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차돈 흔적 남은 흥륜사·백륜사
3.  이차돈 흔적 남은 흥륜사·백륜사
  • 임은호 기자
  • 승인 2019.04.16 14:14
  • 호수 14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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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이 솟구친 순교의 흰 피, 찬연한 신라불교의 서막

신라 불교 공인 위해 목숨 내놔
이차돈 순교 계기 흥륜사 세워져
정확한 위치 등 대부분 베일 가려

순교비 발견된 소금강산 백률사도
대나무 숲 속 소박한 절로만 남아 
이차돈 순교 뒤 천경림에 신라 최초 공인 사찰, 흥륜사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흥륜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터에는 1980년대 ‘흥륜사’가 새로 지어져 소박한 가람이 형성돼 있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중국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는 유독 불교에 배타적이었다. 그래서 희생도 컸다. 어쩌면 많은 희생을 딛고 뿌리내린 불교이기에 신라의 불교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깊고 단단하고 찬란했을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대변하듯이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유래에 대해 여러 기록들이 전한다. 눌지왕(417~458)과 비처왕(479~500) 시대라는 ‘삼국사기’의 주장이 있고, 법흥왕(514~540) 때라는 ‘해동고승전’의 주장이 있다. 또 미추왕(262~284) 때라는 ‘수이전’의 주장도 전한다. 신라의 불교수용에 대한 다양한 이견들은 신라불교의 애절한 곡절의 전주곡 같은 느낌이 든다. 바로 우리의 오천년 역사에서, 또 1700년 한국불교에서 가장 신심 굳건한 인물의 순교라는 비극적이면서도 위대한 이야기의 서막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좌절을 거듭한 끝에 자리를 잡은 신라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찬란한 그들의 문화는 불교를 바탕으로 이뤄졌으며 정치체제의 안정 또한 불교를 통해 이룩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바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이차돈의 순교로 가능했다.

이차돈은 어려서부터 곧은 성품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그는 토착귀족들의 위세에 눌려있던 법흥왕을 도와 신라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불교가 있었다. 이차돈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강물처럼 흘러 신라를 적시고 백성들의 지혜를 증장시켜 마침내 부처님의 나라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은 거셌다.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고 토속 신에 제사를 지내던 귀족들에게 불교는 용납되기 어려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재산이고 토속신의 권위는 곧 자신들의 권위였다. 그러나 불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왕의 도리이고 백성들은 누구나 불성을 지닌 존재였다. 귀족들의 반발은 극렬했다. 왕 또한 귀족의 한 일원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법흥왕은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차돈은 망설이지 않았다. 금수와 같은 시대를 끝내고 품격 있는 나라를 만들고 마침내 모든 백성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라에 반드시 불교가 뿌리내려야 했다. 이차돈은 순교를 결심했다. 부처님의 말씀이 누리를 적실 수 있다면 목숨은 한갓 지수화풍(地水火風)에 불과했다. 칼날이 목을 스쳐지나간다 해도 어찌 불성을 벨 수 있을 것인가. 

이차돈은 망설이는 법흥왕을 오히려 설득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해도 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럼에도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달리 없었다.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님께서 길이 평안하실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다.

이차돈 성사는 왕에게 귀족들이 신성시하는 천경림에서 불사를 벌일 것을 간청했다. 불사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자 귀족들의 분노는 곧 하늘을 찔렀다. 천경림에서의 불사는 귀족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귀족들은 법흥왕을 겁박했다. 이차돈의 처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결국 법흥왕은 천경림 불사의 책임을 물어 이차돈을 처형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이차돈은 오히려 의연했다. 

“부처님께서 신령하시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차돈은 죽음 앞에서 당당히 외쳤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은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목이 베어지는 순간, 그의 목에서 흰 젖 같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목숨을 잃었건만 몸에서 빛이 발해 주위에 있던 모든 이가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사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서워 땅에 엎드렸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은 진동했으며 사방에서 꽃비가 내렸다. 백성들은 ‘옳은 사람을 죽였다’고 소리쳤다.”

기록 속 이차돈 순교 장면이다. 기세등등하던 귀족들도 목에서 솟구친 흰 피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모두가 이차돈의 위대한 죽음 앞에서 부처님의 위신력과 불교의 위대한 가르침에 허리를 숙였다.

20세를 갓 넘긴 약관의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는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날이 528년 법흥왕 15년이었다. 그리고 이차돈 순교 7년 뒤인 534년(법흥왕 21년)에는 천경림에 신라 최초 공인 사찰, 흥륜사 불사가 재개돼, 9년 뒤인 544년(진흥왕 5년) 흥륜사가 완공됐다. 이로써 신라에는 불교를 통해 백성들 염원을 하나로 모으고 그 힘으로 다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이차돈 순교비.

황룡사, 사천왕사와 더불어 신라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흥륜사는 ‘대왕흥륜사’로 불렸다.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이었고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됐다. 매년 사월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이 탑을 돌면서 염불을 하는 복회(福會)가 열리는 등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늘 무심하고 세상사는 항상 흙먼지처럼 흩어지기 마련이다. 이차돈의 위대한 죽음으로 세워진 흥륜사도 1500년 세월의 무상함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신라를 대표하는 대가람을 이루며 ‘대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는 석조 배례석 정도만 터에 남아 겨우 그 흔적만을 전할 뿐이다. 그래도 조선시대 문집 등에는 15세기 이전까지 건재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혼란스럽다. 1980년대에 흔적이 남아있던 경주시 사정동 281-1번지에 대웅전과 석등, 범종, 이차돈 순교비를 모사한 비석 등으로 새로운 흥륜사를 형성했지만 10여년 전 발굴조사 중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흥륜사 인근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서 흥륜사의 ‘흥’자가 새겨진 기와와 배수로 등이 발견되면서 학자들은 그곳을 흥륜사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비록 흥륜사터에 대한 이견들이 분분하지만 현재의 흥륜사는 이차돈의 삶과 죽음을 기리며 매년 음력 8월 ‘이차돈 성사 추모재’를 봉행한다. 이날만큼은 전국에서 모여든 불자들이 이차돈 순교의 의미와 장한 신심을 함께 추모하며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사실 이차돈의 순교 흔적은 흥륜사뿐만 아니라 소금강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순교 때 잘린 머리가 날아가 소금강산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를 추모해 백률사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백률사는 이차돈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이를 애달퍼 하며 순교 다음 해 지은 절이다. 

백률사에는 817년(헌덕왕 9년) 이차돈을 추모하는 석당이 세워졌다. 이차돈의 기일이 되면 추모객들이 백률사 인근 이차돈의 무덤에서 재를 올렸고 추모의 전통과 열기는 고려 후기까지 지속됐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됐지만 1600년경 윤승순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백률사에서는 신라 헌덕왕 때(817~818) 조성된 이차돈 순교비가 발견됐다. 순교비는 6면의 독특한 기둥 형식인데 다섯 면에는 명문이 있고 나머지 한 면에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양각돼 있다. 순교비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순교 당시 모습을 담은 범종각은 여전히 백률사 입구에 남아 이차돈을 기억하고 있다. 범종에는 머리와 분리된 몸에서 흰 젖이 치솟고 떨어진 머리는 연꽃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라가 불국토를 염원하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피었다 스러진 이차돈의 염원이 백률사 범종 조각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백률사 역시 창성했던 당시의 흔적은 사라졌고 현재는 대웅전과 요사채 밖에 없는 소박한 절로 남아있다. 백률사 주위에는 지조와 높은 기상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차돈의 삶과 죽음, 순결했던 그 결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차돈 이전에도 순교자는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고구려 스님들이었다. 이와 달리 이차돈은신라 사람이었으며, 그의 순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역사에 기록됐다. 

비록 짧은 생이지만 순교로 보여준 이차돈의 금강석 같은 신심과 용기, 그리고 이에 따른 신이한 이적들은 훗날 수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됐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 스님은 이차돈의 묘소를 참배한 뒤 감격에 겨워 찬탄의 시를 남겼다. 

“임을 찾아 남행천리 왔건만/ 아득한 청산만 쓸쓸히 바라보며/ 지내기 몇 해던가./ 만약 말세에 법을 행하기 어려운 때 만나면/ 나또한 임을 따라 목숨 바치리.”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도 글을 남겼다. “의를 좇아 생을 버린 것도 충분히 놀랍거늘/ 하늘 꽃과 흰 젖으로 더욱 다정하다/ 잠시 한 칼로 몸을 잃은 뒤에/ 절마다 종소리가 서라벌에 진동한다.”

춘원 이광수는 “이차돈은 신라사뿐 아니라 전 조선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아름답게 살고 가장 아름답게 죽은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한국불교는 어쩌면 이차돈 순교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용기와 위법망구의 정신, 그리고 그의 깊은 신심이 보여준 부처님의 가피가 한국불교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록이며 이 시대를 사는 불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금구성언(金句聖言)이다.

경주=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85 / 2019년 4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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