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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모범사찰

“백양사가 전 조선의 모범사찰이라고 추천하기를 주저치 아니한다”

이능화·대은·진호 스님 등 백양사 순례 이후 한결같이 찬탄
간화선 중심, 평등하게 생활하며 모든 대중이 수행에 전념
“만암 스님이 도인이고 선지식임을 백양사에 와서야 알아”

만암 스님이 추진한 중창불사는 대성공이었다. 백양사는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찰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퇴락했던 사찰이 불과 10여 년 만에 대가람의 위용을 되찾은 데에 놀라워했다. 계율이 엄격하고 수행 가풍이 살아있는 청정한 도량이라는 평판까지 얻기 시작했다. 백양사는 더 이상 궁벽한 사찰이 아니었다.

백양사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변화된 모습을 직접 살펴보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상현(尙玄)·무능거사(無能居士) 등 호를 썼던 이능화(李能和, 1869∼1943)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중국어·일어·영어·불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어학 천재였다. 불교·기독교·도교·민속학·여성사·외교사 등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업적도 남긴 학자였다. 특히 1918년 3월 간행된 ‘조선불교통사’는 그를 최고의 학자 반열에 오르게 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지는 372년부터 1916년까지 우리 불교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료를 집대성한 역작이었다. 이능화는 언론인으로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 등 잡지의 편집인 겸 발행인도 맡고 있었다. 그는 계율이 바로 서야 스님들이 존중받고 불교가 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고승이더라도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판했다.

이능화는 당시 불교계가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다고 보았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1000년의 전성기 뒤에 불교는 500년간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많은 이가 고려불교계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어느 시대든 일탈은 있었고 고려말 불교계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었다. 이능화는 그보다 불교를 비판 배척하는 주자학의 등장을 주된 요인으로 꼽았다. 그들은 승려의 과오를 찾아내 이슈화하고 집요하게 비판했다. 조선 건국 후에는 더욱 심해졌다. 백성의 신망을 얻는 고승이 있으면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왕실과 대중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로 불리던 행호(行乎), 한글 경전 보급에 지대한 공이 있었던 신미(信眉), 문정왕후를 도와 불교중흥을 도모했던 보우(普雨) 같은 스님들을 대표적인 희생양이라 보았다.

그러나 사대부의 시대가 막을 내리며 세상은 급변했다. 서양의 낯선 문물과 제도가 밀려 들어왔다. 개신교는 국제사회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학교와 의료시설을 건립하면서 민중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천주교도 로마 교황청의 두둔을 받으며 보육원·양로원 등 복지시설로 교세를 확장했다.

이능화가 보기에 불교계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고착된 편견과 차별이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더 빨리 변화에 적응하고 도약해야 했다. 다행히 불교계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저력이 있었다. 어떻게든 불교계를 대변하는 기구를 만들려 했고, 포교와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과가 드러났다. 일본, 인도 등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불교 인재들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모습도 고무적이었다. 특히 전통 교학에 석전, 진응 등 강백이 있었고, 선에서는 용성, 한암, 학명 등 뛰어난 선사가 있었다. 이능화는 불교가 비록 오래된 종교이지만 ‘모든 종교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상이 심오했고, 서구에서도 연구자가 끊이질 않아 머지않아 세계적인 종교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백양사에서 발견했다.

이능화가 백양사를 찾은 것은 1926년 겨울이었다. 그도 백양사가 크게 바뀌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만암 스님을 중심으로 사찰 대중들이 함께 일하고 정진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반면 사찰은 커졌으나 내실이 없다는 얘기도 없지 않았다. 이능화는 백양사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대중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직접 확인에 나섰다. 그는 순례에서 보고 느꼈던 내용을 1927년 1월 ‘불교’ 31호에 기고했다.

‘백양사 청중(淸衆)은 주지 만암 스님의 지도인솔 아래 화합 일치되어 공동으로 심력을 다함으로써 거대한 가람의 법당, 요사채 등을 새롭게 건축했고, 그 청규를 지킴에는 조석예불뿐만 아니라 비록 어린 사미일지라도 법의(法衣)를 입지 않고는 조석공양(朝夕供養)의 참여를 불허하며, 공부 일과에 있어서는 (낮밤으로 참선하는) 주참야참(晝參夜參)의 선풍(禪風)과 사교대교(四敎大敎)의 강규(講規)를 엄격히 행함을 보고 나는 실지로 보는 것이 표면의 소문과 상이함을 느꼈다. 그리고 조선 각 사찰이 이와 같은 풍규(風規)를 지키는 줄을 알겠다.’

이능화는 우리 불교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논한 뒤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임을 백양사 사례를 들어 밝혔다. 이어 조선시대 500년의 억압과 그로 인해 널리 퍼진 편견이 남아 있으나 승가의 신뢰를 높이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것은 불교계의 노력 여하에 달렸음을 강조하며 ‘조선불교의 삼시대(三時代)’라는 글을 마무리했다. 이능화에게 만암 스님이 이끄는 백양사는 미래시대 불교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대은(김태흡·김소하, 1899~1989) 스님은 이능화보다 2년 반 뒤 백양사를 찾았다. 스님은 불교학자, 언론인, 경전 번역가, 중앙포교사 등으로 활동하며 근대기 불교대중화를 이끌었다. 강화도가 고향인 스님은 철원 심원사로 출가해 법주사 강원을 마치고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니혼대학에서 종교과와 국어한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귀국했다. 이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운영하는 각황사 초대 포교사로 임명돼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불교 잡지에 불교 대중화와 관련한 수많은 글을 발표하고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강연했다. 토·일요일에는 각황사에서 설법하고, 전도대 조직을 통한 길거리 포교, 불교합창단 및 불교극단 창단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포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대은 스님이 만암 스님을 만난 것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당시 만암 스님은 동국대 전신인 불교전수학교 교장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교학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 무렵 두 스님은 각황사에서 자주 얘기를 나눴고, 만암 스님은 그에게 환응 스님의 청정한 계행(戒行)과 학명 스님의 선행(禪行)에 대해 들려주고는 했다. 이를 계기로 대은 스님은 1929년 7월 전남 장성으로 구도 순례를 결행했다. 김소하라는 필명으로 쓴 스님의 글은 그해 9월 ‘불교’ 제63호에 ‘남유구도예찬(南遊求道禮讚)’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여기에는 만암 스님이 주지를 맡은 이후 달라진 백양사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글은 폭우를 뚫고 경성에서 밤 기차를 타고 논산에 내려 백양사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민족지사로 1927년 백양사 중창 사적비를 쓴 정인보(1893~1950) 선생 등과 같이 있던 만암 스님을 만난다. 그들과 함께 백양사와 운문암 등을 순례하고 대중들의 생활을 지켜본 대은 스님은 백양사의 규칙이 엄숙하고 승풍이 정연하다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회승당(會僧堂) 선원에는 30여 명의 선객이 정진하고, 향적전(香積殿) 강원에는 10여 명의 학인이 공부하고 있음도 소개한다. 특히 사찰에서 생활하는 이라면 누구나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참선해야 했으며, 아침저녁 예불 때 1~2시간씩 좌선했다. 만암 스님 또한 낮이나 밤이나 선정 삼매에 들었으며, 초학자들에게 지성으로 참선을 권했다. 스님은 대중들로부터 ‘개심도인(開心道人)’ ‘목양도인(牧羊道人)’으로 불렸다고도 했다.

대은 스님은 지난 2년간 각황사에서 아침저녁으로 보고 같이 식사도 하던 만암 스님이 ‘도인’이고 ‘선지식’이었음을 백양사에 와서야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찬사를 이어갔다.

‘백양사는 승속 간에 누가 와서 보든지 환희심이 날만 한 불법승 삼보를 보호하고 전승하는 대가람이며, 선지식이 상주할 만한 대도량이다. 조선 사찰을 다 보지 못한지라 가벼이 말할 수는 없으나 내가 본 범위 내에서는 확실히 백양사가 전 조선의 모범사찰이라고 추천하기를 주저치 아니한다.’

‘석문의범(釋門儀範)’ 등 불교의례를 집대성하고 불교출판에 힘을 쏟았던 안진호(1880~1965) 스님도 백양사에 머무르며 이것저것 꼼꼼히 살핀 뒤 ‘백양년과 백양사’(‘불교’ 79, 1931. 1)라는 글을 남겼다. 백양사의 위치, 연혁, 탑·비·부도, 건축물 현황, 백양사 역대 주지, 재산, 전설, 암자 등을 간결하게 정리한 진호 스님은 백양사가 조선의 모범사찰임을 4가지 이유를 들어 제시했다. 첫째는 간화선을 본위로 삼는 수행도량으로서 절에 상주하든 객승이든 노승이든 사미승이든 화두를 참구하며, 특히 매년 여름과 겨울 안거 기간이면 선원 스님 외에도 본말사 주지 모두 백양사에 모여 반드시 1개월씩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 두 번째는 옛 법식에 맞춰 부처님이 강림하듯 정숙하고 정성을 다해 불교의식을 진행한다는 것. 셋째는 스님의 장례식 때 여느 사찰들과 달리 복식과 절차가 잘 지켜지고 엄숙하다는 것. 넷째는 사찰 대중들이 자기 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평등하게 공동생활을 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생활의 통일을 꼽고 있다. 그러면서 ‘새가 장차 쉬려고 할 때는 그 숲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치문경훈’의 구절을 인용한 뒤 먼 훗날 자신도 ‘백양사의 승려가 되어 볼까’라는 말을 남긴다.

당시 백양사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변화의 중심지였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린 변화가 아니라 옛것을 근간으로 하되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전형이었다. 특히 평등한 승가공동체를 구현하며 모든 대중이 수행에 매진하는 백양사의 모습에서 당대 지식인들은 사찰의 이상과 불교의 희망을 발견했으리라.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1762호 / 2025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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