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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정감록의 균열과 서로 다른 말세의 풍경

흔들린 정감록, 서로 다른 종말의 꿈

일제 탄압에 서로 다른 해석
민족주의·친일 오가는 예언
정도령부터 태을선까지 각각
서로 다른 신종교 미래 구상

조선총독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 민심이 불안해지자 종교유사단체에 대한 단속과 취체에 공을 들였다. 그 이유는 유사종교가 사회의 안녕질서를 소란하게 하고 인심을 광혹시켜 치안 확보에 지장을 준다는 것, 종교의 표면에 민족의식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많다는 것이었다.  종교유사단체는 주로 불경죄(不敬罪)와 조언비어죄(造言蜚語罪)의 혐의를 받았고, 정치적 측면에서는 보안법, 사회적 측면에서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종교유사단체의 탄압과 해체 근거로 제시된 불경죄나 조언비어죄의 내용은 무엇일까? 당시 조선의 자생적 신종교는 ‘정감록(鄭鑑錄)’으로 통칭되는 각종 비결(秘訣)에 근거한 예언을 유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감록’에 근거한 신종교의 예언은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지는 말세의 풍경을 공식과도 같은 일정한 패턴에 담아 묘사했다. 대체로 말세의 날이 오면 해당 종교의 교주나 진인(眞人)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등극하여 일본을 패망시키고 조선을 독립시킨 후 신국가, 신사회, 지상낙원 등을 창조하며, 해당 종교의 신도는 고위관직에 올라 번영을 누린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각 신종교가 그리는 말세의 풍경은 획일적이지 않았다.

예컨대 1928년에 인도교(人道敎)를 창시한 한병수(韓炳秀)는 ‘정감록’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후천설을 주장했다. 증산 계열의 보천교(普天敎) 신자였던 그는 1923년에 전북 정읍으로 이주하여 오로지 우주심리(宇宙心理)의 연구에 몰두하고 나서 깨달음을 얻어 인도교를 창립했다고 한다. 그는 우주의 삼라만상은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심리가 상통하여 우주와 하나가 되면 도통(道通)하여 마음먹은 대로 음양오행의 상극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도통하면 우주를 정지시켜 춘하추동과 주야의 변화가 없는 상춘선경(常春仙境)의 후천사회를 도래하게 할 수 있고, 이때 교도는 무병식재(無病息災), 현신불사(現身不死), 전지전능의 선인(仙人)이 된다고 주장했다. 한병수는 자기야말로 도통한 자로서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고 후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태을선(太乙仙)이며, 후천사회는 현세와 같은 정치조직이 없는 도덕사회가 될 거라고 말했다. 한병수가 말하는 말세에서는 정도령(鄭道令)이나 진인이 아니라 태을선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계룡산이나 ‘정감록’에 대한 언급도 없다. 교주가 도통하여 시간을 정지시킨다고 하는 주장도 매우 이례적이다.

1933년에 황신제국대정교(皇神帝國大正敎)를 창립한 이종진(李鍾震)은 불교경전과 단군교(檀君敎)의 ‘삼일신고(三一神告)’를 연구했다. 그는 조선에는 다음에 정씨(鄭氏) 성을 가진 자가 왕이 되어 계룡산 신도안(新都內)에 도읍을 정하고 약 800년간 왕위를 지속한다는 전설이 있고, 무지한 자들이 그것을 믿고 신도안에 와서 무위도식하며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감록’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鄭)은 정(正)과 발음이 동일한 것으로 여러 면에서 검토하면 일본 다이쇼 천황(大正天皇)의 ‘정(正)’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하여 이종진은 천신인 상원교황(上元敎皇)과 지신인 중원교황(中元敎皇), 그리고 다이쇼 천황을 의미하는 대정교황(大正敎皇)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황신제국대정교를 창립했다. 이종진은 다이쇼 천황을 ‘정감록’의 진인으로 해석하면서 ‘정감록’이 반드시 민족주의적인 방식으로만 이용되지는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70호 / 2025년 3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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