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수행이나 명상심리학의 핵심주제는 ‘나’란 누구인가? 과연 나의 존재성(=자아 혹은 실존), 즉 자기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제대로 확립할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초기불교나 아비다르마불교에서 제시하는 명확한 답변은 바로 5온․무아이다. 즉 교리적으로는 승의적인 차원에서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아로서 ‘나(=자아, ātman)’는 부정되지만, 세속적인 차원에서 5온의 유기적이고 인연에 따라 조건적으로 생멸하는 경험적이고 현상적인 자아나 자아의식(=ego)은 인정된다.
초기불교나 아비다르마불교는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나를 나로서 기억하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등의 심신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자아의식은 현상적으로 인정하는 점에서 인도철학과는 달리 아트만을 실체적인 자아로서 별도로 내세우지 않고도 5온의 유기적이고 연기적인 흐름(=상속)을 통해 설명한다. 하지만 나(=자아) 혹은 자아의식(=ego)의 문제는 교리적으로 5온․무아를 통해 설명되듯이 그렇게 쉽게 이해되거나 해결되지는 않는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나(=자아)’ 혹은 ‘자아의식(=ego)’은 인간존재로서 태어난 후 평생에 걸쳐 축적되고 학습된 지식과 경험의 산물(=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나(=자아)’라는 관념이나 ‘자아의식(=ego)’은 한 인간으로서 그저 언어적 관습이나 경험을 통해 단순히 형성된 것만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의 관점을 빌리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물학적 한 개체가 선천적으로 가지는 생물학적 본능이 인간존재의 심연 속에서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나(=자아)’라는 관념이나 ‘자아의식(=ego)’은 무시 이래로 연기에 대한 이치를 모르는 무명에 기인하는 범부가 가지는 업의 측면과 생물학적 본능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나(=자아)’ 혹은 ‘자아의식(=ego)’에 대한 연기적인 통찰은 자아에 대한 단순한 이해나 생각만으로 쉽게 실행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나(=자아)’ 혹은 ‘자아의식(=ego)’은 초기불교나 아비다르마불교에서는 10가지 족쇄와 관련되어 설명된다. 이른바 10가지 족쇄는 범부들이 가지는 부정적인 심리작용기제인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3독심과 더불어 수행에 방해가 되는 10가지 장애요소를 말한다. 이 10가지 족쇄 중 ‘나(=자아)’ 혹은 ‘자아의식(=ego)’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은 낮은 단계의 5가지 족쇄(=5하분결)에 해당하는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과 높은 단계의 5가지 족쇄(=5상분결)에 해당하는 ‘자만(自慢, māno)’ 등이다.
유신견은 고정․불변하는 자아 혹은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거나 5온 등을 자아로 생각하는 견해를 말한다. 자만은 내가 남보다 우월하거나 뛰어나다는 등의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유신견이나 자만 등은 ‘나(=자아)’ 혹은 ‘자아의식(=ego)’의 전형적인 특성인데, 이 때문에 일상적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불편하거나 상처를 받는 등 실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신견 등의 문제는 수행도상 범부의 단계를 벗어난 성자의 단계에서 해결된다. 예컨대 유신견은 아비달마의 수행도상 견도(見道)의 단계, 즉 수다원에서 해결된다. 한편 자만은 수도(修道)의 단계, 즉 수도의 성취정도에 따라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이 되는 과정에서 해결된다.
결국 5온․무아와 관련하여 실체적으로 부정되고 현상적으로 인정되는 자기정체성, 즉 나(=자아) 혹은 자아의식(=ego)의 문제는 깊은 관념으로서 일상적으로 나 혹은 자아의식의 여부에 따라 실존적인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에 대한 분석적인 성찰이나 연기적인 통찰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김재권 능인대학원대교수 marineco43@hanmail.net
[1507호 / 2019년 10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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