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수다원이 성취될 때 생긴다. 왜냐하면 부처님 궁극의 가르침인 열반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열반을 경험하지 못한 일반 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본인의 성취 수준으로만 믿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에 대해 더 많이 느낀다. 나도 처음 이 공부 시작할 때 가르침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부를 하면서 절실히 알았다. 불교의 믿음이란 맹목적 믿음이 아닌 가르침을 수행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머니께서 불자라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절에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와 절에 같이 가면 어머니는 “나와 관세음보살님이 인연이 많다”고 하시면서 불상에 절을 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다른 종교에도 관심이 생겨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되돌아보니 내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어릴 적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음이었다.답을 찾고자 한 이유는 엄격하셨던 부모님께서 바른 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자주 주셨기 때문이다. 내면 속
수행을 시작하고 힘들었던 것은 잠이다. 쏟아지는 잠이 대비주 수행을 방해했다. 수행 전에는 몸이 아파 누워지내니 그랬다지만 몸이 회복되고 나서도 야속하리만큼 잠이 쏟아졌다. 마음은 대비주 한 독이라도 더 하고 싶은데 잠이 나를 계속 재웠다. 또 다른 하나는 무력감이었다. 몸이 아프니 세상살이와 사람들이 싫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룹상담을 받았는데 ‘무력증’이라고 했다. 대비주 수행을 하며 무력감의 원인을 알게됐다. 직장생활 당시 주변에 일을 잘하거나 승진하는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속마음엔 그 사람의 단점
“건희주 불자님, 깊은 잠재의식까지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 자성불 찾기 수련이 있어요.”2017년 7월 강화 보문사에서 봉사하며 인연이 된 도반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자성’이란 단어가 훅 들어 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불자로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현실도 마음도 무척 힘들었던 때였다. 2017년 7월 25일. 문자 한 통의 인연으로 덕양선원에 처음 방문한 날이다. ‘7일7야 자성불 수행’이 봉행되고 있었고 둘째 날이라고 했다. 오전 9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수행하고 이후의 나머지 시간
이렇게 폐쇄적인 나를 열어준 건 봉화사 밥심인 것 같다. 새벽이고 밤이고 봉화사에 들어가면 첫마디가 “오느라 고생했어요. 밥 먹게 어서와요”다. 사회에선 느낄 수 없는 친절과 환한 미소. “먼 길 오는 사람도 있는데 기다리는 건 암시랑토 안 해”라고 말하는 사무장님은 한결같이 사랑 가득한 마음을 내어주시는 따뜻한 분이다. 나에게 봉화사 공양은 엄마밥이다.마음을 내며 다니던 즈음 하동 봉화사엔 부처님 봉안식과 주지스님의 1000일기도 회향식, 부처님오신날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있었다. 부처님 봉안식은 내생애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를
코로나19는 우리 삶을 참 많이 바꾸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장기화됐고,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고, 삶이 비대면을 요구하게 되었다. 절에서 기도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그래서 주지스님은 ‘동안거 100일 기도’를 ‘봉화사 밴드’에 올려주시기로 하셨다. 원래 간단한 봉화사 소식과 주지스님이 법문해주시는 작은 소통창구였는데 ‘라이브 새벽명상기도’를 시작해주신 거다. 집에서 멀어 자주 가보지도 못하면서 내려갈 수 없다니 동안거 기도가 얼마나 애틋했을까. 나에게 라이브방송은 큰 선물과도 같았다. 사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곳으로 자칫 사람보다 다른 것에 포커싱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은 자기문제 해결이 먼저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해, ‘일상과 세상이 수행장이고 해탈장’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말씀을 되새기며 우선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 유형별로 정리했다. 예를 들면, 싫은 동료, 불편한 사람을 만났을 때는 더 많이 미소를 보냈다. 탐심이 올라올 때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안하기를 바라며 자애명상으로 사라지게 했다. 업무로 힘들 때는 재밌다, 행복하다, 잘 된다 등 긍
나는 30년째 IT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입사 초기, 아시아의 작은 기업에서 지금의 세계적인 IT 기업이 될 때까지. 단 한 번의 이직도 없이 30년 동안 회사의 급격한 성장을 함께하며 오로지 일에만 보람과 가치를 부여하면서 열심히 달려왔다.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점검하지 않으면 오래 사용하지 못하듯 사람도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신체와 마음에서 신호를 보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했기에, 몸은 퇴근해 집에 있지만 마음은 늘 회사일을 생각했다. 이렇게 수 십 년을 쉬지 않고 일한 결과, 에너지가 조금씩 방
아이들에 대한 내 마음이 얼마나 욕심으로 가득 찼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내 눈치를 보면서 힘들게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둘째아이와의 관계가 수행을 이어가는 어느 날 새벽 눈물과 함께 녹아내렸다. 대비주를 하는데 둘째 아이의 애처로운 모습이 느껴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내 생각, 내 의견만이 옳고 어린 너희들은 오로지 내 말만 들어라 하는 아만심에 힘들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애써도 안 되던 것이 한 순간에 녹는 느낌이었다. 시절인연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짐을
‘엄마가 대비주수행을 해서 정말 다행이다.’얼마 전 큰 딸이 나에게 무심히 건넨 말이다. 아이의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아이들을 힘들게 했던 우리 엄마가 달라져서 고맙고, 아빠의 심신이 힘들어 우리 집에 위기가 왔을 때 수행의 힘으로 잘 극복해줘서 다행이라는 안심의 의미도 담겨있다. 아이의 이 말을 들으며 지나온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대비주수행, 신묘장구대다라니수행을 만난 것은 2009년이다. 그해 봄 과로로 어지러워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오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어쩌다 몸이 이렇게 되었을
나에게는 주로 해가 진 이후의 저녁 시간이 가장 수행하기 좋은 때다. 아침이 다소 바쁘고 어수선하다면 저녁 시간은 불교TV를 틀고 저녁예불을 올린 뒤 수행에 몰입할 수 있는 덕분이다. 가능하면 집에서도 21일 기도, 100일 기도 등 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에 실천할 한 가지 또는 두 가지의 수행 방법을 정해서 수행을 지속했다. 매주 일요일이 초하루 또는 지장재일이 되면 절에 가서 스님의 법문도 듣고 기도를 한다.최근에는 동지기도를 회향했다. 이번 동지기도 기간에는 매일 아파트 주위를 걸으며 광명진언 108독과 츰부다라니 54독을 염
어느덧 2020년 경자년도 저물어가고 있다. 길 위를 구르는 낙엽이 바람에 쫓겨 다니듯 당황스럽고, 아무도 따지 않아 가지 위에서 메말라 가는 붉은 감도 안쓰럽지만 뜨거움이 식어 가는 늦가을의 저녁 햇살은 더욱 애잔하다.연초부터 전 세계를 지배하는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변하고 국가들은 서로 문을 걸어 잠궜다. 그로 인해 경제는 추락하고 사회는 피폐해져 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아파하고 죽어 가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지하철 안에서, 식당 안에서, 공원에서도 성능 좋은 마스크로 꽁꽁 무장한 채 서로를 감시하고 믿지
그때 발견했다. 대승경전의 핵심 사상이 담긴 ‘금강경’을 수없이 읽고 독송하면서도 정작 보살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지 못했고 실천은 더욱 먼발치의 일이었다. 이렇게 가족과의 오해로 속상해하는 ‘아상(我相)’을 아들 앞에서 울먹이며 발견했으니 스스로 어이없고 한심하기도 했지만, 가슴 깊은 곳이 시원해진 기분이었다.마음이 진정되고 나서야 아들에게 차근차근 물었다. “인우야, 엄마가 아빠에게 필요 없는 사람 같니? 엄마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들과 미소 지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는 아들이 소
불교에 귀의하여 몇십 년 동안 절에 다녔다. 혜원 스님께서 울산 해남사 주지로 오신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불교대학에 다니며 스님의 가르침을 더 깊게 접할 수 있었다. 불교 공부를 거듭할수록 포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용기를 내 스님께 “공부해서 포교사 시험을 보고 싶어요” 하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스님께서 내게 먼저 포교사보다는 기도를 꾸준히 해볼 것을 권하셨다.그때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기도가 부족한 것인지, 포교사의 길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의미인지 모른 채 그냥 기도만 하며 지냈다. 절에 같이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공양 뒷바라지가 필요할 때면 가끔 봉화사 다니기를 지속했다. 그러던 중 철야 염불수행정진에 동참할 기회가 생겼다.오롯이 스님과 함께 늦은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하는 염불수행. ‘자비염불송’을 따라 하고 손뼉을 치고 포행 하기도 하면서 지속하는 명상과 108배 정진…. 밤새며 하는 철야기도였지만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았다. 기도 후 소감을 발표하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왜일까….법당을 나서며 스님께 여쭈었다. 보통 큰법당에는 ‘대웅전’이라는 현판을 거는데 봉화사는 왜 ‘나무아미타불’이 걸
어려서 할머니 손을 잡고 다녔던 곳이 동네에서 좀 떨어진 작은 절이었다. 쪽진머리를 곱게 빗어 올리시고 가장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하얀 고무신 닦아 탈탈 털어 신고 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내겐 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불교는 나에게 당연함이었다.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엄마와 함께 절을 다녔는데 딱히 좋은 줄 몰랐다. 예전엔 그랬다. 때가 되면 기도하고 보시하고 부적을 챙겨오는 일, 그게 전부였다.하지만 어린 시절 할머니의 숙연이 있어서였을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일, 저일로 마음이 힘들어지면서 찾은 곳은
그러던 중 우연히 대화를 나누던 홍법사 템플스테이 담당스님이 북으로 스트레스 풀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고 하셨다. 마침 국악 강사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템플스테이에서도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려서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으니 주어진 소임이라고 생각하며 절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이어서 어린이불교학교 지도교사를 맡았다. 처음 어린이법회를 진행할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멎을 것 같다. 마이크를 잡고 뭐라고 이야기를 해
결혼을 한 후 바쁘게 일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자궁경부무력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입원을 하고 아이를 어떻게든 지켜보자고 많이 노력했지만 결국 아이를 잃고 말았다.무엇이 부족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자책과 속상함 등 여러 감정으로 힘들었다. 그러다 신랑이 근무하는 부대의 절에 가게 되었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부처님오신날 가서 놀던 기억, 개인적으로 국악을 전공한 인연으로 대학교 뒤 절에서 부처님오신날 맞이 공연을 한 기억 외에는 불교는 내게 그렇게 특별한 종교가 아니었다.하지만 그 작은 계기도
부모가 자신의 욕심과 집착으로 아이를 이끈다면 결국 아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이도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곧 행복한 길이며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아마 아이를 위한 대학입시기도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때 그 간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기회가 있었을까…. 물론 입시기도 그 이전에도 사찰에서 하는 기도에 지속적으로 동참해왔다. 하지만 단순히 기도와 법회에 동참하는 것과 누군가를 위
지금부터 6~7년 전 즈음 큰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부산 해운대 대광명사에 다니고 있던 나는 마침 수능시험 100일 기도 입재 법회에 동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3 수험생 자녀를 둔 학부모님들과 같이 수능기도에 동참한 기억이 있다.그 당시에는 극락보전에 모여 스님의 집전 하에 매일 ‘나를 깨우는 108배’와 츰부다라니 108독 기도를 했다. 이 기도가 나에게는 다음 해에 고3 수험생이 되는 큰아이를 위한 기도였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좀 더 기도에 익숙해질 수 있는가, 이 생각으로 동참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