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보성고보 학교 전경. 1924년 불교계 인수 이후 교육 사업의 상징이었으나, 재정난 속에 1935년 다른 재단에 넘겨졌다. [동국대 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https://cdn.beopbo.com/news/photo/202509/331206_142480_584.jpg)
1930년대 일제강점기, 불교계는 끊임없는 혼란과 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 종단 내부의 결속력 약화와 재정난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위축시켰고, 미래를 책임질 인재 양성마저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 교육기관의 운명을 둘러싼 갈등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보성고등보통학교(이하 보성고보) 인계 사태다.
이 사건의 최전선에는 “학교 인계는 불교계의 수치”라 외치며 끝까지 교육의 가치를 수호하려 했던 뚝심 있는 인물이 있었다. 백양사 주지 만암 스님이다. 스님이 전개한 보성고보 인계 반대운동은 단순한 경영권 문제를 넘어 불교계의 현실적 한계와 합의 형성의 난항을 여실히 보여줬다. 동시에 눈앞의 이익보다 불교의 백년대계를 지켜내려 했던 한 수행자의 확고한 신념을 후대에 각인시켰다.
보성고보는 대한제국 고위 관리였던 이용익이 1906년 설립한 보성중학교의 후신으로, 대표적 근대 민립 교육기관이었다. 경술국치 후 천도교로 경영권이 이전됐으나, 3·1운동으로 천도교 교단이 위기에 처하면서 운영의 한계에 부딪혔다.
이때 불교계가 인수의 적임자로 떠올랐다. 현대식 교육사업의 절실함을 자각한 불교계는 1923년 6월 조선불교계 통일기관인 총무원이 직접 나서서 천도교와 인수 계약을 맺었다. 다음 해 1월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운영 주체가 됐고, 교육사업을 핵심 과업으로 삼았다.
불교계의 의지는 투자 규모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인수 직후부터 매년 교육비로 2만여 원을 지출했으며, 1927년 4만6000여 원, 1928년 약 5만4000여 원으로 교육비 지출이 증가했다. 해마다 보성고보와 불교전수학교에 예산의 절반, 많게는 3분의 2를 투입했다. 학교 이전 공사에는 별도로 7만9000여 원을 투입했다. 당시 전임 교원 월급이 100원 안팎이던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가치로 연간 적게는 6~7억 원, 많게는 14~15억 원, 이전 공사비만 30억여 원에 이른다.
학교의 정체성도 차근차근 다듬어나갔다. 교무원은 초기 비간섭 기조를 유지했으나, 1926년 이후 운영 방침을 바꿔 학칙과 교육과정을 손보기 시작했다. 승려 교원을 단계적으로 배치하고, 가능한 선에서 불교적 정체성도 강화해나갔다. 그 결과 보성고보는 불교계 대표의 고등보통학교이자 불교 교육의 상징적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안정세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교무원의 재산은 각 본산의 기부금과 이자로 꾸려졌지만, 60만 원으로 설정한 교무원 기본재산 목표는 채워지지 못했다. 본산 분담금조차 제때 납부되지 않아 교무원 살림은 늘 적자였다. 여기에 1928년 불교전수학교(중앙불교전문학교 전신) 설립과 맞물려 교육비 부담이 더욱 가중됐다. 두 학교 동시 운영은 사실상 감당하기 어려웠다. 파국을 막지 못한 채 1933년 교무원 이사회는 보성고보의 외부 인계 또는 폐교까지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인계 대상으로 거론된 곳은 고계학원이었다. 강원도 철원의 부호 고계하가 별세한 뒤 후손들이 22만 원을 출연해 세운 재단법인으로,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이 이사장을 맡은 상당한 재정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 어떻게든 학교 운영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나선 것이 만암 스님이었다. 스님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중앙교무원 이사를 지내며 학교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불교전수학교를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만암 스님은 장성 백양사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다 보성고보의 운영권 인계 소식을 듣고 서울로 급히 올라왔다. 1934년 10월 31일 소집된 본산 주지회의에서 보성고보의 고계학원 인계 방침에 대해 스님은 단호히 반대했다. “우리 불교 측에서 경영할 힘도 뜻도 없다면 다른 좋은 재단에 넘기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재력이 없지 않은데도 경영권을 넘기려 한다면, 그것이 우리 종단의 공의가 아니라 일부 소수의 의견이라면, 첫째로 우리 불교계 전체의 수치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어쨌든 이 학교는 우리 손으로 완성해 가야 할 일”이라며 교육에 대한 종단의 책임을 강조했다.
만암 스님은 위기 속에서 실천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먼저 “설혹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서 전 조선 본산이 일치 못 한다고 하더라도 몇 군데 본산만 협력하면 재원은 염려 없다”며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이어 인계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규합했다. 만암 스님이 주지를 맡은 백양사를 비롯해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은해사, 대흥사, 법주사, 건봉사 등 8개 본산이 뜻을 모았다. 이들은 성명서와 책임서를 발표해 “보성고보를 미래가 다하도록 다른 기관에 넘기지 않겠으며, 종전보다 한층 내용을 충실케 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고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스님은 구체적인 재정 확보 방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재정난 해결을 위해 재단에 20만 원을 증자하자는 해결 방법을 모색해나갔다. 전국 31개 본산 주지들이 이 결의에 동참하자, 스님은 ‘증자 교섭위원’ 8명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각 본산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찰들의 형편이 녹록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스님이지만 교육기관 운영이 불교의 공익적인 책무를 다하는 일인 동시에 불교 중흥과 직결된다고 보았기에 학교의 매각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20만 원 증자에 따른 재단 납부금에 난색을 표명한 본산이 봉은사·전등사·송광사·김룡사·패엽사·영명사·월정사·동화사·위봉사 등 9곳에 달했다. 가부 회답이 없는 사찰은 봉선사, 마곡사, 보석사, 보현사, 석왕사 등 5곳, 교섭 중인 사찰은 용주사, 화엄사, 선암사, 기림사, 유점사, 귀주사 등 6곳이 있었고, 실제 납부는 고운사와 성불사 2곳에 그쳤다. 더욱 씁쓸한 사실은 반대운동의 주축이었던 백양사마저 재정이 궁핍했다는 점이다. 백양사는 1926년 원금 1만3730원을 마련하려고 토지를 저당 잡히고 연부상환을 약정했지만, 1934년까지 9년 동안 갚은 돈이 831원에 불과했다. 1935년 당시 백양사 미수금은 1만4000원에 달했다. 스님의 의지와 현실 사이엔 깊은 괴리가 있었다.
결국 만암 스님과 8개 본산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화된 재정 상황을 넘지는 못했다. 각 본산 분담금이 걷히지 않자 교무원은 1935년 3월 4일 제13회 평의원회 의결에 따라 9월 13일 고계학원에 정식 인계했다.
보성고보 인계 사태는 만암 스님에게 깊은 좌절을 안겼다. 끝까지 학교를 지켜내려 했던 스님의 노력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8개 본산과 함께 성명서를 발표하고 교무원 탈퇴까지 선언하며 분투했지만, 결국 보성고보는 다른 재단의 품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이 실패는 만암 스님을 불교의 미래를 고뇌하는 교육자이자 지도자로 기억하게 했다. “평생토록 처리해온 일은 공을 위해 온 힘을 다 쏟았을 따름”이라던 스님의 고백처럼, 공익을 늘 앞세운 교육자의 면모가 이 사건을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동시에 이 사건은 불교계에 근본적 성찰을 요구했다. 불교가 사회사업을 수행할 의지는 분명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재정적 역량과 시스템이 부족했다는 한계가 드러났다. 교무원은 1년 예산의 절반 이상을 교육사업에 투입할 정도로 의지를 보였지만, 각 본산의 분담금 납부 비협조와 안정적 수입원 확보 실패로 적자 운영을 면치 못했다. 근대적 재단법인 제도에 대한 스님들의 이해 부족과 교무원 간부진의 경험 미숙도 발목을 잡았다.
더 깊은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뿌리 깊은 갈등 구조였다. 증자 계획을 둘러싼 각 본산의 방관적 태도는 불교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뜻을 같이한다던 사찰들조차 실제 납부에 이르러서는 소극적이었다. 중앙 행정기구인 교무원과 지방 본산 간의 불신, 재단법인 교무원과 종회 간의 모순된 관계는 통합된 의사결정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애물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1930년대 교단의 혼란과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만암 스님은 이 쓰라린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해방 후 백양사 한글강습회를 개설하고, 호남지역 본사들과 협력해 정광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인재 양성에 더욱 매진했다. 보성고보를 지키지 못한 아픔은 오히려 스님이 불교 교육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교육 사업 없이 불교 중흥도 없다는 스님의 신념은 좌절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불교의 사회적 책임을 몸소 실천한 만암 스님의 모습이야말로 스님이 후세에 남긴 가장 귀한 교훈이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793호 / 2025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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