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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사지 안내판 교체, 종교 평화의 새 이정표

지난 15년간 주어사지 안내판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임을 일방적으로 표기하여 불교의 뿌리 깊은 역사를 외면해 왔다. 최근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장기간에 걸친 치열한 노력으로, 주어사지 안내판이 불교와 천주교의 공동 역사를 담은 새로운 형태로 교체됐다. 이는 불교 역사 바로 세우기임은 물론, 공직사회의 종교적 중립성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주어사(走魚寺)는 조선 후기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불교의 품 안에서 학문을 이어갔던, 한국 종교사에 드물게 두 종교가 한 공간을 역사적으로 공유한 곳이다. 그럼에도 2011년 안내판에는 오직 ‘한국 천주교 발상의 요람지’라는 문구만이 오롯이 남아 있어, 주어사지는 불교 역사 왜곡의 상징이 되어 왔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2021년 11월, 송탁 스님을 본부장으로 전국비구니회, 한국교수불자연합회 등 14개 단체는 ‘불교역사제자리찾기운동본부’를 발족했다. 현장 답사, 학술세미나는 물론, 각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매주 월요일, 수요일 저녁 비대면 줌(ZOOM) 학습을 통해 주어사지가 갖는 불교적 의미와 위상을 재조명했다. 2022년에는 불교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를 통해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음도 확인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비구니회는 2024년 4월 ‘종합안내판 수정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사료 검토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대안을 마련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주시청 문화예술과 공무원들의 태도이다. 담당자들은 불교·천주교 양측의 입장과 지역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겠다”는 원칙을 끝까지 견지했다.

새로운 주어사지 안내판은 ‘한국 천주교와 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라는 표현을 통해 양 종교의 공존과 화합의 역사적 진실을 담아냈다. ‘천주교 강학’이라는 표기는 ‘천주학 등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강학’으로 바뀌었다. 주어사지 안내판의 수정은 단순한 팻말 교체를 넘어, 종교 간 상생의 의미 있는 전형이 되었다.

하지만 주어사지의 사례처럼 역사 현장을 둘러싼 종교 성지화 갈등은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종로 일대, 서산 해미읍성 등 주요 공공영역에서도 하나의 종교적 시각만 강조하여 불필요한 종교·사회적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다. 종교 성지화는 역사적 사실이 다층적인 시각에서 기록되어야 하며, 화해와 공존이라는 관점 위에서 재조명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과제도 남겼다. 주어사지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해피엔딩은 서울 마포구 절두산 천주교 성당에 옮겨간 해운당대사 의징비(義澄碑)를 본래의 자리인 주어사 입구에 다시 옮겨 세우는 일이다. 여기에 한국불교와 천주교가 종교평화의 건축물을 조성하고, 2027년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하는 세계 젊은이들이 방문하도록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문화교류와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는 진정한 국제적 축제가 되는 길일 것이다.

주어사지 안내판 교체라는 작은 변화가 국내는 물론 세계로 퍼져나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하는 종교 화합의 거대한 강물이 되어 흐르길 기대한다. 여주시 공무원이 보여준 공명정대한 공직자상, 전국비구니회의 끈기 있는 열정,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을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의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종교적 리더십은 진정한 종교 평화와 국민 화합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이상훈 한국교수불자연합회장 대전대 교수 shlee0044@naver.com

[1787호 / 2025년 7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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