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숙 작가의 산문집 ‘시절인연’은 환갑을 훌쩍 넘긴 한 인생이 걸어온 길을 “시절 인연의 주름”이라는 말로 되짚는 자전적 성찰이 담겨 있다. 작가는 사람과 자연, 법과 글을 통해 맺은 인연을 삶의 향기로운 법문으로 되살린다. 그의 문장은 한 생애의 주름마다 새겨진 인연의 깊이를 찬찬히 헤아리며, 존재의 근원을 되묻는다. 하여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세월이 남긴 흔적 속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새롭게 발견하는 수행의 기록이다.
작가는 자신을 향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사진 속 해맑은 어린아이와 거울 속 주름진 노년의 얼굴이 겹쳐질 때, 그는 가면처럼 덧씌워 온 세월을 벗겨내고 진짜 자신을 찾아 나선다. 주름은 단순한 노쇠의 징표가 아니라, 삶의 발자취이자 마음의 상처가 켜켜이 쌓여 남은 법문의 흔적이다. 그는 그 주름 속에서 사랑과 미움, 희망과 좌절이 교차했던 모든 만남의 의미를 되새기며, 인연 따라 스치거나 머물렀던 일들이 결국 삶을 물들이는 향기였음을 고백한다.
공직에서 30여 년을 보낸 저자는 퇴직 후 불법(佛法)을 만나며 “나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청계사 ‘마음 따라 향기 법문 순례단’의 단원으로 8년 동안 국내외 108사찰을 순례하며 “삶을 배우는 것은 큰일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렇게 세속의 경쟁과 욕망 속에서 ‘나’에 집착했던 삶을 돌이켜보며, 돌부처 앞에 무릎을 굽혀 “너를 부처로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한다. 그러자 비로소 세상은 눈부처의 시선으로 환히 열렸다.
‘시절인연’의 문장에는 세월의 고요한 울림이 있다. 작가는 노년의 담담한 시선으로 삶의 모순과 역설을 껴안는다. 고통이 지나가면 기쁨이 오고, 행복이 스러지면 다시 슬픔이 오는 것이 삶의 이치임을 깨닫는다. 그에게 인생은 ‘무상’과 ‘무아’의 실현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인연의 흐름 속에서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다.
‘시절인연’은 이처럼 노년의 작가가 인생의 결을 어루만지며 써 내려간 한 편의 수행록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이 남긴 주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연기의 향기를 새로이 피워내는 글을 통해 자신의 삶 또한 시절 인연으로 엮인 하나의 향기임을 깨닫는 계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801호 / 2025년 11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