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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해평윤씨의 부덕(婦德)

기자명 김정빈

곤궁함 민망히 생각않고 참혹함에 흔들리지 않아

구운몽 저자 김만중의 어머니
병자호란 때 남편 김익겸 순절
영화·권세 극치에 살았던 그녀
곤궁하고 피폐한 환경 속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 잃지 않아
불자가 도달해야 할 진정한 인덕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해평윤씨(海平尹氏)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익겸의 아내이자 조선조 한글 소설 중 예술적인 성취 면에서 가장 훌륭한 ‘구운몽’의 저자인 김만중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에 못지않은 현부인이었다. 김만중은 행장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태부인(어머니)께서 일찍이 근대의 비문과 묘지를 보다가 부덕을 칭찬함이 지나치게 큰 것을 병으로 여기면서 말씀하시기를 ‘규문 내의 행실은 남이 알 바 아닌데, 글 쓰는 이들이 다만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만을 취하여 쓰니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우리나라에 현부인이 이처럼 많겠는가?’라 하셨다. 이 말씀이 내 귀에 낭랑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나는 어머니의 덕행을 칭술하는 문자에서 감히 한 글자도 꾸며 만들지 못하고 차라리 간략하게 쓴다.”

해평윤씨의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이고, 증조부는 역시 영의정을 지낸 윤방이며, 조부는 선조의 따님인 정혜옹주의 남편이 된 윤신지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윤지이며, 어머니는 경기감사를 지낸 홍명원의 따님이다.

그녀의 부모에게 자녀는 해평윤씨 한 사람밖에는 없었는데, 할머니인 정혜옹주가 이 어린 소녀를 친히 안아 입으로 외워 ‘소학’을 가르쳤다. 해평윤씨는 한 번 가르쳐주면 문득 깨달았다. 해평윤씨는 음식과 의복 면에서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 나이 열네 살에 출가하여 시댁의 칭찬을 받았고, 곧 큰아들 만기를 낳았다. 163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갔을 때 남편 김익겸이 순절했다. 그때 해평윤씨는 둘째 아들 만중을 잉태 중이었다.

호란이 끝난 뒤 두 아이를 기르는 한편 정성스러이 시부모를 모시며 한가한 때면 서사(書史)를 읽었다. 외아들을 잃은 시아버지 김반은 며느리 해평윤씨를 딸로 여겨 아들 없는 슬픔을 달래었고, 친할아버지인 윤신지는 손녀와 대화를 나눈 다음 “너와 말하면 가슴이 활짝 열린다. 네가 만일 남자였다면 어찌 대제학이 되지 않았겠는가!”라 하였다.

이후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가난해졌다. 그러나 해평윤씨는 항상 태연하여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고, 살림살이의 어려움을 자식들이 알지 못하게 조심했다. 그러면서 직접 자식들에게 ‘사략’ ‘당시’ 등을 가르치되 “너희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남보다 더 한층 노력해야만 남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부인으로서 남에게 글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해평윤씨의 수준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고, 글씨도 잘 썼다. 다만 자식들의 공부가 진전되어 ‘맹자’ ‘중용’ ‘좌전’에 이르자 그때부터는 스승이 필요했다. 그녀는 가진 재력을 다 써가면서까지 귀중한 전적들을 사서 자식들의 공부를 후원했고 ‘시경’ ‘언해’ 등을 빌려 손수 베껴 써서 자식들에게 주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만년에 종질을 들여 의붓아들로 삼았는데 해평윤씨는 그 아들을 친아들처럼 대우했으며, 의붓아들들 또한 친아들 못지않은 효성으로써 해평윤씨에게 효성을 다했다. 나중에 살림을 나눌 때는 서자들에게 좋은 전답과 젊은 노비를 주고 친아들들에게는 천박한 전답과 늙은 노비를 주었다.

1652년에 큰아들이, 1665년에는 작은아들이 과거에 급제했다. 1667년에 큰아들이 정2품직에 오름으로써 그녀는 정부인이 되었고, 1671년에 손녀가 현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됨으로써 그녀는 정경부인이 되었다.

인경왕후는 어릴 때 해평윤씨의 품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현숙함에 힘입어 나이 열 살에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해평윤씨는 왕비가 된 손녀를 볼 때마다 옛적의 어진 왕비들을 말할 뿐 사적인 혜택은 말하지 않았다.

손자 진구가 감사가 되었을 때 관할 내의 수령이 해평윤씨의 생일을 기해 폐백을 보내오자 그녀는 거절하여 되돌려보냈다. 그 수령은 평소에 집안끼리 교분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공과 사가 갈리는 지점에서 그녀는 명확하게 공을 선택했던 것이다. 해평윤씨의 처사가 그러했으므로 두 아들이 관가에 나간 이후로 외부인들로서 해평윤씨에게 청탁을 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곤궁한 처지를 당해서는 민망하게 여기지 않고, 참혹한 화를 만나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인경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국난을 당해 자손들이 흩어진 후에 혹은 죽고 혹은 병들었지만 그녀는 늘 의연했다. 그녀가 얻고자 한 바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었다. 남들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덕행, 그것이 그녀가 평생을 두고 추구한 그녀 나름의 ‘부귀영화’였던 것이다.

초기 경전 가운데 부덕을 논한 것으로 ‘옥야경’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경전은 부덕을 여러 가지로 논하고 있지만, 오늘날로 보면 그 내용 중에 남녀 평등에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경전에 따르면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는 좋지 못한 것이고, 여자는 남편을 섬겨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을 좋지 못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고, 여자가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옥야경’을 곧이곧대로 읽을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당대의 실정에 맞추어 대기설법을 하신 것으로 여기며 읽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평윤씨의 부덕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 환경을 고려하여 그녀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

해평윤씨의 부덕은 일부는 ‘옥야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여자로서 남자를 잘 보필하는 것으로써 성취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덕에는 여자로서의 덕을 넘어 남녀를 분별할 필요가 없는 일반적인 덕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덕이다.

공(公)은 나(我)라는 사(私)에 비해서 가정, 가정이라는 사에 비해서 가문, 가문이라는 사에 비해서 사회, 사회라는 사에 비해서 국가, 국가라는 사에 비해서 인류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면 인류조차도 생명계의 입장에서 사가 될 수 있다. 이렇듯 공은 여러 차원으로 나뉘며, 더 큰 차원의 공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위대한 사람이라 부른다.

중요한 것은 그런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그 마음이 큰 정도만큼 근심걱정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이다. 해평윤씨는 영화와 권세의 극치에서도 살았고, 곤궁과 피폐함 속에서도 살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그녀는 의연하게 흔들리지 않았고, 근심걱정으로부터 초연했다. 그녀가 진정한 부귀영화로 여겼던 그 초연함, 그것은 또한 우리 불제자가 도달해야만 하는 진정한 인덕(人德)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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