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출연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님이 “나이가 들면 왜 시간이 빨리 가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반백 년을 넘기면서부터 당연히 공감되는 이야기라 호기심이 생겨 몇 가지 이론을 찾아보았다.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는 ‘한 해가 인생에 차지하는 비율’로 시간의 체감 속도를 설명했다. 다섯 살에게 1년은 자신의 인생 전체의 20%이지만, 쉰 살에게는 단지 2%에 불과하다. 나이가 많을수록 각 해가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작아져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신경학적 측면에서는 뇌의 정보 처리 속도의 변화를 말한다. 젊을 때는 새로운 경험이 많고 뇌가 빠르게 정보를 처리해 ‘시간의 밀도’가 높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신경 처리 속도가 느려지고 익숙한 경험이 늘어나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의 수가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시간의 밀도’는 낮아지고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같은 하루라도 여행지에서 낯선 풍경과 사람을 만날 때는 길게 남지만, 집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낼 때는 금세 흘러가 버리는 이유다.
윌리엄 제임스는 시간을 ‘흐름’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으로 본다. 시계는 일정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한 시간은 순식간이고 몇 분은 한 세월처럼 길다. 시간의 체감은 물리적 간격이 아니라, 경험이 만든 주관적 인식의 흐름에 좌우된다. 곧 시간은 독립된 조건이 아니라 인식의 방식에 달려있다.
불교는 3차원 공간과 더불어 시간을 ‘마음의 인연 작용’으로 본다. 원효 스님의 말씀으로 알려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 십지품의 구절, “삼세일체제법 유심소조(三世一切諸法 唯心所造)”에서 나온다. 곧 과거·현재·미래 삼세의 모든 법은 마음이 짓는 바다. 시간 역시 실체가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나는 관계적 현상이다.
사실 시간에 대한 상대성은 거창한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어떤 신자는 기도에 몰입할 때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지만, 하루 전체로 보면 오히려 길게 남는다고 한다. 반대로 휴일에 TV만 보며 보냈을 때는 ‘하루가 아무것도 없이’ 금세 지나가 버린다. 시간의 절대성이 깨지는 경험이다. 이런 상대성은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에서도 관찰된다. 빛조차 탈출하지 못하는 중력의 경계, 인과적 연결이 끊어진 그 지점은 인간의 직선적 시간 개념에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던져 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은 시간은 무엇인가? 그러나 결국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관념마저 마음의 작용일 뿐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깊은 사유의 울림을 준다.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강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심은 씨앗이 자라는 밭과 같다. 시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인연을 짓는가에 따라 달리 담긴다.
결국 우리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행위를 했는가로 시간을 기억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얼마나 빠른가’가 아니라 ‘그 사이 무엇을 새롭게 배우고 어떻게 채워 가는가’일 것이다.
성진 스님 남양주 성관사 주지 sjkr07@gmail.com
[1795호 / 2025년 10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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