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에도 사찰령의 그림자와 일본불교의 영향이 교단을 지배했고, 자성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만암 스님은 이 현실을 “왜구가 물러간 후 강토를 회복해 건국의 기운이 농후하여 가는 중에 불교는 아직도 미혹의 구름에 가려 서광을 보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일제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용성 스님이 승려 결혼·육식 반대 건백서를 제출한 것 등 전통불교를 지키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방 후 정화의 필요성을 처음 공론화한 것은 만암 스님이었다. 식민지의 폐해를 딛고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과 정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촉발된 불교정화운동이 기혼승 축출이라는 급진적 방법을 택했던 것과 달리, 만암 스님은 해방 직후부터 수행을 기반으로 점진적이고 자립적이며 평화적인 정화를 주창했고 이를 실행했다.
스님의 정화는 응징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정법의 기치 아래 사부대중이 함께 정진하는 불교 공동체의 복원이었다. 교육자이자 종단 지도자로 오랜 세월 활동하며 지켜본 불교 현장의 복합적 현실에 기반한 것이었다.
정화의 필요성에 대한 만암 스님의 의식은 심각한 정체성 상실에서 출발했다. 스님은 일제에 의해 ‘조선 전통적인 형식과 정신이 사라진 것’과 ‘승규(僧規)가 왜구에게 피탈된 후’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답습되는 현실을 가장 통분할 일로 여겼다.
스님의 정화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철한 종조(宗祖) 의식이었다. 스님은 신라 말 이 땅에 최초로 선(禪)을 전한 도의 국사를 한국 선종의 시조라는 입장을 명확히 견지했고, 임제문손에서 태고 보우로 이어지는 법맥 인식 위에 섰다. 백양사 중창 때 도의영각을 세워 진영을 봉안하고 춘추향사를 올리도록 한 것도 그 실천이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승려대회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교단 집행부는 해방 이전 모든 활동을 청산대상으로 여기는 듯했고, 도의 국사와 태고 국사까지 배제했다. 만암 스님이 여러 차례 문제점을 지적했음에도 변화가 없었고, 스님의 절망감과 위기감도 깊어져 갔다. 이대로 가면 한국불교가 종지를 바꾸고 법통까지 바꾸는 극한 상황에 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는 스님이 끝내 기존 교단과의 절연을 선언하며 독자적인 정화 노선을 추진하게 만든 근본 동기가 됐다.
스님은 전통을 잇고 정통을 세워야 불교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보았다. 정화의 방법도 특정 세력을 징벌하는 일이 아니라, 불교의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이어야 했다. 정화의 목적을 정통 수호와 종통의 자주성 회복으로 천명하고, 방법은 급진보다 점진, 절단보다 분장과 교화로 잡았다.
스님이 기혼승 문제에 대해 온건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타협이 아니었다. 스님은 출가 이후 60여 년간 한국불교사의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스님의 활동을 직접 목격했다. 그중에는 결혼했지만 포교와 교육 현장, 각종 불사에서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불교를 위해 일하는 스님들이 있었다. 백양사가 운영한 70여 개소의 포교당에서도 수많은 기혼승이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펼쳤다. 고향을 떠나 제주와 부산 등 타지에서 포교당이 원활히 운영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았던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노고와 공헌을 무시하고 “계체(戒體)가 불완전하다”, “결혼했다” 등 이유로 사찰과 교단에서 축출하는 것이 과연 불교적일까. 만암 스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일제 치하라는 서러운 세월을 불교 중흥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함께 건너온 도반이며 제자들이었다. 이러한 의식이 만암 스님의 온건한 정화관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서적 기반이었다.
이는 스님이 남긴 추도시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950년 무렵 사제인 기룡 스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만암 스님은 애통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사숙 응운 스님의 효상좌였던 기룡 스님은 기혼승이 된 후에도 만암 스님이 백양사 원주를 맡겼던 신뢰하는 도반이었다.
“노사의 입적을 처음 듣고서/ 두 눈이 실명한 듯 캄캄하였네/ 서로 형이니 아우니 하던 같은 법려(法侶)로/ 잠시 이괘(離卦)와 태괘(兌卦)처럼 반생을 함께 보냈지/ 이런 처지에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았다면/ …필연코 애통한 생각 어떠했을까/ 칠십 평생을 돌이켜보니/ 부처와 조사 섬기는 데 여념이 없었네/ 뜨거운 정성은 젊어서부터 남보다 뛰어났고/ 평생 불탑을 호지(護持)하며 게으른 적 없었지…”)‘기룡노사의 입적을 듣고 읊음’ 중)
만암 스님은 용산(龍山)이라는 또 다른 기혼승의 이른 죽음을 애도하며 이렇게 썼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의 일상사이지만/ 누가 가히 그 가운데서 결연함 많았던가/ 오히려 늙은 부모와 어린 처자가 있으니/ 불귀의 객은 청춘이 되겠노라/ 타고난 몸 약해도 온정이 많았고/ 산사에서 부처님 의지했으니 훌륭하다고 일컬을 만하다….”(‘용산의 입적을 듣고 읊음’ 중)
이 시들에서 만암 스님은 기혼승을 “같은 법려”, 즉 동등한 불문의 동반자로 여겼다. 기혼 여부와 관계없이 “부처와 조사를 섬기는” 신앙의 진정성을 중시했다.
산중에서 정진에만 매진하는 선승들이 자칫 보지 못할 수 있는 ‘불교 현장의 복합적 현실’을 만암 스님은 잘 알고 있었다. 교학 연구와 승가 교육, 불교의식 전승, 포교 현장에서 쌓인 경험은, 배제보다 분장과 교화가 더 효율적이고 불교적이라는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스님이 인정에 휩쓸려 법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승가 구성을 냉정히 파악하고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스님은 기존의 사부대중에 호법중(護法衆)을 추가해 승려를 정법중(正法衆)과 호법중으로 구분하는 독창적인 5부중 체계를 고안했다. 결혼하지 않은 비구를 정법중으로 묶어 수행과 교학을 맡기고, 결혼한 스님들은 호법중으로서 포교와 행정, 대외사업을 맡겼다. 이를 통해 갈등을 줄이고 장점을 살리며, 화해와 회복의 시간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호법중에게는 제자를 받지 않도록 하는 완곡한 장치를 두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정법중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 삼보사찰부터 존경받는 스님을 추대해 모범도량으로 만든 후, 여타 사찰은 기회를 보며 점진적으로 본래 면목을 회복시키자는 단계적 접근도 제안했다.
스님이 ‘수행하면서 일한다’는 반선반농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것도 정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시주 의존을 줄이고 노동과 생산으로 자립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어려운 이웃에게 일거리를 나누고 함께 살림을 꾸렸다. 생산불교라는 말이 생소하던 시절, 사찰이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삶의 방식을 구상한 것이다.
정화의 주체와 대상도 따로 있지 않았다. 모든 대중이 정화의 주역이었으며, 수행과 노동을 통해 각각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화합의 승가공동체를 유지하고, 사회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만암 스님의 이러한 정화 설계는 ‘주체적 정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외부 권력에 기대기보다 불교의 청정성과 정통성을 스스로 되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계 상황을 철저히 파악한 후 나온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대안이었다. 즉 종조론과 법통 수호로 정통의 기둥을 세우고, 정법중과 호법중의 역할 분장으로 현실을 제도 안에서 해결하며, 반선반농의 자립 사찰 경제를 통해 천수백년간 이어온 승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같은 법려로 반생을 함께 보냈지”라는 기룡 스님을 그리며 남긴 만암 스님의 이 한 구절에 스님의 정화관이 온전히 담겨 있다. 배제와 단절이 아닌 포용과 상생으로 불교 공동체를 재건하려 했던 만암 스님의 꿈은 1948년 1월 18일(전년도 음력 12월 8일) 백양사 고불총림 건립으로 현실이 됐다. 스님이 구상했던 정화의 이상이 그곳 고불총림에서 구체적으로 꽃피기 시작했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800호 / 2025년 11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