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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잊혀진 도시 테르메즈

사막의 거센 모래바람이 감춰두었던 장엄한 쿠샨왕조 불교도시

2002년 2500주년 맞은 오랜 도시
그리스어로 ‘더운 곳’이라는 의미
카니슈카왕 때 불교중심지로 성장

파야즈테파 등 대표유적 모두 불교
현장 스님 “수많은 불탑·불상” 소개
이슬람화 전까진 불상 모시고 기도

‘주르말라대탑’ 불교 흥망성쇠 상징
26m 웅장했던 과거 무너져 절반만
침식에 붕괴 진행 중 더욱 안타까워

테르메즈에 위치한 대표적 불교 유적 파야즈테파. 흙벽돌을 쌓아올려 세운 장엄한 불심의 도시는 2000여년간 모래언덕 아래 잠들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가장 큰 매력은 도시와 자연,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2018년 2월부터 한국인에 대한 비자가 면제돼 여권과 항공권만 있으면 30일 동안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첫 순례지는 간다라 미술의 화려함을 간직한 쿠샨왕조의 보석 같은 도시 테르메즈다. 테르메즈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를 경유해야 한다. 8시간여를 비행한 후 다시 730km 떨어진 우즈베키스탄 최남단의 도시 테르메즈를 향해 날아올랐다.

우즈베키스탄 국토면적은 45만여㎢로 한반도 면적의 두 배쯤 된다. 정해진 국교(國敎)는 없지만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사실상 무슬림의 나라다. 무슬림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과 달리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순수하고 친절하다. 손님맞이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어른을 공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특히 한국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대장금’ ‘주몽’ ‘겨울연가’ ‘태양의 후예’ 등 한국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에서 일하다 온 사람들도 많아 길을 걷다 보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거나 함께 사진 찍을 것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테르메즈는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오랜 도시 가운데 하나다. 2002년 도시 건립 2500주년을 맞아 기념식을 갖기도 했는데 농경과 수렵, 어로가 가능한 풍족한 자연환경으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덧붙여 과거에는 박트리아와 소그드를 연결하는 최단 교역로 상에 위치한 핵심 도시였고, 현재는 아무다리야강 줄기를 따라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군사전략상의 요충지다.
 

우즈베키스탄은 정해진 국교가 없지만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사실상 무슬림의 나라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 같은 ‘테르메즈’는 그리스어로 ‘더운 곳’이란 의미다. 알렉산드로스왕이 이곳을 강점하면서 붙인 이름인데 실제 여름철에는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길 만큼 무더운 지역이다. 고대 자료 가운데 알렉산드로스왕이 아무다리야강 연안에 ‘옥서스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립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도시가 바로 테르메즈인 것이다. 

기원전 3세기 테르메즈는 새롭게 성립한 박트리아왕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북방국경의 주요 전초기지가 된다. 이에 따라 테르메즈는 북부 박트리아 최대 도시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그러나 박트리아는 2세기 만에 월지족에 의해 붕괴됐고 테르메즈 역시 월지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 테르메즈는 유목민의 정착에 의해 주민이 급속히 증가했고 문화적인 면에서 통합이 진행됐다. 그 결과 테르메즈에는 박트리아의 헬레니즘과 유목문화의 전통이 융합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다. 

이러한 가운데 기원전 1세기 월지족의 쿠샨인을 중심으로 한 대제국 쿠샨왕조가 탄생한다. 쿠샨왕조는 제3대 왕인 카니슈카 때 전성기를 누렸고, 제국의 중심이었던 테르메즈 역시 크게 번성했다. 특히 카니슈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여 불교를 보호하고 전파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테르메즈는 중앙아시아 최대 불교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내 각 구역에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대규모의 불교사원이 출연하기 시작했다. 
 

 테르메즈 불교의 번성과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르말라대탑.

오늘날 테르메즈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인 파야즈테파, 카라테파, 달베르진테파, 자르테파, 주르말라대탑 등이 모두 불교와 관련된 건축물들이다. 630년 이곳을 지나 인도로 향하던 현장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이 도시를 ‘달밀국(呾 蜜國)’으로 칭하며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달밀국은 동서로 600여리, 남북으로 400여리, 도성의 둘레는 20여리에 달하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은 모양이다. 이곳에는 10개 이상의 사원이 존재하며, 스님들은 1000여명에 이른다. 사원에는 수많은 탑과 불상이 있는데 매우 신기하고 기이하며 영험이 있다.” 

테르메즈 시내와 그 주변에 다수의 불교사원이 존재했다는 것은 과거 이 도시의 생활과 문화에 불교공동체가 어떠한 역할을 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 테르메즈의 불교사원은 왕실의 보호와 백성들의 신심에 힘입어 나날이 성장했고, 중앙아시아 불교의 중심지로서 불교문화를 동방에 전파하는 중계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테르메즈 출신의 스님 중에는 불법을 전하러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 중 티베트불교 ‘율’의 주석서를 쓴 ‘다르마 미트라’ 스님이 이곳 출신이다.

4세기 쿠샨왕조가 저물어가자 테르메즈 역시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와 에프탈의 공격에 허물어져갔다. 도시의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기능도 성내 구역으로 한정됐다. 이어 6세기 투르크, 8세기 아랍의 아바스왕조를 거치면서 테르메즈는 중앙아시아의 중심 도시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피폐해졌다.

테르메즈의 불교 역사는 쿠샨왕조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사산왕조는 불을 신성시하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를 삼았는데 사산은 성직자인 모바드의 지시에 따라 불자들을 처형하고 불교사원을 불태웠다. 불교는 에프탈 시기를 거치며 더욱 혹독한 고난을 겪어야 했고, 아바스왕조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전까지도 테르미즈 주민들은 이슬람군이 주둔할 때면 ‘코란’을 암송하며 예배했지만, 그들이 물러가면 숨겨놓았던 불상을 꺼내 부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이 확고히 자리를 잡자 백성들은 부득이 생존을 위해 불상 대신 코란을 택했다.
 

파야즈테파와 카라테라 사이 양떼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옛 테르메즈 주민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불교사원 역시 이교도들의 파괴행위와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몰락해갔다. 흙벽돌로 쌓아올린 거대한 불교사원은 비와 눈에 의해 스러져갔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여름철 모래바람은 긴 시간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언덕 아래 그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불교사원을 감추었다. 앞서 언급한 파야즈테파, 카라테파, 달베르진테파에서의 ‘테파(tepa)’는 우즈베키스탄어로 ‘언덕’을 뜻한다.

타슈켄트를 떠난 지 1시간20분 후 테르메즈공항에 도착했다. 지금의 테르메즈는 13세기 새롭게 건립한 도시다. 1220년 가을, 칭기즈칸 군대에 포위당한 테르메즈 주민들은 열흘간 격렬히 저항했다. 이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살육했다.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옛 도시를 버리고 도시에 물을 공급했던 수로의 상류 쪽으로 이동해 현재 위치에 새로운 테르메즈를 세웠다.

주르말라대탑은 공항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쿠샨왕조 시대에 건설된 이 대탑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조형물 중 하나이며, 테르메즈 불교의 번성과 쇠락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주르말라대탑은 전형적인 쿠샨의 탑 양식으로 직사각형의 기단 위에 흙벽돌을 쌓아올려 지어졌다. 원래는 8층 건물 높이인 26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었다지만, 현재는 외탑이 벗겨지고 내탑이 외부에 드러난 상태다. 이마저도 본래 크기의 절반인 높이 13m, 둘레 14.5m의 벽돌더미만 남았다. 
 

테파는 ‘언덕’을 뜻한다. 테르메즈의 유적 대부분은 불교와 관련된 언덕이다.

주르말라대탑은 이슬람이 들어온 후 봉화대로 사용되다 버려졌고 최근에야 비로소 불탑임이 밝혀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마저도 밀밭 가운데 버려지다시피 방치돼 있어 파괴와 침식으로 인한 붕괴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일본 릿쇼(立正)대학에서 설치한 관측장비만이 스러져가는 대탑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다.

과거 거대한 모습의 주르말라대탑은 테르메즈 어느 곳에서나 조망이 가능했을 터다. 신실한 불심의 테르메즈 사람들은 간절히 무언가를 바랄 때면 고개 돌려 주르말라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인도로 향하던 현장 스님 역시 대탑을 세운 이곳 사람들의 불심에 손 모으고 고개를 숙였을 지 모른다. 수많은 이들을 진리의 품으로 인도한 주르말라는 화려했던 옛 모습은 잃었다. 하지만 제 몸 무너뜨려 변화하는 것으로 여전히 ‘모든 것은 변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meopit@beopbo.com

 

[1487 / 2019년 5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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