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여주 신륵사
7.  여주 신륵사
  • 임은호 기자
  • 승인 2019.07.01 16:27
  • 호수 14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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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선' 주창한 나옹 스님 법등 700년 째 꺼지지 않아

고려말 불교탄압 첫 희생자 나옹 스님
‘제2의 달마' 불리던 지공 스님 법제자

홍건적 침입 때도 절 지키며 법력 펼쳐
현실참여 강조하고 참선곡 다수 남겨

​​​​​​​회암사 중창 때 인파 몰려 대찰 이루자
신진사대부 모함 받고 신륵사서 열반
신진사대부의 모함으로 왕사에서 물러난 나옹 스님은 밀양으로 향하던 중 병을 얻어 신륵사에 머물게 됐고 끝내 이곳에서 열반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암흑기를 맞게 됐다. 중국에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저 한때 스쳐가는 탄압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은 왕조가 문을 닫을 때까지 무려 500년 동안 일관되게 불교를 탄압했다. 그리고 그 탄압의 첫 희생자는 고려불교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이었다. 스님이 살았던 고려 말 공민왕 시절은 정치와 종교를 비롯한 온갖 이념들이 서로 충돌하던 시절이었다. 나옹 스님은 불교의 나라 고려에서 스승 지공(指空, ?~1363) 스님과 함께 생불(生佛)로 추앙받았던 인물이었다. 특히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은 나옹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하지만 공민왕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나옹 스님 또한 유교를 표방한 신진사대부의 모함으로  세상과 이별을 해야만 했다. 

나옹 스님은 수도 개성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범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스님은 약관의 나이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바로 친한 벗의 죽음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절친의 죽음은 스님으로 하여금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순에 골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탄생게에서 외쳤던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서원을 품고 산문에 들었다.

나옹 스님은 여러 곳을 떠돌며 걸식을 하다 1344년 양주 회암사에 깃들었다. 그리고 4년 밤낮을 정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당시 나옹 스님의 오도송이다.

선불장 가운데 앉아서/성성히 깨어 자세히 보라./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 아니요/다만 본래의 옛 주인일세. 

그러나 나옹 스님은 여전히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했는지 확신이 없었다. 고민하던 스님은 결국 1347년 중국으로의 구법을 결심했다. 그리고 연두 법원사(法源寺)에서 ‘석가의 현신’ ‘제2의 달마’로 칭송받던 지공 스님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나옹 스님은 꼬박 2년을 지옹 스님 곁에 머물렀다. 이후 원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다시 2년여를 상주하다가 지공 스님을 떠나 1358년 3월23일 고려로 귀국했다.

나옹 스님의 명성은 이미 고려에 자자했다. 특히 당시 중국에서 생불로 회자되던 지공 스님의 법을 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나옹 스님에 대한 기대는 컸다. 이런 명성을 들은 공민왕은 1361년 가을, 스님을 왕실로 초청해 법문을 청해들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는 격변의 시기였다. 원나라는 황위 계승문제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사람의 목숨은 길가의 들꽃처럼 하찮았다. 이런 혼란기를 틈타 민란의 중심인 홍건적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당시 나옹 스님은 신광사에 머물며 불법을 펴고 있었다. 칼을 쥔 도적들이 절에 들어오자 모두들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러나 나옹 스님은 미동도 없었다. 나옹 스님의 수행력에 감탄한 홍건적은 귀한 침향을 선물한 뒤 조용히 물러갔다.

그러나 제자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제자들은 나옹 스님에게 함께 피난 가기를 청했다. 스님 또한 제자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스님의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났다. 그리고 절을 지켜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보물 제228호 나옹 스님의 사리탑.

다음 날 나옹 스님은 “혼자라도 신광사에 머물겠다”고 밝혔다. 신광사로 다시 몰려온 홍건적들은 스님을 보자 사람을 해치거나 절을 훼손하지 않고 물러갔다. 고려군에 패해 중국으로 도망 갈 때도 나옹 스님에게 깍듯한 예를 올렸다고 한다. 나옹 스님의 법력에 감화된 홍건적의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스님의 명성은 더욱 빛이 났다.  공민왕은 나옹 스님을 왕사로 모셨다. 불교를 다시 중흥시켜 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였다.

나옹 스님은 대중들에게 생사를 벗어난 선의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스님의 회상에 각지에서 구름처럼 눈 푸른 납자들이 모여들었다. 나옹 스님은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데에 왕도가 따로 없으며 오직 불퇴전의 공부만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나옹 스님은 구들장 참선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공부와 적극적인 현실 참여 등 모든 것이 선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점점 위기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는 격렬하게 불교를 비판했다. 이미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꿈꾸는 이들에게 불교는 고려왕조와 동격이었다. 나옹 스님은 정치와 선을 그었다. 나옹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계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누더기 승복을 걸치고 기름진 음식을 멀리했다. 불교가 대중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출가자부터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청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옹 스님은 시가와 산문을 응용한 가사(歌辭)를 창안해 대중들을 교화했다. 대부분의 내용이 탐욕을 버리고 수행해 깨달음을 얻을 것을 권선하는 것이었다. ‘가사문학총람’에 수록돼있는 나옹 스님이 지은 참선곡은 스님의 바람대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오늘날까지 널리 수행의 지침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옹 스님이 다시 한 번 주목받은 것은 1367년 지공 스님의 유훈이 고려로 전해지면서였다. 지공 스님이 열반을 앞두고 나옹 스님을 자신의 법제자로 지목한 것이었다. 나옹 스님은 스승의 뜻을 잇기 위해 회암사 중창에 착수했고 이후 지공 스님의 영골 사리가 고려로 이운된 것을 계기로 고려불교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나옹 스님은 회암사 주창이 고려불교를 새롭게 하는 불사라 확신했다. 회암사에 지공 스님의 사리탑을 세우는 일에 공민왕은 물론 귀족과 백성까지 모두가 동참했다. 나옹 스님은 불교계를 대표해 스님의 과거시험인 ‘공부선’을 주관했다. 출가자의 질적 쇄신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옹 스님의 이런 노력은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무위로 돌아갔다. 1376년 회암사 낙성식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회암사는 전국 사찰의 총본산을 이뤘을 만큼 수려한 대찰이 됐고 이곳에 머문 스님만 3000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신진사대부에게 눈엣가시였다. 불교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다시 높아지면 성리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신진사대부의 상소가 빗발쳤다.

힘 없는 우왕은 나옹 스님에게 멀리 밀양의 영원사로 가라는 조처를 내렸다. 회암사에서 나옹 스님이 탄 가마가 나오자 대중들은 목 놓아 울었다. 나옹 스님은 결코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밀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뱃길을 따라 내려가던 나옹 스님은 병을 얻었다. 병세가 심해지자 여강 앞에 있는 여주 신륵사에 머물렀다. 하지만 여흥군수가 떠날 것을 독촉했다. 나옹 스님은 법상 위에 앉아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불사를 마치겠노라.”
 

나옹 스님 화장터에 세워진 삼층석탑. 여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했다.

스님이 곧 고요히 열반에 들자 오색구름이 덮였다. 스님을 태우고 가던 말은 스님의 입적과 동시에 머리를 떨구고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다비를 마친 스님의 몸에서 수많은 영롱한 사리들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나옹 스님이 자신들의 곁에 온 생불이라고 여겼다. 우왕 2년(1376) 5월15일이었다. 당시 스님의 나이는 57세였고 출가한 지는 37년만이었다. 나옹 스님이 밝힌 법등은 무학(1327~1403) 스님과 환암(1320~1392) 스님에게 이어졌고 억불의 시대에도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옹 스님의 입적 전후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온 나라에 나돌았다. 이후 스님의 문도들이 여말선초 불교를 이끌면서 신륵사는 일약 명찰로 부상했다. 대찰이었던 회암사는 폐사의 운명을 맞았지만 신륵사는 여전히 우뚝했다. 나옹 스님의 열반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옹 스님이 신륵사에 머문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그곳엔 나옹 스님을 기리는 흔적이 남아 있다. 조사당을 지나 양지바른 구릉에 오르면 여강이 굽어보이는 곳에 스님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는 600살 넘은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는 나옹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고 하고, 향나무는 무학 스님이 스승인 나옹 스님의 향기로운 삶을 그리며 심었다고 한다.

여주팔경이라는 말이 있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를 뜻하는 여주팔경에서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다.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는 단서다. 하지만 이제는 4대강 공사로 신륵사에서 퍼지는 종소리를 감싸던 여강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전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었던 ‘여강선원’이 있던 곳이기도 한 여강은 고인물이 됐다가 최근 수포문이 열리며 다시 힘찬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전 천혜 자연환경을 되찾기엔 시간이 좀 더 걸릴 듯하다.

최근 불교계는 신륵사와 함께 4대강 사업 전 버드나무 군락지였던 이곳을 되살리기 위해 재자연화 운동을 시작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지키는 적극적인 실천을 위해서다. 나옹 스님이 설했던 적극적인 현실참여, 실천하는 선과 꼭 닮았다. 백성들이 깨달음의 삶을 살도록 이끈 나옹 스님이 밝힌 법등은 7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여주=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95호 / 2019년 7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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