 실천자였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758호 / 2024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