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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라 야쿠시지와 교토 엔라쿠지

의례를 퍼포먼스 아닌 전통과 신행으로 보호하는 일본불교

양력 팔월 보름 사찰서는 ‘세가끼’
한국불교 수륙재와 같은 전통의례
당나라시대 불교전통 계승한 의식

법상종 사찰 나라 야쿠시지 시연
스님과 신도가 함께 진행 인상적
작법 후 시식절차 수륙재와 유사

의식 촬영 위해선 까다로운 심사
허가없는 기록 그 자리에서 삭제
우리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대목

​​​​​​​카메라에 둘러싸인 재장 볼 때면 
퍼포먼스인지 종교의식인지 모호
의례의 목적 다시금 생각하게 돼

공양의례를 마치고 도사(주지)스님이 강설하는 사이 대중스님이 우란분 기도첩을 관(觀)하고 있는 식당 내부. 모든 불화들이 스크린 영상으로 현대화되어 있다.

윤소희 위덕대 연구교수가 일본불교를 순례하며 참관한 불교의례를 한국의 불교의례와 비교해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윤 교수는 한양대에서 대만불교 의식음악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불교음악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편집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음력 팔월 보름 우리가 추석을 쇠는 동안, 일본에서는 양력 팔월 보름을 ‘오봉’으로, 우리네 수륙재는 ‘세가끼’라고 하여 8월이면 오봉·세가끼가 한창이다. 일본은 7~8세기 무렵 받아들인 당나라의 의례전통을 이어오는데 비해 중국과 한국은 송대에 완성된 수륙재를 지내므로 일본의 오봉·세가끼를 통해 수륙재의 전개 과정을 알 수 있다. 해서 수년 전부터 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 왔다.

우란분 세가끼가 행해진 교토 엔라쿠지 아미타당.

올해는 법상종의 나라 야쿠시지(藥師寺), 정토종의 교토 쇼조케인(淸淨華院), 천태종의 산젠인(三千院)과 엔라쿠지(延曆寺), 진언종으로 청면금강(靑面金剛)을 모시고 있는 교토 묘주인(明壽院), 남녀호랭개교로 알려진 일연종의 오사카 신뇨지(眞如寺)를 조사하기로 계획을 잡고 있었지만, 그 무렵 세상은 화이트리스트와 무역 제제로 노재팬 캠페인이 한창이었다. 거기다 태풍 프란시스코와 크로사까지 온다 하더니 출발이 임박해서는 크로사가 일본으로 방향을 틀자 “태풍아 세게 불어서 일본을 날려버려라”라는 인터넷 댓글이 태풍보다 더 요란했다. 

그 동안 각 종파와 사찰, 지역과 날짜에 맞추어 연구대상을 검색하느라 진땀을 흘려 온데다 무형의 연구 대상은 행해지는 날짜와 시간이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계획대로 공항으로 갔다. 8월12일 아침, 공항버스가 인천으로 다가갈수록 시커먼 하늘과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불안하였으나 아침 비행기 몇 대 정도는 이륙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행기가 땅에 내릴 수나 있을지, 계곡을 끼고 있는 사찰을 다니다 태풍에 떠내려가지나 않을지, 공항에서 즉석 보험을 하나 들어놓고 비행기를 탔다.

간사이공항에 내렸는데 햇볕이 너무도 맑아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태풍은 무슨…. 일기예보를 비웃으며 나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법상종 야쿠시지는 13~15일까지 3일간 오봉·세가끼를 하였다. 의례에 참여해 보니 기존의 근행집에 도사(導師·주지)를 비롯해 8인의 스님이 의례를 집행하였고, 우란분 송경을 비롯해 대부분의 절차를 승려와 신도가 함께 송경하였다. 의례 중에 수차례의 쇼묘(범패)가 있었고, 신도들이 함께 노래하는 범패는 근행집에 그림보가 실려 있었다. 시아귀작법은 마지막 날에만 행해졌는데 이때 오여래 다라니와 공양절차가 있었고, 작법이 끝날 무렵에는 두 승려가 재단에 차려졌던 음식의 일부를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이러한 모습은 진관사의 수륙재 하단 시식 절차와 유사하였다. 

시아귀작법을 행하고 있는 약사사 승단과 재자들.

의식은 식당(食堂)에서 행해졌는데 그곳은 한국의 보재루와 같은 곳이었다. 야쿠시지에는 눈여겨 볼만한 도량구조가 많았는데 그 중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강당이었다. 이곳은 미륵여래가 가운데 모셔져 있고, 그 앞 양편으로 강사 논의대와 독사(讀師) 논의대가 있어 당대(唐代)의 강경의식(講經儀式)을 연상시켰다. 논석 양편에는 소종과 경판이 있어 설법강의가 의례화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음악이 전공인지라 일본의 법상종에 대해서 그다지 잘 모르지만 도량 배치와 전각의 구조, 의례와 설행을 통해 법상종은 현교라는 느낌을 받았다. 

14일에는 천태 총본산 엔라쿠지를 갔다. 여기는 8월13~16일까지 오봉·세가끼를 하고, 다음날에 사이초 탄신일 법회를 성대하게 행한다 하였다. 엔라쿠지 근본중당에 천년이 넘도록 켜져 있는 법등이 있다기에 그것을 보려고 몇 년 전에 왔었다. 그때 수십명의 스님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장엄한 쇼묘로 의식을 행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전교대사 사이초의 탄신법회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옷자락에 캠코더를 숨기고 촬영을 하였는데, 여기에 실은 사진이 그때의 한 컷이다. 

일본에서 의례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어달 전부터 협조문을 보내어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례장을 나갈 때 촬영장비를 점검하여 촬영된 내용은 그 자리에서 삭제를 당하게 된다. 고야산의 모 사찰에서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라 잽싸게 캠코더와 카메라를 감추고 하산을 하였다. 내려오다 동경국립극장 개장 50주년을 기념으로 엔라쿠지와 곤고부지의 소묘 공연 포스터를 보게 되어 그해 10월 공연을 보러 도쿄에 다녀왔다. 그때도 일체의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 어떠한 자료도 구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엔라쿠지는 판매하기 위한 의례 동영상을 제작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었다.

국립극장 사무국을 찾아가서 공연 콘텐츠를 입수하기 위한 수차례의 논의를 하여 극장으로부터 자료 제공 허가는 받았지만 출연했던 승단의 허가를 받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리하여 몇 달 전부터 엔라쿠지와 곤고부지에 서신과 협조문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디에,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그 자료를 쓸 것인지, 지금까지 나의 연구 성과와 내용은 어떤 것인지 많은 자료를 요청하였고, 그에 대한 자료를 보내느라 수십만원의 우편료를 썼지만, 도무지 허가서 발부를 해 주지 않아 엔라쿠지 사무국을 직접 방문하기로 하였다. 

오봉 위패에 청수를 붓고 있는 약사사 신도들.

그렇게 하여 엔라쿠지를 가는 그날, 입국하던 날의 반짝이던 하늘과 바람은 그야말로 태풍전야의 고요였다. 비옷을 입고, 촬영장비와 노트북이 든 배낭에다 스님들께 공양 올릴 김 선물 세트를 비닐로 겹겹이 싸서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교토역에서 17번 버스로 한 시간 반, 그리고 가파른 등반열차를 타고, 다시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산정에 올라 다시 셔틀버스로 산 고개를 넘었다. 그렇게 하여 엔라쿠지 총무부에 당도하니 스님을 포함하여 수십명의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었으나 서신을 보내오던 주사(主事)스님이 없었다. 태풍 예보가 연달아 있었으므로 도착 날짜를 확정할 수 없었던 탓에 일이 어긋난 것이다. 

어찌됐든 반드시 주사스님을 만나겠다고 하자 외국인 담당 스님이 부랴부랴 주사스님에게 연락을 하여 외부 일을 중단하고 들어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구사일생의 한숨을 쉬며 공양 올릴 김을 내려놓고 몇 년 전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위해 입재 등록을 하였다. 접수를 받는 스님께서 기도에 올릴 봉투에다 나와 아버지 성함까지 가타가나로 한 번 더 적었다. 그렇게 등록을 마치고 의식이 행해지는 아미타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의례가 시작되기까지 시간 여유가 많은지라 마당에 있는 수금소리를 들으러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엔라쿠지를 다녀가지만 아미타당 수금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금굴은 한 귀퉁이에 슬쩍 놓여 있는 작은 바위이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수금 옆에 모래로 빚어놓은 카레산수이(枯れ山水)까지 있어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카레산수이의 물결을 타고 퍼져나가는 묘음의 신비를 얻게 된다. 몇 년 만에 수금에 귀를 대 보니 태풍이 온다고 으스스한 데도 물방울 소리는 적막하고도 청아하기 그지없어 수청묘음수금굴(守淸妙音水琴窟)이라는 이름이 그냥 이름이 아니었다.

한참 후 인경소리와 함께 우란분 의식이 시작되었다. 천태의 오봉·세가끼는 차후에 산젠인을 통하여 들여다 볼 것이므로 그날의 엔라쿠지 오봉 재차를 간략히 적으면 중죄가타(衆罪伽陀), 삼례(三禮),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 사봉청(四奉請), 아미타경(阿彌陀經), 후패(後唄), 별회향(別回向)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회향 축원문 중에 나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발음이 일본어 사이에 들렸다. 대개 밀종 사찰에서는 재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축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는지라 긴가민가하였다. 

의례를 마치고 나오니 주사스님이 기다리고 있다며 내빈실로 안내하였다. 만나고 보니 조금 전 아미타당에서 축원문을 낭송하던 그 도사스님이었다. 알고 보니 나를 위해 특별히 축원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제야 가슴이 콩닥거리며 설레었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준비해온 연구계획서를 꺼내서 서론, 본론, 결론과 세부 항목까지 설명을 하였다. 그러자 자료들을 일제히 복사하여 보관하겠단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가 오간 끝에 마침내 “허락하겠노라”는 약속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뛸 듯이 기쁜 마음에 구름 위를 나는 듯이 사무실을 나섰다.

전교대사 사이초 탄신 법요를 마치고 퇴당하는 엔라쿠지 스님들. 

하산 길을 걷는데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인 산길은 밤과 같았고, 태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곧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될 것이라는 안내원의 재촉에 간신히 하산하기까지 겪은 일들은 한 회차를 따로 해도 모자랄 지경이라 여기서 줄인다. 연구 콘텐츠를 위해 그간에 치러온 역경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앞으로의 연구 과정은 더더욱 첩첩산중이지만 그래도 한 고비를 넘긴 희열감에 힘든 줄을 몰랐다.

의례에 대해 이토록 까다롭고 치밀한 일본 사람들에 비해 여유롭고 인간적이며 흥이 있는 우리네 의례현장을 떠올려 보면 일본과 한국인의 체질이 확실히 다름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례의 진정성에 있어서는 돌아보게 되는 점이 많다. 재장을 둘러싸고 있는 카메라군단, 의례인지 퍼포먼스인지, 신행인지 예술인지, 종교인지 민속인지, 문화재가 목적인지 의례가 목적인지, ‘우리네 의례는 어디에 와 있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05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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