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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 구법승 첫걸음 내딘 안흥항과 평택·당진항

그들은 거친 망망대해와 황량한 사막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6세기 신라에 퍼진 구도열정으로
100여명 스님 바닷길로 중국행
인도로 간 신라스님도 8명 달해

당시 당과 왕래 중심지 태안반도
안흥포는 불교문화 들어온 길목
혜초 스님은 당진서 중국 넘어가

성불 꿈 품은 구법승 있었기에
오늘날 찬연한 한국불교 만들어져

중국 무역과 함께 불교문화가 들어온 길목인 안흥포. 현재 안흥항인 이곳은 고깃배와 유람선 그리고 횟집 등만이 항을 지키는 한가로운 항구로 옛 구법승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거대한 불도 티끌 같은 불씨에서 시작하고 대해의 엄청난 물도 한 방울의 이슬에서 비롯된다. 1600년을 이어온 장대한 한국불교의 시원도 이와 같았다.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바다와 대륙을 건너 깨달음의 불씨를 향해 나아갔던 사람들. 방울방울 맺힌 구도를 향한 그 애틋한 마음들이 모여 결국 찬연한 한국불교의 오늘을 만들었다.

구도의 길은 쉽지 않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홀로 떠나야 하는 길. 목숨은 한갓 솜털처럼 가벼웠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갔던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목숨을 버리더라도, 티끌 같은 한 구절의 가르침을 열망했던 사람들. 치열한 보리심을 등대 삼아 망망대해 풍랑에 맞서고, 타는 듯이 뜨거운 사막을 건너고, 길 없는 칼산을 올라 기어코 진리의 세계로 나아간 사람들. 국경은 있어도 구도의 열정에는 국경이 없었다. 나라가 갈라져도, 전쟁이 일어나도,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신라의 많은 스님이 그러했다. 목숨을 버리더라도 오로지 법을 구하고자 하는 단심(丹心)이었다.

신라의 전성기는 불교와 함께 시작됐다. 중국에서 전해진 불교는 삶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번뇌와 고통이 없는 해탈의 길을 일러줬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다. 부처님 육성의 가르침, 참된 진리의 길이 궁금했다. 타는 목마름이었다. 

신라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6세기는 그런 구도의 열정이 나라 전역을 뒤덮었다. 이런 열망 속에 많은 스님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주로 바닷길로 향했다. 고구려와 험악한 산악에 막힌 육로는 열정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당시 바다를 건넌 신라의 구법승은 기록된 스님만 100여명이 넘는다. 이 스님들은 광활한 중국대륙 각지로 퍼져 명승대덕을 찾아 공부하고 수행했다. 6세기에는 안함, 각덕, 명관, 안홍, 지명, 원광 스님이, 7세기 전반에는 담육, 명랑, 자장 스님 등이 중국에서 배우고 돌아왔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고, 낯선 땅에서 풍토병으로 또는 험악한 도적을 만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적잖은 스님들이 중국의 선진불교를 배워 신라로 돌아왔다. 새로운 스승을 받들어 종맥을 세우고 공부하는 도반들을 모아 종문을 키워갔다. 불씨가 들판에 번지듯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신라 전역으로 번져갔다. 

한반도의 7세기는 칼을 베고 자고, 창을 쥐고 일어서는 전란의 시기였다. 삼국이 갈려,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난관도 구도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 아수라의 세상에서 오로지 중생을 구제하고 분노의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처님이 대자대비였을지도 모른다. 중국으로 떠난 스님들의 구도 열정은 신라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치열한 불법에 대한 갈구는 중국불교를 자극하고 타국의 불교를 발전시키는 활력소로 작용했다. 

평택·당진항 인근 평택호예술공원에 세워진 ‘혜초기념비’.

구법승들은 중국에 안주하지 않았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부처님의 나라 인도로 향했다. 신라의 스님들은 7세기에 이미 험준한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천축에 들어가 부처님의 성지를 참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나란다사에 들어갔다. 당나라 고승 의정 스님(635~713)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61명의 구법승이 기록돼 있다. 그 가운데 8명의 신라 스님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아리야발마, 혜업, 현태, 현각, 혜륜, 현유 스님 등이 그들이다. 바다를 건너 사막을 헤치고 고원을 넘는 험한 길에서 도적을 만나고 겨우 목숨을 구해 순례를 이어간 이들은 대부분 구법의 그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향이 그리워도 결코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만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부치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나를 돌아보지 않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나 있는 타국은 땅끝 서쪽에 있네./ 열대지방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거니, 누가 고향 계림으로 내 소식 전해주리.’

중국을 거쳐 인도와 서역까지 구법을 떠났던 혜초 스님의 시는 당시 구법승들의 심정을 절절한 글로 전하고 있다.

 신라와 당나라와의 왕래 중심지는 당진을 포함한 태안반도로 당진의 당진포, 태안의 안흥포, 보령의 소포가 주요포구였다. 이 중에서도 안흥포는 당과의 해양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중심 포구로 현재 안흥항이라고 불린다. 안흥항은 한반도의 허리인 충청남도 서북쪽 백두대간의 금북정맥을 따라 서쪽 끝 막내인 지령산이 서해로 뻗어있는 지역에 자리 잡았다. 지나는 물길이 얼마나 험했던지 지나다니기가 어렵다는 뜻의 ‘난행량’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안흥항은 배들이 너무나 자주 침몰하자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편안할 ‘안’자가 붙어 안흥항이 됐다고 전해질 정도로 험한 바닷길이다.

안흥포는 중국 무역과 함께 불교문화가 들어온 길목이다. 서해를 건너 안흥포에 상륙한 불교는 태안 백화산의 마애삼존불, 서산 마애삼존불, 덕산의 수덕사, 부여의 왕흥사와 같은 많은 사찰을 남겼다. 불교가 서해안인 태안반도에서 내륙으로 전래됐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통일신라 시기에도 당과의 빈번한 접촉으로 당진 지역은 크게 주목 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당진 지역에 많이 남아 있는 절터의 대부분이 창건되었다.

고깃배와 유람선 그리고 횟집 등만이 항을 지키는 한가한 항구 안흥항에서 옛 구법승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안흥항을 감싸는 안흥진성 서문을 지나 언덕 위에 중창된 태국사를 통해 당나라와 신라를 오가는 이들의 무사 항해를 빌었을 이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험난한 파도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바다에 뛰어든 구법승들. 고향을 뒤로한 채 구법순례에 나선 그들이 바다와 처음 마주 섰을 때,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구도심 또한 함께 끓어올랐을 것이다.  

신라 구법승들이 중국으로 향했을 당진포는 현재 5만톤급 대형 선박이 입항 가능한 평택·당진항으로 변모했다.

세찬 파도에 난파당할 듯 흔들리는 배에 몸을 실은 후 점점 멀어져 가는 고향을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진리를 찾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구법승의 흔적은 평택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평택·당진항 인근 평택호예술공원에 있는 ‘혜초기념비’가 바로 그것이다.

혜초 스님은 서해를 건너 서쪽으로 떠난 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대표적인 구법승이다. 그리고 그가 직접 지은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책의 발견으로 당시의 심정을 유일하게 후대에 남겨준 스님이다. 1300여년 전 16세의 어린 나이에 차가운 바다로 나가 세상의 문을 연 그는 뱃길로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다. 이후 남인도의 밀교승 금강지에게 불법을 배운 지 5년 만에 인도로 건너가 육로로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나라 수도 장안에 이르는 5만리(약 2만㎞) 길을 홀로 걸었다. 10여년 동안 경험한 서역문화를 정리한 ‘왕오천축국전’은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기행문이자 불교유적순례기의 시원이 돼 우리네 가슴에 살아있는 별로 각인됐다.

평택시는 2009년 국제행사인 ‘제4회 실크로드 메이어스 포럼’을 개최하며 ‘혜초기념비’를 세웠다. 혜초 스님과 원효 대사 등 많은 신라고승들이 1400여년 전 구법순례를 위해 경주를 떠나 평택을 거친 사실들을 조사하고 있다. 기념비가 세워진 평택·당진항 주변에 실크로드 파크, 실크로드 문화센터 등을 조성하고 실크로드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등 실크로드 이미지를 살린다는 계획이다.

성불의 꿈을 안고, 혹은 전등의 불씨를 얻어 고국으로 돌아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건너간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불교는 얼마나 초라했을 것인가?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서해를 건너 구법순례를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이같이 찬탄했다.
‘천축 하늘 멀고 멀어 만첩 산이로구나/ 애달픈 손 순례자들 힘써 오르네/ 저 달은 몇 번이나 외로운 배 보냈던고/ 구름 따라 돌아온 이 못 보았네.’
망망대해를 건너 눈 덮인 첩첩산중을 오르고 황량한 사막을 건너야 끝내 도착할 수 있는 천축으로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구법승들의 대부분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작은 숨결들이 있었기에, 역사의 핏줄기를 타고 오늘날 우리에게 불교의 전등은 전해질 수 있었다. 한국불교에 대한 열정이,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이,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불성이, 세월을 거슬러 오로지 구도의 열정으로 은산철벽에 몸을 던졌던 구법승들이, 우리 몸에 남겨 준 전등의 씨앗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태안·평택=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87 / 2019년 5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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