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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야즈테파·카라테파

쿠샨왕조 대표 유적…파야즈탑은 금산사·통도사 금강계단 원형

양치기가 우연히 발견한 파야즈테파
최고의 보물 ‘비나야 삼존불’ 등 발굴

카라테파는 우즈벡 최대 불교유적지
3개 언덕 2만4200평 전체가 사찰터
불교문화 변화·이동과정 단서 제공

쿠샨왕조 몰락과 함께 쇠퇴한 불교
사원 내에는 배화교 제단 설치되고
스님들 요사인 동굴은 묘지로 전락

우즈베키스탄 최대 불교유적지이자 수많은 성보가 발견된 카라테파 전경. 3개 언덕 전체가 사원인 이곳의 총 면적은 8만㎡에 달하며 기원후 1세기 처음 가람이 세워진 후 200여년 간 규모를 키우며 확장됐다. 사진 속 유물들은 카라테파를 비롯한 테르메즈 불교 유적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왼쪽부터 불상이 새겨진 카니슈카 동전과 사찰 입구를 장엄했던 조각, 돋보기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엄지손톱 크기의 정교하게 조각된 불감, 2층 구조로 조각된 불상 부조.

기원후 1세기 카니슈카가 쿠샨의 왕좌에 오르면서 테르메즈는 가장 영향력 있고 번성한 도시가 된다. 특히 카니슈카왕은 다양한 민족과 이질적인 문화가 자유로이 교류하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이념으로 보편적이고 논리적이면서도 다른 문화에 배타적이지 않은 불교를 선택한다. 한편으로 박트리아의 문자와 예술, 생활양식 등 문화 전반을 이어받은 쿠샨의 왕이 박트리아 정신문화의 한 축인 불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카니슈카왕은 스스로 불자가 된 후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 모두를 연구했을 뿐 아니라 불전(佛典) 편찬을 위한 4차 결집을 단행하고 나라 곳곳에 사찰과 탑을 세웠다. 이러한 카니슈카왕 덕분에 불교는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테르메즈가 불교의 중심지였던 시기 도시 곳곳에는 사원과 탑을 비롯한 다양한 불교 관련 상징물들이 세워졌다. 당시 이곳에 살았던 백성들에게 불교는 삶의 철학이자 일상이었기에 부처님을 향한 마음을 그림에서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현했다. 이로 인해 사원은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엄됐다.

1968년 양을 치던 목동이 테르메즈 한 언덕에서 여인의 모습을 한 석상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 지역을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은 이 석상이 보살상임을 확인했고, 그 언덕 아래 스님들이 거주하던 장소가 묻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발굴작업에 들어갔고 얼마 후 지하에 위치한 거대한 구조의 건축물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불상을 안치했던 법당과 스님들이 거주했던 요사,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고 법회를 열었던 강당 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테르메즈를 대표하는 불교 유적 ‘파야즈테파’다.

파야즈테파란 명칭은 당시 발굴작업을 총괄한 테레메즈박물관장 파야조프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사원에서 발굴된 조각상과 토기는 그 우아함과 정교함으로 인해 학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보리수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부처님과 그 좌우에서 합장한 채 예를 올리는 아난과 가섭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는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최고의 보물로 꼽힌다. ‘비나야 삼존불’로 불리는 이 조각상은 중앙아시아 불교미술의 찬란함과 우수함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비나야 삼존불은 현재 타슈켄트 국립역사문화박물관에 모셔져 있으며 우즈베키스탄 국보 1호로 지정돼 중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우즈베키스탄임을 대외에 알리는 데 활용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기원후 3세기경 조성된 벽화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벽화에는 수많은 불자들이 파야즈테파 사원에 모여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또 박트리아 문자로 표기된 다양한 경전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점에 비추어 파야즈테파는 당시 테르메즈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사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테르메즈가 불교의 중심지였던 시기 도시 곳곳에는 사원과 탑을 비롯한 다양한 불교 관련 상징물들이 세워졌다. 사진 맨 위부터 동굴식 방사와 법당으로 구성된 카라테파 사원의 모습과 동굴식 방사의 내부 모습. 파야즈테파 탑은 흡사 금산사나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보는 듯 닮았다. 테라메즈 지역에서 발굴된 불교 유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테르메즈역사박물관.

파야즈테파의 또 다른 주요 유적 중 하나는 사원 옆에 위치한 거대한 탑이다. 기원후 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2층 기단 위 정중앙에 직경 2.62m의 복발형 탑신이 자리하고 있다. 탑신은 흙벽돌을 쌓아 올려 기본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진흙과 석고 혼합물을 덧칠했으며, 주변을 연꽃과 법륜으로 장식했다. 또 기단 동쪽 면 중앙에는 탑돌이 의식을 위한 계단이 설치돼 있다. 널찍한 상하층 이중기단과 기단 중앙에 원기둥 모양의 둥근 탑을 세운 것은 흡사 금산사나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닮았다. 실제 고고학자들은 우리나라 금강계단이 파야즈테파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파야즈테파의 탑신은 비와 눈, 바람에 의한 침식을 막기 위해 커다란 반구형 구조물 안에 보호되어 있다. 탑신은 작은 출입문을 통해 직접 참배할 수 있는데 이마저도 낙서와 반출 등 사람들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잠금장치로 굳게 닫혀있다. 그러나 참배를 원하는 불자들에게는 사원 관리인이 기꺼이 문을 열어주고 참배와 탑돌이도 허락해 주니 헛걸음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파야즈테파에서 서쪽으로 1km 남짓 아무다리야강을 끼고 솟아있는 3개의 언덕이 ‘카라테파’다. 테르메즈 도심 북서쪽에 위치한 카라테파는 아무다리야강 건너 아프가니스탄 마자르샤리프와 이웃하고 있다. 국경에서 불과 100m 떨어진 이곳은 얼마 전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인 격전지다. 다행히도 현재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간 평화협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어 사전에 허가를 받으면 방문이 가능하다.

과거의 일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카라테파 주변에서는 탄두와 탄피, 포탄, 지뢰 등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은 것은 카라테파가 우즈베키스탄 최대 불교유적지이자 수많은 성보가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3개 언덕 전체가 사원인 카라테파의 총 면적은 8만㎡(2만4200평)에 달하며 기원후 1세기 처음 가람이 세워진 후 200여년 간 규모를 키우며 확장됐다. 카라테파는 이곳을 발굴할 당시 화마의 피해를 입은 듯 땅속에서 엄청난 양의 검은 재가 발견돼 이름 붙여졌다. 우즈베키스탄어로 ‘카라’는 ‘검다’는 의미다.

이 언덕에 사원이 건립된 것은 처음 테르메즈에 내왕했던 스님들이 인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초기 불교공동체는 사원을 조성할 때 동굴식 방사와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은 법당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 언덕은 사찰을 짓기에 안성맞춤이다. 3개의 언덕 가운데 지대가 가장 높고 넓으며 말발굽 모양인 남쪽 지역에서는 15개 이상의 동굴식 방사와 불상을 안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벽감이 다수 포함된 대규모 사원터가 발굴됐다. 사원의 방사와 법당은 잘게 자른 짚이나 풀을 혼합한 점토가 칠해졌고 그 위에 석회로 도장했다. 또 부처님과 보살, 코끼리, 사자, 가루다 등 불교를 상징하는 벽화나 조각들로 사원을 장엄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에서는 붓다실, 붓다미트라, 지와난다 등의 스님들 이름이 자주 등장하며 벽화나 조각에는 공양을 올리는 청신사 청신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카라테파가 더욱 주목받는 것은 정사각형의 높은 기단 위에 조성된 탑이 발견됐다는 점이다. 초창기 원형으로 조성됐던 탑의 기단은 기원후 1세기 인도 북서부 지역에서 정사각형 기단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2~3세기경 테르메즈 등 쿠샨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같은 장소에서 원형의 기단과 정사각형 기단이 함께 발견됐다는 점에서 탑 형식의 발전과 불교문화의 이동 과정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카라테파에 거대한 사원이 조성되는 과정에 쿠샨의 왕궁과 위정자들은 물론 테르메즈에 거주하던 수많은 백성들의 동참과 보시가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카라테파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카라테파의 전성기, 테르메즈의 구성원은 현저히 증가했고 도시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터다. 아무다리야강의 물을 끌어다 목욕탕을 운영했을 정도로 당시 최고의 수행시설이었던 이곳은 현재도 우리나라와 일본 등의 참여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또 다른 주요 유적지 달베르진테파는 테르메즈 북쪽 200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작은 마을 전체가 유적지인 이곳은 박트리아 시기인 기원전 3~2세기 처음 도성이 축조되기 시작해 쿠샨왕조 때 크게 확장됐다. 달베르진테파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불상과 대형 보살상이 여러점 발견됐다. 달베르진테파 보살상은 위엄 있는 자세와 당당한 풍체가 돋보이는 수작으로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편단우견의 법의를 입고 있다. 동시기 간다라지역의 불상과 비교해 두발이 풍성하고 장신구가 많아 호화롭다는 점이 달베르진의 특징이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한 항아리에서는 36kg에 달하는 황금유물 115점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땅의 불국토를 꿈꿨던 테르메즈는 3세기 말 쿠샨왕조의 몰락과 함께 파괴되고 황폐해져 갔다. 달베르진테파, 자르테파, 아이르탐의 불교공동체는 흐려졌고 카라테파, 파야즈테파, 칭기즈테파의 사원은 쇄락했다. 사산왕조의 침략으로 사원 내에는 배화교(拜火敎) 제단이 설치됐으며 스님들의 요사로 사용되던 동굴은 묘지로 전락했다. 8세기 이슬람 국가가 된 후에는 사원의 절반 정도가 모래언덕 아래에 파묻혔으며, 일부는 은둔자들의 주거지나 무슬림들의 의식공간으로 활용됐다. 사원을 장엄했던 아름다운 조각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지고 파괴됐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히고 묻힌 유적들이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우리 앞에 나투었다.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 이겨내며 카니슈카와 그의 백성들이 굳은 신심으로 세운 불국의 땅이 바로 이곳임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489 / 2019년 5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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