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배, 한 배 정성으로 절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생전의 마지막 뉘우침과 참회의 눈물이 흘렀다. 잠시 살아계시는 동안이라도 보살핌을 다해 마지막 불씨를 조금이나마 연장할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무릎과 허리를 굽혔고 고개를 숙였다. ‘단 며칠만이라도 자식된 도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울먹임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움과 애절한 마음이 참회로 이어졌고 눈물로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땀방울과 섞여 내린 눈물은 온몸을 적셨고, 밤새 내 간절함은 계속 됐다. 수없이 무너져 내렸다. 몸이 무너질 때마다 번뇌 하나, 탐욕 하
제주가 시끄럽다.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 일어나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뉴스를 보면 볼수록 더해지는 잔혹 행위에 보는 사람이 공포심마저 느끼는 실정이다. 정말 미증유의 사건이다. 아직은 사건의 전말이 다 밝혀지지 않아서 누구라도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도 사람들은 놀란 마음을 진정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족보의 촌수를 공부하다 보면 참 합리적으로 짜였다는 생각이 든다. 구조적으로 그렇기도 하지만 부부는 무촌으로 되어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1촌이고 자식과 자식 사이가 2촌이다. 부부가 무촌인
전국어린이지도자연수회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돼 반갑습니다. 오늘의 강의 제목은 ‘지계 실천을 위한 다섯 가지 심리 법칙’입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없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린왕자’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4~5살 때부터 희미하게 기억이 생겨나면서 6~7살 즈음 되면 그때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남아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관찰할 때 이론에 앞서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어린이였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이론이 아니라
26대 진평왕(579~632)은 54년의 재위기간 중앙의 통치제도를 정비하고, 수·당과의 적극적 교류를 통해 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며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다. 진평왕의 왕권 안정은 내적으로 6부체제에서 양대세력이었던 탁부와 사탁부의 제휴에 성공함으로써 가능했다. 우선 진평왕이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던 25대 진지왕(576~579)의 아들 용수(춘)를 제치고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모후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 사탁부의 수장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딸
“발원하옵나니, 철석같이 단단한 마음으로 세세생생 무루선 닦아 크고 큰 지혜와 덕, 커다란 용맹심으로 만 겹 장애 만 겹 미혹 모두 녹아지이다.”(성철 스님 발원문 중)단풍이 한창 아름답고 울긋불긋 곱게 물들었던 가을의 백련암은 성철 스님의 자각의 향이 뿜어져 나오는 아늑하고 고즈넉한 산사다. 시절인연으로 만난 어느 지인의 소개로 가야산의 맑고 조용한 사찰에서 말로만 들었던 생애 첫 삼천배를 한 것은 2009년 11월의 어느 가을날이었고, 어느덧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성철 스님이 일갈하셨던 ‘절 돈 3000원’은 대가가 비쌌
촉촉이 비가 오는 날이다. 모처럼 한가하게 업무정리를 해볼까 하고 출근을 했더니 복지관이 난리가 났다. 방수공사 중이었는데 방수가 덜된 곳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직원들과 함께 물을 퍼내고 정리하고 업체 연락하여 조치를 하고 한숨 돌리는데 건강지원팀에서 프로그램 수료가 있으니 와달란다. ‘종로 정독행’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바르게 걷기를 하면서 종로의 문화유적 이곳저곳을 탐방하는 것이다. 참여하신 어르신들의 소감나누기와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동영상을 시청하였다. 어르신들 각자의 소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 한 어르신은 이 프로그램을
2017년 10월 이른 아침, 외국에서 근무하는 딸이 풍토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네팔의 오지, 열악한 지역에서 일 하던 딸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부모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인생의 가장 큰 위기 앞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극심한 고통을 안은 채 ‘법화경’을 펼쳤다. 간절한 심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 ‘법화경’ 한 구절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염려하지 마옵소서.…본국토에…편안히 돌아가시옵고….” ‘법화경’의 제6권 ‘촉루품’ 마지막 부분이었다. 보
오늘은 혜암 큰스님의 수행처를 답사하는 날로, 지리산 영원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영원사는 신라 영원 조사께서 창건 후 면면히 수행의 가풍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곳은 109명의 조실스님에 대한 기록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도량이었습니다. 영원사에는 훌륭한 강사스님들도 많이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순 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때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진 이후 석주 스님께서 상무주암에 계시다가 내려오셔서 복원을 하셨습니다. 그때는 길도 없었던지라 모두 스님들께서 직접 길을 내시고 지게로 짐을 옮기면서 복원을 하셨습니다.혜암 큰스님께서는 해
태안사 조실 청화(淸華·1924∼2003, ‘1종식·장좌불와 50년’ 실천한 선지식) 스님 앞에 섰다.(1997) 삼배를 올리니 맞절로 받으신다. 절을 마치고 말없이 앉았다. 납자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한 청화 스님이 한 마디 이른다.“자네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나?”윽! 턱 막힌 가슴의 좁은 틈 사이로 유년의 기억이 비집고 들어 왔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도시로 나가 살림을 차렸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날, 함께 길을 나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 뒷산으로 내달렸더랬다. ‘친구들은 아버지·어머니와
신라 중고기(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가 시작된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법흥왕의 아버지인 22대 지증마립간 4년(503)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지증마립간(500〜514)은 영토의 확장, 국명과 왕호의 개칭, 우경(牛耕)의 실시, 순장(殉葬)의 금지, 주군(州郡)의 설치 등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의 발전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즉위 4년10월 국명을 신라(新羅), 왕호를 ‘왕(王)’으로 확정하고, 왕 이외에는 아무도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한 것은 마립간시대를 마감하고, 뒤를 이은 법흥왕부터 이른바 불교식 왕명시대를 열게 한
불교는 내 삶에 저만치 떨어져 있는 종교였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멀게만 느낀 불교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친구를 통해서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절친한 친구가 어느 날 불교대학을 다니겠다고 했다. 단순히 절에 다니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보겠다는 친구 말에 단호함이 있었다. 엉겁결에 나도 함께 하겠노라 따라나섰다. 친구와 불교대학을 오가며 때론 부지런히 때론 쉬어가면서 1년 동안 불교공부를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공허한 메아리였다. 바쁜 일상 속에서 수행과 기도는 여전히 뒷전이었기 때문
해가 떠오를 때쯤, 포행을 나섭니다. 매일 매일 홀로 걷는 오솔길을 나름대로 명상길이라 이름 붙이고, 하루를 시작하는 첫 소일거리로 삼은 지가 한철이 지났습니다. 털모자를 쓰고 걸었던 길이 산철쭉과 진달래가 피어나는 봄이 됐습니다. 새색시 같은 연분홍과 붉은색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빛을 내며 꽃길을 만들었습니다. 꽃길을 걷는 저의 발걸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마냥 가벼워집니다. 경망스러운 듯해 발길을 눌러보지만, 어림없습니다.어느덧 봄날의 꽃잎이 지면 연두색 연한 잎들이 자그마한 아기 손을 내밀어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넓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