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정감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신종교 가운데 하나는 1937년에 346명의 살해 사건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백백교(白白敎)였다. 제1세 교주 전정운(全廷芸)은 1868년 10월 4일에 평안북도 영변군 연산면 화현동에서 화전민 전공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한문을 배운 그는 강원도 고성군에서 화전경작을 하면서 동학 주문과 ‘정감록’을 연구했고, 1902년경 함경남도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으로 이주해 ‘가광생인수도(家廣生人壽道)’라는 신흥종교를 창립했다. 그는 백의적(白衣赤) 주문을 외면 무병식재, 불로장수하여 마침내 신선이 될 수 있다면서 포교했고, 사람들이 주문의 ‘백’ 자를 따서 백도교(白道敎)라 부르자 교명을 변경했다.
‘백백백, 의의의, 적적적(白白白, 衣衣衣, 赤赤赤)’이라는 백의적 주문은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하라”는 ‘정감록’의 구절 가운데 ‘적(賊)’을 ‘적(赤)’으로 변형시켜 만든 것이다. ‘정감록’에서 흰색은 ‘말세의 색’이자 ‘구원의 색’이었다. 굶주린 자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 행위가 일어나고, 병란, 홍수, 흉년, 역병이 지속하는 말세가 닥치면, 십 리 장송이 하루아침에 하얘지고, 청포의 대나무와 계룡산의 돌도 하얘지는데, 이때 백의적을 만나 결혼하고, 흰 것에 의지하는 자만 양백(兩白)에서 사람의 씨앗이 되어 살아남는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감록’에서 말세의 징조는 백의(白衣), 백월(白鉞), 백마(白馬), 백미(白眉), 백로(白老) 같은 흰색으로 표현된다.
또 전정운은 자기가 사람들을 구제하는 ‘정감록’의 ‘수염 없는 자’라고 주장했고, 갑진년인 1904년 3월에 조선 전역에 전란이 일어나면 다수의 사람이 사망하지만 자기가 있는 마양동으로 오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언의 실패로 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그의 심복 차달룡은 맞아 죽고, 친형 전정모는 자결했다.
1919년 음력 11월 21일 전정운은 사망했고, 1896년 5월 21일생인 차남 전용해가 1923년에 백도교를 백백교로 개칭했다. 그는 ‘정감록’의 “사람의 씨앗을 양백에서 구한다”는 말에서 ‘양백’은 인류를 구원하는 백백교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기는 신의 아들이지만 사람들을 불로장수의 나라인 영산(瀛山)으로 보내기 위해 잠시 인간 모습으로 빌려 이 땅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금강산은 8개인데 지금은 하나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말세에 영산, 즉 나머지 7개 금강산이 동해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도 말했다.
전용해는 물질문명의 현재 세계는 신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천부님(天父任)인 전정운의 명에 의해 자신이 신천주(新天主) 즉 ‘새로운 예수’로서 서양은 불로, 동양은 물로 심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물의 심판의 경우 199척의 눈이 내리고, 이 눈이 모두 녹으면 대홍수가 일어나 현재의 육지가 모두 바다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감록’에 따르면 평남 청천 이북의 땅은 마씨(馬氏)의 땅이 되고, 이곳에 거주하는 자는 모두 살해된다고도 주장했다.
말세에도 백백교 신자 8만 1000명은 교주의 신통력으로 이러한 재난에서 살아남아 동해의 영산으로 갈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전용해가 영산에서 왕위에 오르면, 교도는 모두 고위고관이 되어 안락한 생활을 하고, 나아가 인류가 모두 백백교를 믿으면 전용해가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그토록 하얀색을 탐닉하던 백백교는 1937년 살해 사건을 통해 결국 최악의 ‘검은 종교’가 되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77호 / 2025년 5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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