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9살 때 한의와 양의를 겸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1살 때는 항상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이어 12살 때 친딸처럼 나를 돌봐주시던 큰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느낀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람은 어디서 오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게 됐다.
아버지가 양양읍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당시 남대천 다리 밑에는 거지가 많았다. 그들은 아침마다 밥 담는 그릇을 들고 동냥하러 다녔는데 사람들로부터 천대와 조롱을 받았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왜 저런 멸시를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예수님과 부처님, 공자와 노자 등 성현들의 이야기와 위인전을 읽으며 인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설산에서 도(道)를 구했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도를 구했지만, 나는 거지들처럼 고통스러운 사람들 속에서 도를 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오빠가 “어떤 스님이 사람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 요소로 이뤄졌다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사람은 생각하는 고등 동물인데 왜 단지 지·수·화·풍으로만 이루어지는가?’라는 의문이 가졌고, 자나 깨나 그 의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의문을 풀려고 애쓰던 중 19살 때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책상도 나요, 벽도 나요, 칠판도 나요, 밖에 있는 나무도 나요, 공기도 다 ‘나’임을 체험했다. 일체가 다 ‘나’뿐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서울역 앞 대우 계열사에 입사해 일하던 중, 우연히 바로 옆 남대문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그 후 23세 무렵 불교를 믿던 남편을 만나 서로의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독교와 불교는 표현만 다를 뿐 말하고자 하는 진리는 하나임을 깨달았다. 손가락은 달라도 가리키는 달은 같은 것이다.
30세 무렵부터 도를 구하고자 남편과 전국을 다니며 수많은 도인을 만났으나, 그들은 완전한 도에 통하지 못하고 혹세무민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불법으로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정일 큰스님을 우연히 뵀고, 그때부터 ‘지장경’, ‘관음보살 보문품’, ‘금강경’, ‘선가귀감’, ‘원각경’, ‘법화경’ 등을 각각 100번씩 읽으며 수행했다.
독경과 동시에 ‘이 뭣꼬?’ 화두를 들었다. 처음에는 화두 의심이 잘 들리지 않았다. 3년간 성심과 공경심, 믿음을 다해 하루 9시간씩 절을 하며 ‘관세음보살’을 염했더니 꿈속에서도 부르게 됐다. 무슨 일을 하든 마음속에서는 염불이 계속되는 상태를 바라볼 수 있었다. 꿈에서도 염불을 하니, 무서운 짐승들이 떼로 몰려와도 부처님의 위신 덕에 염불하면 금방 사라졌다. 관세음보살님께서 ‘공(空)’에 대해 설법하시는 것을 듣기도 했다. 또한 ‘지장보살’ 염불을 하면 지장보살님의 몸에서 자비와 위로의 금싸라기 같은 빛이 나와 죽은 내 모습에 한없이 비춰 내 몸에 다시 생기가 돌고 살아나기도 했다.
이처럼 수많은 체험을 했지만 큰스님께서는 “경계체험”이라 딱 잘라 말씀하시고 “아직 멀었다. 요술통을 하면 안 된다. 도를 통해 도술이 나와야 하니 오직 화두 의심만 붙들고 가라”고 하셨다. 큰스님이 입적하시기 1년 전 마지막 점검을 받을 때 “이제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선 “계속 그렇게 정진하라”고 독려해 주셨다.
[1771호 / 2025년 4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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