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입니까?”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 교학에서는 “부처님의 참 법신은 허공과 같다. 사물을 따라 형태를 나타내니 물 속에 어린 달과 같다”하였다. 한 스님이 협산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입니까?” “법신은 모습이 없다.” “어떤 것이 법안입니까?” “법안은 티가 없다.” 운문 스님의 “여섯으로도 알 수 없다”는 말을 두고 “6근으로는 법신을 볼 수 없다”한다면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이 법은 사량이나 분별로 헤아릴 수 없다”하였다.
Q: 간혹 수행을 하다가 귀신이 보이거나 귀신에 휘둘려서 정신분열이라던가 심리적으로 공포 등이 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A: 흔히 수행을 하다가 귀신이나 잡신에게 흐림을 당하거나 유혹되고 반하여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마음의 주파수가 귀신과 맞추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동굴이나 환경이 밝지 못하는 공간 같은 곳은 귀신들이 머무르기 좋은 환경인데, 그런 장소에서 기도한다거나 집중수행을 하면 귀신들도 자신들의 공간을 빼앗기게 되므로, 다른 사람이 내 집에 쳐들어오면 싸움을 하듯, 해침을 해 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소를 피해서 수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소가 어쩔 수 없는 곳이라면, 이럴 때는 자비를 베풀어서 스스로 이겨 내던가 의식을
한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물었다. “문수와 보현이 찾아올 때, 이(理)와 사(事)가 동시에 나타날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무소떼 속으로 달려가겠다.” “스님께서는 쏜살처럼 지옥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모두 그 무소떼의 덕분이지.” 어떤 스님이 취미 스님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없거든 말해주리라.” 취미 스님은 말을 마치고 밭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 스님이 말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주십시오.” 취미 스님은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이 대나무는 이처럼 크게 자랐고 저 대나무는 저처럼 작구나”라는 말에 스님은 크게 깨쳤다.
Q: 수행을 하다가 화나는 일이 생겼을 때, 하고 있는 수행의 주제가 사라져서 그만 더 화를 키우게 됩니다.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A: 화는 우리 모두를 고통에 빠지게 하고, 자기 목숨까지도 끊게 하는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마음먹고 계획을 세워 수행을 하던 도중, 화가 나서 수행의 연속성을 멈추게 되면, 그 때문에 화가 더욱 치밀어 올라서 그 전에 했던 수행이 그만 물거품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자칫 수행을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먼저 화내기 전과 화를 낼 때의 유익함과 손해를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심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알아차리는 순간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탐·진·치심을 알아차리는 순간 무(無)탐·진·치로 정화되어 있습니다. 다
왕태부가 초경사에 들어가 보니 스님들이 차를 내고 있었다. 이 때 명초와 함께 차 끓이는 그릇을 붙잡고 있던 낭상좌가 차 그릇을 뒤집어버렸다. 이를 본 태부가 상좌에게 물었다.“차 끓이는 화로 밑에 무엇이 있습니까?” 낭상좌가 말했다. “화로를 받는 신이 있습니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왜 차 그릇을 엎어버렸습니까?” “오랜 동안의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났습니다.” 이에 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나갔다. 명초가 말했다. “낭상좌는 초경사의 밥을 먹고도 도리어 강 건너편에 떼지어 시끄럽구나.” “스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귀신에게 당했다.” 이에 설두 스님이 말했다. “명초가 말을 하자마자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
Q: 얼마나 수행을 해야만 깨 칠 수 있을까요? A: 수행을 하고자 하는 환희로운 마음으로 수행에 입문한 때로부터 완전하게 깨달을 때까지 항상 정진에 의지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앞서 가는 사람만 쳐다보면서 조급증만 내는 것은 욕심을 하나 더 보태는 격입니다. 무리하게 하다가 상기되어 건강을 해쳐서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금생에 열심히 정진하여 내생이나 그 다음 생, 아니면 언젠가는 부처님처럼 일체지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으로 차근차근 노력을 해가야 합니다. 모든 공부들이 정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꾸준한 자기점검과 노력만이 진보가 있을 뿐입니다. 하루 일과는 좌선할 때와 쉴 때 두 가지로 나뉘며, 신(身)·구(口)·의(意)로 인한 모든 행
운문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가 왔느냐?” “서선사에서 왔습니다.” “서선사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가?” 스님이 이에 양손을 벌려 보였다. 운문 스님이 이를 보고 한 차례 뺨을 후려졌다. 이에 스님이 말했다. “제게도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운문 스님이 두 손을 펴 보였다 스님이 이에 말이 없자 운문 스님이 또 한 번 후려쳤다. 송(頌) 일시에 호랑이 머리와 꼬리를 잡으니 늠름한 위엄이 4백 고을에 떨친다. 묻노니 어쩌면 그처럼 준엄한가! 설두 스님은 “한 번 용서해주노라”고 했다.
Q : 앉아서 수행을 하려고만 하면 망상이 스크린이 지나가듯 계속 나타나서 오히려 번뇌가 더 늘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A :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고 그로 인하여 망상이 확대되면서, 마음속이 심한 산란심으로 괴로울 때는, 수행을 하기 전에 멋대로 방일하면서 살았던 결과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떠올려야 하며, 알아차리는 순간, 그 흐름을 멈추도록 정복해야만 합니다. 정신없이 헤매고 다닐 때도 망상이 무수히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겼다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강한 바깥의 경계에 이끌려 감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고요히 앉아서 수행의 대상에 집중을 해 가다보면,
연화봉 암주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물었다. “옛 사람들은 어째서 여기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는가?” 대중들이 아무 대답이 없자 그들을 대신해 말했다. “그들이 가는 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궁극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시 스스로 대답했다. “주장자 비껴든 채 사람들도 돌아보지 않고 천봉만학의 첩첩산중으로 들어간다.” 다음 송에 귀를 기울여 보라. 눈 속에는 티끌, 귀 속에는 흙이 가득하니/ 첩첩한 천만 봉우리에도 머물려 하지 않네./ 꽃은 지고 물은 흘러서 아득하기만 한데/ 눈썹 치켜뜨고 찾아보지만 어디로 갔는지./
Q: 주력수행을 왜 해야 하나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A: 모든 번뇌는 자신을 집착함에 의해서 탐, 진, 치, 아만, 의심 등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업을 쌓게 되며, 그것이 윤회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오독(五毒)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아집의 무지함’에 대한 치료제인 ‘무아(無我)’를 깨닫는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번뇌를 없애는 만병통치약은 ‘무아를 깨닫는 지혜’라고 합니다. 무아를 바르게 깨우치고자 할 때는 선정(禪定)을 이루어야 합니다. 산란함이 없이 선정이 깊어지는 방편으로는 계(戒)를 지키면서, 아집의 치료제인 공성을 깨달아 지혜를 갖추는데,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때문에 심신을 잘 길들여져서 언제든지 선정에
삼평(三平) 스님이 석공(石鞏) 스님을 참방하자, 석공 스님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활 당기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화살을 보아라.” 이에 삼평 스님이 가슴을 열어 제치며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화살입니까? 살리는 화살입니까?” 석공 스님이 활 시위를 세 번 튕기자, 삼평 스님이 문득 절을 올리니 석공이 말했다. “30년 동안 활 한 개와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반쪽 성인을 쏠 수 있었다.” 삼평 스님이 후에 태전 스님에게 이를 말하자 태전 스님이 말했다. “사람을 살리는 화살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상대를 분별했겠는가?” 삼평 스님이 말이 없자 태전 스님이 다시 말했다. “30년 뒤에 이 화두를 남에게 전해주려 해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Q : 본래 부처라면 어찌하여 중생이 되었나요? A : 본래성불(本來成佛)은 선불교(禪佛敎)의 중요한 핵심 사항입니다. 이 본래 성불 사상은 선불교에서 창안된 말이 아니고 대승불교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뿐입니다. 즉 부처님은 『원각경』 등에서 ‘중생은 원래 부처를 이루었느니라(始知衆生 本來成佛)’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은 중생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내부에 있는 사람의 심성이 곧 부처의 심성이기 때문에 부처의 심성과 중생의 심성이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심성은 본래 형체가 없기 때문에 때묻지 않은 성품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부처의 심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천연성품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
나옹 선사가 중국 법원사에 주석하던 지공선사를 만났다. 지공 선사가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누가 그대를 여기 오라 했는가?” “고려에서 혜근이 스스로 왔습니다.” 시절인연이 닿을 무렵 지공이 또다시 나옹 선사에게 물었다. “하늘의 해와 땅의 조사를 모두 다 쳐부수는 그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엇인가?” “안팎이 다 붉습니다.” 순간 나옹 선사는 천지대각을 이루며 송했다. “허공을 싸안고 그림자와 형체 뛰어나고/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몸은 항상 깨끗하다/ 눈 앞의 참 경개(景槪)를 누가 능히 헤아리리/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달이 밝도다
Q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란 무엇인가요? A :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말은 깨닫는 순간 닦는 것도 마친다는 말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깨닫기는 하였으나 더 닦아서 완벽하게 해야 할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나라 때 화엄의 대가였던 청량 스님과 그 제자인 규봉 스님이 한 말입니다. 규봉 스님은 한 때 선사를 모시고 짧게 수행한 적은 있었으나 그후 『원각경』을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평생 『원각경』과 『화엄경』을 연구하고 강의한 교학자였습니다. 그런 규봉 스님이 『화엄경』의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논리에 맞추어 깨달음에 대하여 돈점이론을 전개한 것이므로 돈오돈수나 돈오점수 등은 교가(敎家)에는 해당되겠으나 선가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론입니다. 규봉 스님은 수행하여 깨닫는 데에는
현사 스님이 대중 법문을 했다. “총림 노스님들이 사람을 제접 한다고 하는데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맞이하겠는가? 봉사에게 백추(白鎚)를 잡고 불자(拂子)를 곧추세워도 그는 보지 못하며, 귀머거리는 일체의 어언삼매(語言三昧)도 듣지 못하며, 벙어리에게는 말을 시켜도 하지 못한다. 이들을 제접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 한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운문 스님이 말했다. “절 좀 해봐라.” 스님이 절을 올리고 일어나자 운문 스님이 주장자로 밀쳐버리니 스님이 뒷걸음쳤다. 이때 운문 스님이 말했다. “너는 눈멀지 않았구나.” 다시 그를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니 스님이 다가왔다. 이 때 운문 스님이 말했다. “귀머거리는 아니군
Q : 중도(中道)란 무엇입니까? A : 불교에서는 중도(中道)의 도(道)를 도라고 말합니다. 중(中)은 적중(的中)하다의 중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중도는 ‘가장 적합한 도’ 혹은 모든 것의 ‘중앙이 되는 도’ 라는 뜻입니다. 중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의미나 행동을 벗어나서 있습니다. 즉 생이 있다, 죽음이 있다, 더러움이 있다, 깨끗함이 있다, 부귀가 있다, 가난이 있다, 무와 유, 공과 색, 성인과 범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등의 의미에 속하지 않는 것이 도입니다. 중도는 허공과 같이 투명하므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나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주 스님은 『돈오입도요문론』에서 중도는 가(邊)라고 하였습니다. ‘가(邊)는 가운데(中)를 말미암아 서고 가운데(中)는 가(邊)로
수산 화상이 죽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만약 이것을 죽비라 부르면 죽비라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되어 속박되는 것이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죽비라는 사실에 위배된다. 이것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귀성(歸省) 스님이 수산 스님의 손에서 죽비를 빼앗아 땅위에 내던졌다. 수산 스님은 이에 “눈이 멀었다.”며 호통쳤다. 귀성 스님은 이에 한 소식 얻었다. 광혜원련 선사가 이를 평했다. “당나귀 같은 귀성은 깨닫기는 깨달았다. 그러나 아직 수산화상의 의지를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본래면목의 경지서 체득해야 한다. 알음알이 분별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직 의심이 남아 있으리라.” 무문 스님이 평했다. “죽비라 말을 해도 안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안 된다. 이 두 경계를 초월해
Q : 깨달은 사람은 업보를 받지 않나요? A : 흔히 말하길 불교는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실제 부처님이나 옛 선사들은 깨달으면 생사윤회를 벗어난다고 누차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깨달은 사람들은 과연 전생 업보를 받지 않을까 하는 것도 궁금한 사항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하자면 ‘깨달은 사람들은 업보를 받지 않는다’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생에 한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전생에 지은 업보가 금생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미래에는 윤회하지 않으므로 업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의 몸과 환경은 이미 전생의 어떤 행위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라 하여도 업보를 받습니다.
한 스님이 조산 스님에게 물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도 도를 알지 못하니, 내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하였는데 어떤 것이 부처님이 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처 경계에는 안다 할 것이 없다.” 이 때 석문(石門)스님이 말했다. “더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어떤 것이 내 스스로 수행하는 것입니까?” “위로 향하는 일에는 일이 없다” “그것뿐입니까, 아니면 별다른 도리가 있습니까?” “그것뿐이라 한들 누가 어찌하겠는가?”
Q :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요? A : 우주는 물질(色)과 빔(空)이라는 두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물질은 해와 달과 별과 지구 등입니다. 빔은 그 별들이 의지하고 있는 텅 빈 공간입니다. 물체와 빔은 서로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의 성품입니다. 빔에서 만물이 나왔습니다. 만물은 빔의 자식이면서 빔의 표현입니다. 빔은 뿌리이고 만물은 뿌리를 의지하여 서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빔은 우주의 근원입니다. 만물은 빔에서 태어나 다시 빔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약 6000만년 전 신생대 이후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흔적을 보이기 시작한 이래 지구는 많은 변화와 함께 진화를 거듭하였습니다. 이중 사람도 육체와 함께 정신도 수없는 변화를 겪었을 것입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