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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웅 쎄타티랏과 프라케오

외침 막아낸 국력 결집 중심엔 국왕의 상징 ‘에메랄드불상’ 있었다

10대 후반 란나왕국 왕좌 계승
부왕 사후 왕국 분열 막기 위해
란쌍으로 귀국할 때 이운해 와 
‘프라케오’ 앞세워 왕권 강화

예언·신비로 가득한 조성기엔
불상 향한 지극한 신심 엿보여

1563년 비엔티엔으로 천도하며
프라방불상 제치고 수도에 봉안
새 왕의 강력한 지배력 드러내
구 세력과의 균형·조화 이루며
국가 안정·단결로 전성기 일궈

1548년 란쌍왕국 왕좌에 오른 쎄타티랏왕은 수도를 비엔티엔으로 옮기며 프라케오불상을 새 수도에 봉안했다. 이로써 프라케오는 이전까지 란쌍왕국의 상징이었던 프라방불상을 대신해 불교의 구심점이자 왕권의 상징, 그리고 란쌍왕국 단결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버마족의 침입을 두 번이나 막아낸 쎄타티랏왕은 지금까지도 라오스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손꼽히고 있다. 

1548년 쎄타티랏이 란쌍왕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에메랄드불상을 앞세운 그의 귀국은 강력한 왕위 계승권자의 등장을 알리는 화려하고 웅장한 행렬이었다. 행렬의 선두, 화려하게 장엄된 에메랄드불상 프라케오가 그의 권위를 대변하고 있었다. 란쌍왕국의 전성기, 가장 강성했던 시기를 연 쎄타티랏왕(1548~ 1571 재위)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란쌍왕국은 쎄타티랏왕에 의해 가장 큰 번영을 이룬다. 물론 그의 아버지 포티싸랏왕(1520~1548 재위)이 다져놓은 정치·외교적 안정과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포티싸랏왕은 토속신앙이었던 피 신앙을 금지시키고 피 신앙의 사당에 불교사원을 건립하는 등 강력한 포교정책을 실시했다. 덕분에 이 시기 불교는 라오스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갈 수 있었다. 포티싸랏왕은 이웃국가였던 란나, 아유타야, 앙코르 왕국 등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안정적인 외교구축에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배경 속 란나왕국 욧캄팁 공주와의 사이에서 1534년 태어난 아들이 바로 쎄타티랏이었다. 1546년 란나왕국의 국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왕좌는 사위였던 포티싸랏에게 돌아갔다. 란쌍왕국의 국왕이었던 포티싸랏은 아들 쎄타티랏을 란나왕국의 왕좌에 앉혔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포티싸랏왕이 세상을 떠났다. 란쌍왕국은 왕좌를 둘러싸고 이복형제들 간의 왕위 다툼으로 분열될 조짐을 보였다.

란나왕국에 머무르고 있던 쎄타티랏에게도 아버지의 부고와 함께 왕국의 소식이 전해졌다. 쎄타티랏은 귀국을 결심했다. 무엇보다도 왕국의 분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실과 귀족, 백성의 마음까지 하나로 모을 강력한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바로 프라케오로 불리는 에메랄드불상이었다. 프라케오는 란나왕국의 보물이었다. 이 불상이 란나왕국에 전해지기까지 그 행적은 전설과 이적으로 가득하다.
 

란나왕국에서 가져 온 에메랄드불상 ‘프라케오'는 현재 태국 왕실사원에 봉안돼 있다. 

15세기 팔리어로 작성된 ‘에메랄드불상 연대기’에 따르며 프라케오는 인도의 파탈리푸트라에서 기원전 43년 조성됐다고 한다. 파탈리푸트라는 아쇼카왕이 다스리던 마우리아왕조의 수도로 현재의 인도 파트나다. 프라케오 조성 시기는 물론 마우리아왕조가 사라진 이후지만 파탈리푸트라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불교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다만, 프라케오를 조성한 나가세나라는 성자가 힌두교의 신 비쉬누와 인드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니 당시 힌두교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거나 힌두교와 불교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나가세나의 예언이다. 

“이 부처님은 이후 랑카디파(스리랑카), 라마락카, 드바라바티(버마), 치앙마이(태국) 그리고 란창(라오스)에 있는 5개 나라에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프라케오는 이후 300여년 간 파탈리푸트라에 머문 후 스리랑카로 전해졌으며 이후 버마의 아누루타왕이 스리랑카에 경전과 에메랄드불상의 전래를 요청하며 인도차이나반도로 이운된다. 하지만 프라케오는 스리랑카를 떠나 버마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지금의 캄보디아에 불시착했고 이후 앙코르, 아유타야 왕국을 거쳐 치앙라이 지역에 도착, 1434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후 프라케오는 란나왕국의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겨져 국가의 보물로 숭상되고 있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전설과 사실을 가려낼 수는 알 수 없지만 프라케오를 얼마나 신성시 여기는지를 짐작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더구나 프라케오의 행적을 예언한 성자 나가세나의 이름이 ‘밀린다팡하[한역 나선비구경]’에 나오는 비구 나가세나와 일치하고 활동시기도 엇비슷해 이야기의 무게감을 더해준다. 하지만 동일인물 여부는 알 수 없다.

쎄타티랏이 이 같이 귀한 불상을 란쌍왕국으로 가져가겠다고 했을 때 란나왕국에서는 반발하지 않았을까.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쎄타티랏은 “이 불상을 란쌍왕국으로 모셔간다면 왕족들이 불상에 예경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극한 신심에서 우러나온 말로 여길 수도 있지만 불상을 이운해 감으로써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귀국한 쎄타티랏은 신속하게 이복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좌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패배한 형제들을 제거하는 대신 그들을 용서하고 지방의 통치자로 보내는 유화책을 사용했다. 그가 말했던 예경과 공덕은 그렇게 구현됐다.

란쌍왕국의 분열은 막았지만 여전히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다. 주변국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버마족의 따웅우왕국은 란쌍 뿐 아니라 인도차이나반도의 여러 나라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쎄타티랏이 란쌍왕국으로 돌아간 지 불과 8년 후, 란나왕국은 따웅우왕국의 공격을 받아 붕괴됐다. 이 모습을 지켜본 쎄타티랏은 아유타야왕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쎄타티랏은 따웅우왕국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남쪽 도시 비엔티엔으로 수도를 옮긴다. 1563년 천도를 단행한 쎄타티랏은 새 수도인 비엔티엔에 심혈을 기울여 새로 사원을 지었다. 에메랄드불상 프라케오를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사원 ‘호프라케오’다.
 

프라케오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쎄타티랏이 창건한 호프라케오. 이후 수 차례 전란을 겪으며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으며 현재의 호프라케오는 프랑스 식민지배시기 재건된 모습이다. 

호프라케오는 프라케오불상의 봉안처이자 왕의 개인기도처였다. 이곳의 프라케오불상은 란쌍왕국 최고의 보물이자 불교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러한 응집력의 결과였을까. 쎄타티랏은 당시 인도차이나반도 전체를 쥐락펴락할 만큼 강력하게 팽창하던 버마족 따웅우왕국의 침략을 두 차례나 막아내는 저력을 발휘한다. 란나와 아유타야 등 이웃 국가들이 모두 따웅우왕국에 무릎을 꿇었지만 쎄타티랏은 꿋꿋이 버텨냈다. 심지어 따웅우왕국의 침략을 받은 이웃국가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내기도 했다. 란쌍왕국은 당시 버마족의 침략을 막아낸 유일한 국가였다. 하지만 1571년 쎄타티랏이 카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불과 3년 후 란쌍왕국은 결국 따웅우왕국에 점령당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쎄타티랏은 강성했던 란쌍왕국의 지도자로 지금까지도 라오스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손꼽힌다. 그가 강력한 지도력으로 외침을 막아낼 수 있었던 배경에 프라케오불상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란쌍왕국에는 프라케오 외에도 국가의 보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불상이 있었다. 14세기 란쌍왕국을 건립한 파 응움왕의 왕비가 친정인 앙코르왕국에 요청해 이운해온 프라방불상이다. 1502년 위쑨나랏왕에 의해 수도에 봉안된 프라방불상은 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프라케오가 란쌍왕국에 전래되기 전까지 프라방은 불교의 구심점이자 절대적 숭배의 대상, 그리고 왕권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위쑨나랏의 손자인 쎄타티랏이 형제들을 제압하고 등극하며 새로운 예경의 대상으로 프라케오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이운해 온 프라케오불상은 단순한 종교적 예경의 대상을 넘어 기존 세력에 대응하는 신진세력 등장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존 세력에 대한 완전한 제압이 이뤄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프라방으로 대변되는 구 세력과의 힘겨루기에서 어느 정도 균형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상상해볼 수도 있다. 이는 쎄타티랏이 비엔티엔으로 천도하며 오랜 시간 왕국의 상징과도 같았던 프라방불상을 옛 수도에 남겨두고 대신 프라케오를 수도로 이운해 봉안했다는 점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프라케오를 새로운 수도로 이운하며 프라방불상이 남아있는 옛 수도의 이름이 ‘성스러운 프라방’이라는 이름의 ‘루앙프라방’으로 바꾸었다는 점은 옛 수도에 대한 배려이자 기존 지배세력을 존중하는 쎄타티랏의 유화적 자세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사실 라오스의 역사는 여전히 선명하지 않다. 란쌍왕국의 전성기를 연 쎄타티랏이 과연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그의 정책이 어땠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프라케오불상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연 그가 왕국에 활기를 불러오며 외침을 극복한 것만은 분명하다. ‘위대한 왕’으로 불리는 쎄타티랏에 대한 라오스인들의 존경과 사랑이 그대로 프라케오불상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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