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란쌍왕국과 불교의 전래
2. 란쌍왕국과 불교의 전래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9.01.28 15:27
  • 호수 14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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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서 전래된 불교, 왕국의 수도 ‘프라방의 도시’로 만들다

14세기 파 응움왕이 건국
신심 깊은 앙코르 왕비의
불교 도입 요청 받아들여
상좌부불교 삼장·불상 전래
앙코르서 이운해오던 불상
비엔티엔에 봉안한 전설엔
토착신앙·세력 저항 엿보여
16세기 쎄타티랏 천도하며
옛 수도 ‘루앙프라방’ 불려
14세기 앙코르왕국에서 전래된 불상 ‘프라방'은 지금도 라오스불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란쌍왕국의 수도였던 루앙프라방의 왕궁 내에 자리하고 있는 전각 ‘호파방’은 프라방 불상이 봉안된 곳으로 지금도 라오스 최고의 성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파방’은 ‘프라방’의 라오스식 발음이다.

라오스를 대표하는 두 곳의 도시는 수도 비엔티엔과 옛 수도 루앙프라방이다. 라오스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위엥짠과 루앙파방이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발음은 프랑스식민지배시기의 흔적이다. 도시의 이름은 국가의 흥망과 지배권력의 흔적을 담고 있다. 불교의 전래와 확산의 자취도 이름 속에 담겨있다.

헌법이 밝히고 있듯 라오스 역사는 14세기 파 응움(Fa Ngum) 왕이 건립한 란쌍왕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란쌍은 라오족이 건국한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란쌍 건국 전 라오스지역에는 ‘므엉’이라 불리는 마을 단위 지배권이 형성돼 있었다. 대부분 산악지대였던 라오스에서 므엉은 도시국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중앙집권국가인 란쌍이 건국된 후에도 므엉은 한동안 지방호족과 같은 지배력을 행사했다. 메콩강에 인접해 있던 비엔티엔과 루앙프라방 지역에서는 비교적 세력이 큰 므엉이 형성됐다. 베트남 역사에는 ‘반 뜨엉’이라는 므엉이 11세기 중반 베트남의 리 왕조와 교류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1404년에는 ‘남 쯔엉’이라는 므엉에서 중국에 시절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반 뜨엉은 지금의 비엔티엔, 남 쯔엉은 루앙프라방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들 므엉을 중심으로 14세기 통일국가가 등장한다. 

최초의 통일국가 란쌍은 루앙프라방의 옛 지명인 씨엥동씨엥통에 위치하고 있던 므엉 수아의 왕자 파 응움(1316~ 1373)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라오스는 인접한 수코타이왕국(태국)과 앙코르왕국(캄보디아), 그리고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한 아유타야왕국(태국)의 대립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파 응움은 여기에 겹친 왕실 내부의 권력다툼을 피해 앙코르왕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앙코르의 공주와 결혼한 파 응움은 장군으로 성장해 아유타야와 대적하며 메콩강 중부를 정복해 나간다. 북진을 거듭하며 세력을 넓힌 파 응움은 마침내 자신의 고향인 므엉 수아로 귀환해 1353년 란쌍왕국을 건립한다. ‘란쌍’은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으로 ‘코끼리가 수없이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마도 인접해 있던 태국 북부 란나왕국의 ‘쌀이 수없이 많다’라는 뜻과 대비된 이름일 것이다. 파 응움은 라오족을 규합해 란쌍왕국을 세웠지만 앙코르왕의 사위이자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앙코르의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란쌍왕국에도 작용했다. 특히 앙코르의 공주였던 왕비 케오 켕 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파 응움은 왕비의 요청에 따라 앙코르왕국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최초의 불교전래는 아니다. 인도차이나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왕의 전법에 의해서다. 아쇼카왕의 전법사인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수완나부미’ 즉 ‘황금의 나라’로 불렸던 지역이 바로 지금의 인도차이나반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수완나부미가 구체적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어느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얀마, 타이, 말레이반도, 수마트라 혹은 라오스를 지칭한다는 각국의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황금의 나라’가 뜻하는 것이 황금색을 띄는 ‘벼’라는 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어찌되었든 인도차이나반도에 전래된 불교가 라오스지역에도 알려졌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물론 뚜렷한 자료는 없다. 인접 국가에 모두 불교가 전해졌으니 라오스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산악이 대부분인 라오스지역에는 토착신앙인 ‘피(Phi)’신앙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집권세력의 등장도 14세기 란쌍왕국이 처음이다. 불교의 확산과 정착도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해진 이유다.

독실한 불자였던 왕비는 희생제를 금지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라는 자신의 요청을 국왕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앙코르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든든한 친정을 둔 왕비의 영향력이 꽤나 컸음이다. 파 응움은 왕비의 요청을 받아들여 피신앙의 희생제를 중단시키고 스님들을 보내줄 것을 앙코르왕국에 요청했다. 앙코르에서는 20여명의 스님과 함께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을 란쌍왕국으로 파견했다. 이때 파견단을 이끈 이는 스리랑카 출신의 마하 텝 랑카 스님이었다. 스리랑카에 전통을 둔 상좌부불교가 라오스에 뿌리내린 이유다.

호파방에 봉안돼 있는 ‘프라방’ 불상은 촬영이 엄격히 금지된다. 사진은 ‘프라방' 불상을 모델로 제작된 라오스 우표.

불교는 국민들을 사상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인 동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높이는 근거였다. 특히 불상은 왕실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상징이었다. 앙코르에서는 스님들과 기술자를 파견하며 상좌부불교의 삼장과 함께 불상을 전했다. 스리랑카로부터 전해져 앙코르에서도 국가의 보물로 여겨지던 ‘프라방’ 불상이었다. 란쌍왕국에 도착한 이 불상을 국왕은 국민통합의 구심점, 불교의 권위와 통치권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다. 대대적인 이운식이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비엔티엔을 지날 무렵, 불상은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이다. 북쪽의 수도 씨엥동씨엥통으로 이운해야할 프라방이 땅에 붙어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다. 왕은 “부처님이 이곳에 머무시길 바란다”며 비엔티엔에 사원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다. 하지만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당나라 문성공주가 장안에서부터 모시고 왔던 불상이 토번왕국 입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는 전설처럼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토착신앙, 즉 기득권 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권위의 구심점을 삼고 싶었던 왕의 바람이 그리 쉽게 성사되지 않았음이다. 파 응움에 대한 이후의 기록도 이 같은 추정을 가능케 한다. 파 응움은 계속되는 정복전쟁에 국민들을 동원했고 지나치게 여색을 탐해 신하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왕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국왕은 꾸준히 영토를 확장했고 혼인정책을 통해 지방 세력과의 통합을 추진한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든 파 응움 왕이 중앙의 지배세력과 지방의 호족, 그리고 백성들에게조차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그는 중앙집권체계를 완비하지 못한 채 불명예 퇴진을 했다. 왕위는 그의 아들 쌈 쎈 타이(1373~1416 재위)에게 돌아갔다. 

쌈 쎈 타이는 보다 유화적이고 지능적인 방법을 취했다. 그의 이름에는 ‘삼십만 명의 타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쌈 쎈 타이는 즉위 후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등록된 타이, 즉 지배세력인 라오족이 30만명이었다는 뜻이다. 라오족은 중국 윈난지역에서 이주해온 타이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이족은 지금의 태국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갔고 이 가운데 라오스지역에 정착한 이들이 11세기 무렵에는 이미 ‘라오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선주민들을 산악지역으로 몰아내고 정착한 이들 타이족은 소수의 정복자였다. 파 응움왕이 지방 므엉의 지배자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학계의 관측이다. 

이런 선대왕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쌈 쎈 타이의 인구조사는 그렇기에 여러 가지 정치적 계산이 갈려있는 조치였다. 인구조사 결과 지배종족인 타이계, 즉 라오족은 약 30만명, 비(非)타이계는 40만명이었다. 이 수치는 성인남자에 한정돼 있었다. 여성과 아이들까지 포함한 란쌍왕국의 인구는 최대 200만여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들 모두를 란쌍이라는 단일한 국가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국가의 틀을 견고히 하고 결속력을 높이는데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군대의 편성과 조세의 기반이 마련됐고 행정조직도 안정을 찾았다. 동시에 쌈 쎈 타이는 각 므엉과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유타야, 그리고 전통적 우방이었던 앙코르와 혼인을 통해 우호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무엇보다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귀족이나 국가에 공헌한 인물들을 부왕(副王)으로 추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노력으로 쌈 쎈 타이 치세 40여년 간 란쌍왕국은 비교적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불교도 국왕의 지지 아래 자리매김해 나갔다. 수많은 사원이 세워졌고 승단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계층이 되었다. 특히 사원은 종교적 장소 외에도 지역사회에서 집회와 교육의 중추로 활용됐다. 

하지만 그의 사후 왕권을 둘러싼 암투, 그리고 란쌍왕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시작한 이웃나라들의 압력으로 란쌍은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불과 25년간 7명의 왕들이 등극했다. 재위 기간이 1개월에 불과한 왕도 있었다. 대부분은 암살당하거나 쫓겨나야 했다. 이웃국가인 베트남의 침략을 받아 수도를 빼앗기기도 했다. 

란쌍왕국이 다시 안정을 되찾은 것은 1500년 즉위한 위쑨나랏(1500~1520 재위)왕에 이르러서다. 위쑨나랏왕은 비엔티엔에 머물러있던 프라방 불상을 수도로 이운했다. 불교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프라방 불상이 마침내 씨엥동씨엥통에 입성함으로써 불교는 란쌍왕국에서 불가침의 권위를 얻게 된 것이다. 라오룸으로 불리는 지배족과 라오퉁으로 구분돼 칭해지는 피지배족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는 탄생신화 ‘쿤 보룸’ 이야기가 편찬된 것도 이 즈음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마침내 란쌍왕국은 위쑨나랏왕의 손자 쎄타티랏(1548~ 1571 재위)의 등극과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후 쎄타티랏왕은 수도를 비엔티엔으로 이전하는데 이때 프라방 불상만은 씨엥동씨엥통에 남겨둔다. 이는 옛 수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득권층 그리고 그곳 주민들의 소외감을 다독이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자 배려였다. 불교의 최고 상징물을 남겨둠으로써 수도에 버금가는 위상을 존중해주었다는 것은 당시 불교의 위상을 말해준다. 동시에 불교와 왕권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보여준다. 프라방 불상이 이곳에 남게 되면서 씨엥동씨엥통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프라방 불상이 있음을 강조한 ‘성스러운 프라방’이라는 뜻의 ‘루앙프라방’으로 바뀌게 되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75호 / 2019년 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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