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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타슈켄트(끝)

동서교류 심장이 낳은 ‘비나야 삼존불’ 간다라예술 최고봉으로 남아

7C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에
조우관 선명한 고구려 사절단 등장
한반도와 중앙아시아 교류 확인돼

국립역사박물관 ‘비나야 삼존불’은
해외 전시도 불허하는 최고 예술품

​​​​​​​종교·문화 교류 중심이던 옛 영광
오늘날에도 생생히 전하고 있어

타슈켄트의 국립역사박물관에서는 최고(最古)의 간다라 불상으로 일컬어지는 ‘비나야 삼존불’을 비롯해 다양한 성보를 만날 수 있다. 찬란한 간다라문화를 꽃피운 옛 사람들의 신실했던 불심이 전해진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에서 동북쪽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나지막한 언덕이 옛 궁궐터 ‘아프라시압’이다. 지금은 마른 풀만 듬성듬성 나있어 버려진 듯 방치된 곳이지만, 아프라시압은 기원전 6세기 사마르칸트의 역사가 시작된 후 13세기 몽골군이 침략할 때까지 도시의 중심 역할을 했다. 기록 속 옛 사마르칸트는 모든 도로가 포장돼 있고 집집마다 수로시설을 갖출 만큼 발전된 곳이었다. 그러나 1220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운명이 뒤바뀌었다. 사마르칸트는 튼튼한 요새로 둘러싸여 처음에는 몽골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냈지만, 이내 칭기즈칸은 도시의 약점을 알아냈다. 외부에서 수로를 통해 도시로 공급되는 급수시스템을 발견한 것이다. 생명수를 잃은 사마르칸트는 오래 버티지 못했고, 칭기즈칸은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사마르칸트가 도시의 기능을 되찾게 된 것은 150년 뒤 티무르가 이곳에 제국의 수도를 건립하면서다. 티무르는 도시의 중심을 남쪽으로 옮겼고, 이후 아프라시압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목동이 우연히 옛 동전을 발견하면서 700여년 간 지표 아래 잠들어 있던 아프라시압은 깨어났다. 구소련의 고고학자들이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언덕 아래에는 서로 다른 문화의 흔적이 11층 이상 쌓여있었다.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언덕 아래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터에서 발굴된 7세기 벽화. 왕의 즉위식을 그린 벽화에는 고구려 사절단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중앙홀의 궁전 벽화다. 우즈베키스탄과 한반도의 오랜 인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벽화는 가로·세로 각 11m에 이르는 넓은 방의 동서남북 네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동쪽 면에는 당시의 생활상, 서쪽 면에는 왕의 즉위식, 남쪽 면에는 시집오는 공주와 일행, 북쪽 면에는 수렵하는 장면이 담겼다. 이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왕의 즉위식을 묘사한 벽화다. 주인공은 7세기 후반 사마르칸트의 왕 와르후만이며, 왕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외국에서 찾아온 사절단의 모습을 함께 그려 넣었다. 놀라운 것은 한반도에서 온 사신의 존재다. 이들은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허리에는 고리 모양의 둥근 손잡이가 달려있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있다. 현재 채색이 많이 벗겨져 그 형태만 겨우 보이지만 복식을 근거로 이 인물이 고구려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학자들은 당시 당나라의 압박을 받던 고구려가 연맹세력을 구하기 위해 멀리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곳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는 4세기경 제작된 로만글라스다. 이 로만글라스는 우리나라 경주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와 그 모양과 크기, 색깔이 매우 흡사하다. 오아시스 육로의 요충지인 이곳을 통해 로마에서 만들어진 유리 제품이 경주까지 전해졌음을 확인시켜 주는 유물이다. 한반도에서 5000km 이상 떨어진 이곳에서 우리와 인연 있는 것들을 만나게 되니 새삼 우즈베키스탄이 가깝게 느껴졌다.

우즈베키스탄 순례의 종착지인 수도 타슈켄트로 향한다. 사마르칸트에서 300km 떨어진 타슈켄트까지는 고속열차를 이용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던 일상적으로 차를 즐긴다. 이러한 문화 때문인지 고속열차에서도 따뜻한 차가 무료로 제공됐다. 2시간여 만에 도착한 타슈켄트는 ‘돌(타슈)의 도시(켄트)’라는 의미로 과거 중국에서는 ‘석국(石國)’이라 불렀다. 이곳이 돌의 도시가 된 것은 예전부터 금과 은세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정학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중심이자 오아시스를 품은 풍요로운 자연환경 탓에 농경과 교역도 함께 발달했다.

타슈켄트는 일찍이 불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으나 8세기부터는 완전한 이슬람의 도시가 됐다. 705년 중앙아시아 서단 메르브에 입성한 이슬람 동정군은 불과 10년도 채 안되어 파죽지세로 아무다리야강 건너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트랜스옥시나 전역을 점령하고 시르다리야강 건너 타슈켄트로 향했다. 그러나 당시 타슈켄트는 당나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더 동진하지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슬람 동정군은 타슈켄트와 동맹해 당군을 물리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탈라스전투다. 

우즈베키스탄학술원 예술학연구소에서는 간다라 불교유산의 보수·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715년 탈라스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슬람은 타슈켄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이슬람 문화는 11세기 카라한시대에 크게 개화했으나 13세기 몽골군의 침입으로 여지없이 파괴됐다. 14세기 티무르의 출현으로 이슬람은 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이후 타슈켄트는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성지이자 심장부로 성장하게 된다. 1990년대 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5개국은 저마다 이슬람의 정체성을 되찾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을 국기에 넣은 것은 우즈베키스탄이 유일하다. 그만큼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이 깊이 자리 잡은 나라이고, 그 중심에는 타슈켄트가 있다.

타슈켄트에는 우즈베키스탄 및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흰색의 화려한 문양으로 외관을 장식한 이곳은 1876년 문을 열었다. 국립역사박물관의 정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각 지방의 다양한 이슬람 건축물 기둥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1층부터 4층까지 시대 순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동서양 여러 국가의 다양한 동전이 전시돼 있다. 이 지역이 당시 동서문화의 활기 넘치는 교류지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공은 따로 존재한다. 바로 테르메즈의 파야즈테파에서 출토된 쿠샨왕조 시대의 불상이다. 석회암으로 조성된 이 불상은 보리수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부처님과 그 좌우에서 합장한 채 예를 올리는 아난과 가섭 존자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로, 최고(最古)의 간다라 불상으로 일컬어진다. ‘비나야 삼존불’로 불리는 이 조각상은 중앙아시아 불교미술의 찬란함과 우수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고, 중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우즈베키스탄임을 대외에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각국의 교환·순회전시 등 수많은 제안에도 비나야 삼존불 만큼은 반출을 불허할 만큼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극진히 예우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비나야 삼존불 외에도 수많은 성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국립역사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쿠샨 왕자의 두상, 달베르진 보살상, 수루한다리야 불족을 비롯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간다라예술의 걸작품 대부분은 우즈베키스탄학술원 예술학연구소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이들 문화재의 상당수가 석회암으로 조성돼 습기에 취약한 데다 이슬람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파괴된 것들도 많아 복원 및 보존처리를 위해서다. 다행스러운 점은 사전에 방문을 신청하면 우즈베키스탄학술원 예술학연구소가 소장 중인 문화재를 직접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연구원들의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이슬람 코란 가운데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오스만 본’이 보관된 타슈켄트의 바락칸 마드라사.

타슈켄트에는 ‘비나야 삼존불’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 하나 더 존재한다. 우즈베키스탄 이슬람협회가 자리한 바락칸 마드라사에 보관 중인 코란이다. 이슬람 기록문화유산 가운데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이 경전은 일명 ‘오스만 본’으로 불리며, 1400여년간 사용돼 온 코란의 유일한 정본이다. 원래 코란은 교조 무함마드에게 내린 토막 게시를 모은 책이다. 무함마드 사후 1대 칼리파(이슬람교 최고 권위자)인 아부 바크르 시대에 처음으로 계시들을 한데 묶어 첫 남본을 만들었고, 그것을 2대 칼리파인 오마르가 보관하고 있다가 3대인 오스만(644~656) 시대에 이르러 그 남본에 준해 경전의 결정판을 완성했다. 그것이 ‘오스만 본’이다. 

오스만은 이 정본을 4부 필사해 터키의 이스탄불과 이집트의 카이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 이라크의 바스라에 각각 보내 보관하도록 했다. 이후 이 보물은 권력자의 기호나 정략적 수요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던 중 14세기 후반 이라크를 정복한 티무르가 바스라 정본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세운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눔 모스크에 보관토록 해 현존하게 됐다. 

하지만 이 정본도 1869년 중앙아시아를 점령한 러시아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지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러시아혁명 후에는 타타르스탄의 수도 우파, 다시 타슈켄트의 쿠겔다슈 마드레사, 또다시 국립역사박물관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다 우즈베키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하기 직전인 1989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부가 소실된 이 정본은 338쪽 분량으로 얇은 사슴가죽에 나무액을 사용해 나무편으로 기록을 남겼다. 

우즈베키스탄은 동서문명의 교차로라는 말 그대로 다양한 문화가 만나 교차하고 어우러져 공존했던 땅이다. 문화와 문명이 이동했던 사막의 길 위에는 이제 아스팔트가 깔리고, 철로가 놓이고, 하늘길도 생겨났다. 먼 옛날 이 길을 따라 피어난 화려한 불교문화는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깊게 묻혀버렸지만, 옛 사람들의 신실했던 불심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뙤약볕 내리쬐는 거친 모래땅 위에 불심과 원력으로 빚어낸 간다라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여전히 성지를 참배하는 순례객들의 마음에 신심을 북돋아주고 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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