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기 불교계의 가장 큰 숙원 사업의 하나는 고등전문교육기관 설립이었다. 경전·주석 위주의 전통 교육에서 벗어나 불교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할 전문 인력이 절실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할 인재를 양성하는 해법도 전문교육기관에 있었다.
1906년 불교연구회가 설립한 명진학교는 최초의 근대적 불교학교였다. 비록 학교 이름과 학제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만해 스님을 비롯해 불교근대화를 견인한 인물들을 배출했고, 불교사범학교·불교고등강숙·불교중앙학림으로 이어졌다. 특히 중앙학림은 3·1운동 당시 학생들이 민족운동과 만세 시위의 전면에 나서며 불교와 사회를 연결하는 구심점이 됐다.
3·1운동 이후 젊은 승려들의 해외 유학과 사상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불교계 내부에서도 고등전문교육기관 설립 열망이 더욱 커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 불교전수학교를 중앙불교전문학교(이하 ‘중앙불전’)로 승격시킨 주역이 만암 스님이었다.
스님은 백양사 주지를 거쳐 중앙교단의 중요 직책을 맡으며 불교 교육행정 경험을 쌓았다. 조선불교 중앙종무원 학무부장과 교무원 교학부장을 역임해 전국 승려 교육을 총괄했고, 여러 차례 교단 개혁 논의에 참여하며 “교육이야말로 불교 중흥의 핵심”이라는 신념을 명확히 드러냈다.
1928년 4월 30일 만암 스님의 불교전수학교 교장 취임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스님의 원력과 역량이 제도적으로 실현될 시절인연이었다. 이날 개교한 불교전수학교는 1922년 중앙학림 휴교로 끊긴 불교 고등교육의 맥을 잇기 위한 결실이었다. 불교계는 1925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평의원회에서 ‘불교전문학교’ 설립을 결의하고 옛 중앙학림 부지를 불하받아 1927년 교사를 완공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중앙학림의 3·1운동 전력, 설립 목적의 포교사 양성, 재단 자산 60만원 등을 이유로 전문학교 인가를 불허하고 한 단계 낮은 ‘전수학교’만 승인했다. 당시 전문학교가 아니면 ‘각종학교’로 분류돼 진학·취업에 제약이 컸기에, 불교계는 정식 승격을 목표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기반으로 토대를 다져 갔다.
스님은 취임 직후 교수와 강사진을 새롭게 정비했다. 개교 당시 교원 구성은 교수 김영수·에다 토시오, 강사는 박한영·김법린·백성욱·윤태동·백우용·이희상이었고, 서무는 조학유였다. 개교 직후인 5월 28일 창립된 불전교우회 명예회원에는 이 교원진 다수가 참여했고, 홍명희·백윤화·유이청·도진호 등도 이름을 올렸다. 전직 교직원으로는 정인보·민부훈이 확인된다. 개교 초기부터 불교계와 학계의 중진이 폭넓게 포진했음을 알 수 있다.
교육과정 개편도 함께 이뤄졌다. 불교 교학과 경전 강독은 물론, 국어·역사·철학·과학 등 근대 학문을 함께 가르쳐 승려와 재가 청년이 더불어 배울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스님은 학교의 외연 확장에도 힘을 쏟았다. 불전교우회를 결성한 뒤 직접 회장을 맡아 학교 발전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다지며 학교 운영의 지속 가능성을 높였다. 또 학생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도록 전국 웅변대회·학술강연회·하계순강단을 조직해 활동할 수 있게 지원했다. 특히 교지 ‘일광(一光)’을 발간해 청년 불교인의 목소리를 담았고, 학교의 존재와 중요성을 알렸다. ‘일광’은 교지를 넘어 청년 불교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담론 공간이었다. ‘일광’ 창간호(1928년 12월 28일)에서 스님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지금 묘령의 나이인 그대들은 앞으로 우리 불교의 기둥이 될 인재이므로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온전한 모습을 갖추려면 옛것에 기대거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진리에서 세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론하고 어느 법이나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도 교화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세상과 출세간에 걸쳐 크게 자유자재함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 메시지는 불교 교육이 세간과 출세간을 아울러 작동해야 한다는 스님의 교육관을 압축한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해 세상과 소통하는 큰 불교인이 되라는 스님의 곡절한 가르침이었다.
학교의 위상이 높아졌음에도 전문학교의 승격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사립학교규칙’을 제정해 학교들을 엄격히 관리했고, 1930년에는 규정을 다시 손봐 재단법인 요건 등을 강화하며 문턱을 더 높였다. 총독부는 불교계의 독자적 교육 확장을 경계했다.
불교 내부에서도 전문학교 승격을 위한 40만원 증자와 재단법인 설립 등 까다로운 재정 부담이 있었다. 학문 방향을 둘러싼 논란도 컸다. 그러나 만암 스님은 특유의 원칙론과 강직함으로 내외부의 반대를 설득했다. 스님은 “온갖 사업 중 교육보다 중한 것은 없다(凡百施設中 人生要務 莫先於敎育也)”고 밝혔듯, 불교 발전의 길은 교육뿐임을 거듭 천명했다.
이런 노력과 의지들이 모여 불교계는 1929년 3월 27일 전국 사찰 모연으로 40만원 증자와 승격 추진을 공식 결의했고, 1930년 1월 8일 당국에 승격 신청서를 제출했다. 교직원들의 노력과 학생 동맹휴학, 교무원의 총독부 압박이 이어졌다.
1930년 4월 7일 마침내 중앙불전 승격 인가가 떨어졌다. 그달 25일에는 역사적 개교에 이르렀다. 불교계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근대 고등교육 체계의 실질적 출발점이었다.
중앙불전은 승격 직후 학제와 행정 등을 빠르게 체계화했다. 본과·특과·선과의 3개 과에 수업연한 3년, 정원 150명으로 운영됐고, 교육과정은 문과전문학교과정에 준해 불교학을 중심으로 일반교양 및 교직 과목까지 포함했다. 아울러 입학 자격을 승려에 한정하지 않고 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반 청년에게도 문호를 열어 인재 저변을 확대했다.
![만암 스님이 발간한 교지 ‘일광’. [동국대]](https://cdn.beopbo.com/news/photo/202509/331086_142165_3018.jpg)
선사이면서 교육자였던 만암 스님은 학생들의 생활·수행 지도를 병행하며 학문과 수행의 일치를 강조했다. 광성의숙 숙감(학감) 시절 학인들과 동고동락했었음을 감안하면, 중앙불전 재임기에도 강의에만 머물지 않고 학생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일광’ 설문 “조선 불교도는 어디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가”에 만암 스님은 “불교도는 먼저 본래 면목을 찾은 뒤 직책에 따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답했다. 교육과 수행을 통한 자기 정립과 시대적 역할을 강조한 원칙이었다.
만암 스님의 교육 활동은 제자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928년 불교전수학교 제1회 입학생은 모두 40명이었고, 강유문, 김용학, 김말봉, 김해윤, 문기석, 박봉석, 조명기, 박영희, 박윤진, 정재기, 주동훈, 최문석, 한성훈, 한영석 등이 포함됐다. 그중 24명이 1931년 3월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됐다. 학창 시절 이들은 불전교우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종교부·학예부·변론부·체육부 등 각 부서 간사와 회계 임원을 맡으며 학생 자치와 교우회 운영을 주도했다. 특히 1931년 2월 24일 제1회 졸업생들(졸업일은 3월 15일)이 ‘이구오팔회(二九五八會)’를 결성해 결속을 다지고 전법과 사회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만암 스님은 1931년 4월 22일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일제의 간섭과 불교계 내부 사정 등 요인이 겹쳤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관심까지 끊긴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 도서관 고문으로 추대돼 활동했으며,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중앙불전 이사장으로 학교를 지원했다.
만암 스님 퇴임 뒤에도 중앙불전은 성장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동국대로 계승·발전하며 수많은 불교학자와 사회 지도자를 배출했다. 오늘날 동국대의 위상은 근대 대학의 하나를 넘어 불교계 지성사를 지탱하는 뿌리로 평가된다.
만암 스님이 주도한 교육 개혁은 전통적인 교학 중심에서 벗어나 불교학을 근대 학문 분과 체계로 교육하는 시스템이었다. 불교의 지적인 사회 기반과 함께 불교청년들이 근현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이기도 했다.
1928~1931년은 만암 스님의 생애에서 한 단면일 수 있으나 스님이 세운 교육의 틀이 후대에 미친 파급력은 지대했다. 백양사에서 광성의숙으로 신식교육을 시작했던 젊은 숙감이 훗날 중앙불전 교장을 맡아 근대 불교 교육의 새 장을 열었던 것이다.
교육을 최우선시하던 만암 스님의 신념은 한국불교 교육의 나침반이었다. 또한 불교를 통해 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시대를 이끌 인재를 길러내려는 교육 이상의 실현이었다. 오늘 한국불교는 그 결실 위에 서 있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792호 / 2025년 9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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