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서울 흥천사와 행호 스님
8. 서울 흥천사와 행호 스님
  • 임은호 기자
  • 승인 2019.07.15 15:43
  • 호수 14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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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의 시대, 꺼져가는 불법 중흥만을 발원하며 법등 밝혀

고려말부터 배불상소 올린 사대부
조선 건국 함께 본격적 불교탄압

세종 신임 받았던 고승 행호 스님
쇠락한 사찰들 재건에 힘 기울여

흥천사 주지 시절 대중 몰려들어
유생들 경계하며 처형 상소 거듭

​​​​​​​제주 유배길에 올라 죽임 당해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신호탄
억불의 시대에도 행호 스님이 흥천사서 설법하면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유생들의 방화 등 온갖 부침을 겪은 흥천사는 2011년부터 불사를 시작해 이웃과 함께하는 대가람의 풍모를 되찾고 있다.
억불의 시대에도 행호 스님이 흥천사서 설법하면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유생들의 방화 등 온갖 부침을 겪은 흥천사는 2011년부터 불사를 시작해 이웃과 함께하는 대가람의 풍모를 되찾고 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했다. 지독한 탄압과 시련 속에서 묵묵히 인욕의 길을 걸으며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전등을 이어갔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훼불과 모욕은 불교를 끊임없이 막다른 길로 몰았다. 고려 말부터 배불상소를 올리기 시작한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과 함께 본격적인 불교탄압에 나섰다.

1392년 7월, 고려의 신하였던 이성계는 정몽주와 같은 고려의 충신과 우왕, 공양왕을 숙청하고 스스로 왕이 됐다. 그리고 조선을 세웠다.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고려 말 보우·나옹 스님을 비롯해 무학 스님과도 인연이 특별했다. 이성계는 즉위년에 무학 스님을 왕사로 삼고 궁중에서 스님 200명에게 공양을 베풀었다. 1394년에는 천태종의 고승이었던 조구(祖丘, ?~1395) 스님을 국사로 삼았고 ‘법화삼부경'을 금으로 써서 고려 왕족이던 왕씨들의 명복을 기리게 했다. 1397년에는 신덕왕후 강씨를 위해 흥천사를 세웠고 진관사에서 해마다 수륙대재를 열어 모든 생명들의 명복을 빌었다. 사찰을 부수고 스님을 없애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개국 초기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척불정책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3대 태종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숭유배불정책이 시작됐다. 태종은 즉위년에 궁중에 있던 인왕불을 옮기고 궁중에서의 불사를 모두 폐지했다. 수많은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아예 철거한 사찰도 많았다. 제4대 세종은 즉위년부터 훼불을 강행했지만 나중에는 불교를 신봉하는 국왕이 됐다. 중년 이후 불경을 즐겨 읽고 스님들을 가까이에 두고 법문을 청하곤 했다.

천태종 고승 행호(行乎) 스님은 세종의 신임을 받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행호 스님은 천태종 종무를 통괄하는 직분인 판선종사(判禪宗事)에 올라 지금의 서울 흥천사 주지를 맡아 승속을 지도했다. 또 지리산 안국사와 금대암, 만덕산 백련사를 중창하는 등 불교 명맥을 이으려 노력했다.

행호 스님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해동의 공자’라 자부했던 고려 전기 문신 최충(984~1068)의 후손이다. 어릴 때 출가해 계를 철저히 지켜 주변의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행호 스님의 행적이 기록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이다.

1418년 8월 왕좌에 오른 세종은 행호 스님을 특별히 신임해 판천태종사로 삼았다. 하지만 행호 스님은 영예와 명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님은 “세속적 이해관계에 얽매여야 하는 직분은 달갑지 않다”며 세종의 곁을 떠났다.

스님은 지리산 부근 여러 사찰을 다니며 억불정책으로 쇠락해진 사찰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함양 안국사는 이 무렵 행호 스님이 중창한 절이다. 현재 해인사 말사인 안국사는 신라시대 창건됐으나 황폐해졌다 스님에 의해 다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스님은 안국사의 부속 암자인 금대암도 중창해 수행처로 삼았다. 

스님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만덕산 백련사도 중창했다. 통일신라시대 말기 창건된 백련사는 억불정책으로 퇴보했지만 1426년 행호 스님이 중수하면서 예전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효령대군의 도움이 컸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 세종에게 양보하고 조선 각지를 행각하다 백련사에 들어 8년을 수행했다. 백련사는 고려 후기 천태종 고승 요세(1163~1245) 스님이 80여 간의 가람으로 개창해 참회행과 염불정토관을 강조하는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이끌었던 곳이다. 백련결사는 고려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불교의 실천을 강조한 운동으로 불교계의 세속화와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백련결사는 서민 대중의 지지와 함께 몽고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왜구의 끊임없는 침탈로 사찰은 그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행호 스님은 깊이 탄식했다. 꼬박 7년을 불사에 매달린 후에야 백련사는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후 행호 스님이 실록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세종실록 82권에는 세종이 사람을 보내 행호 스님을 한양으로 모셔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스님에게 주지로서 흥천사에 머물기를 요청한다.
흥천사는 신덕왕후 강씨와 인연이 깊다. 1395년(태조 4) 왕비 강씨가 죽자 태조는 능지를 정릉에 조성하고 왕비의 명복을 기리고자 다음해에 창건한 흥천사는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곧바로 조계종 본산이 됐고 참선도량으로 발전했다.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각종 제례는 물론 왕족들의 무병장수를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특히 가뭄에 기우제가 열렸는데 행호 스님이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행호 스님은 흥천사에서 많은 승속을 이끌었다. 스님이 ‘법화경’을 설하면 법문을 들으러 많은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백성뿐 아니라 왕가 종친과 귀족들 모두 스님을 지극히 받들었다. 스님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려는 이들도 줄을 이었다. 유생들이 행호 스님을 경계하며 올린 상소문에는 “출가하는 자가 1년에 수만 명에 이렀으니 이는 인류가 멸망할 조짐”이라고 할 정도였다. 숭유의 나라에서 승려에게 대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자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세종이 흥천사를 크게 중건한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생들은 “행호가 백성을 속여 풍속을 바꾸려 한다”는 황당한 모함으로 스님을 처형할 것을 상소한다.(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4월18일 을미 4번째 기사 중)

이후 거듭된 상소를 이기지 못한 세종은 결국 행호 스님을 경기도 고양 대자암으로 유배시켰다. 첫 상소가 있은 지 불과 3일 만이다. 이때부터 성균관 생도들은 불교를 본격적으로 폄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중을 선동 유혹해 풍년과 흉년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쌀과 베를 모으고 도시 가운데서 안거회를 베푸니 대소 인민들이 요사한 말에 유혹돼 다투어 나가 시주한다”며 “그들이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백성을 해롭게 하고 폐를 끼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유생들의 거듭된 상소에 세종은 20여일 만에 다시 행호 스님을 지리산으로 보냈다. 세종은 먼 길 떠나는 행호 스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슬퍼했다. 스님의 여정에 불편함이 없도록 주변을 정결히 할 것과 전라도 관찰사에게 매년 쌀과 소금을 각 10석씩 주길 명했다.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5월12일 기미 2번째 기사 중)

행호 스님이 지리산으로 간 후 행적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세종실록 30년에 기록된 “중궁(中宮)을 위하여 기도하던 때에 승려 일운(一雲)이 작법(作法)을 하였는데, 조금 뒤에 죽었고, 행호(行乎)가 법주(法主)가 된 뒤에 오래지 않아서 또한 죽었으니”라는 대목을 통해 마지막 행적을 추측할 수 있다.

행호 스님은 1446년(세종 28) 제주 유배길에 올라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꺼져가는 불법을 중흥시키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행호 스님은 무너져 가는 불법을 다시 일으키고 숱한 문도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스승이었다. 사찰과 종파가 축소되고 스님들은 도성에 출입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다독이다 끝내 제주에까지 끌려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 행호 스님의 죽음은 조선시대 본격적인 불교탄압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행호 스님으로 인해  숭유억불 속에서도 법등을 밝혀나가던 흥천사는 1504년(연산군 10) 화재로 전각이 대부분 소실됐다. 그리고 1510년(중종 5) 유생들이 몰려와 불을 질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불에 타 사라진 지 355년이 지나 다시 역사에 흥천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이 앞장서 전국에서 시주를 받아 절을 중창하면서 부터다. 대원군은 ‘흥천사(興天寺)’라는 편액을 내렸고 이는 지금도 대방에 걸려 있다. 이후 왕족과 사대부, 상궁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흥천사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경내에 80여 세대의 집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2011년, 현 조계종 총무부장 금곡 스님은 흥천사 둘러친 담장부터 허물었다. 자연과 전통문화, 역사와 사람이 어울리는 신행공간 조성이라는 발원을 세웠다. 불사를 시작하며 이웃주민들에게 경내를 내주고 1년에 수차례씩 주민잔치를 열었다.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잔치에는 매번 동네 주민 2000여명이 찾는다. 이 모습은 행호 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대중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흥천사는 서서히 끊임없이 베풀고 소통하면서 행호 스님이 주석했을 때의 대가람의 풍모를 되찾고 있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97호 / 2019년 7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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