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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법성게’ 제30구: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②  -구래불과오척법성신

기자명 해주 스님

구래불은 미혹 끊고 복덕지혜 구족한 부처님이며 ‘화엄경’ 십불

몸과 마음 원융법성인 줄 알면
오척법성신 온전히 십불로 출현

‘법성게’ 30구 펼치는 게 동이면
처음과 끝 한자리 만나는 건 부동
법성 하나 뿐임을 말하는 것

부처님이 총상이면 중생은 별상
총별 원융하여 불과 중생이 한 몸

‘법성’을 ‘구래불’로 바꿔 이름 해
부동의 내 몸 오척법성신 일깨워

화엄법계는 어찌 보면 우리들의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법계는 우리가 미래에 이루어 갈 세계라기보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세계이다. 눈만 바로 뜨면 보이는 세계이다. 일부러 만들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눈뜸의 자각만 있으면 스스로 법계의 존재로서 그 공덕을 그대로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단지 법계에 있으면서 법계인 줄 몰라 헤매고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법계에 들어가는 방편이 필요하다. 그 인연 방편이 보살도이다. 인연 따라 보살의 길을 가면 도달된 그곳이 바로 자기가 출발한 본래자리인 것이다. 

‘화엄경’의 구성을 보면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시성정각으로 시작해서 부처님 찬탄으로 끝난다. 그 중간에 중생이 성불을 향해가는 수행법이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는 방편이기도 한 보살도가 설해지고, 그로 인해 도달한 불과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모든 보살행의 토대가 되는 신심과 십주·십행·십회향·십지의 보살지위 그리고 불[覺]의 6위가 각기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전후가 없어 둘이 아니면서 다시 끝없이 이어지는 보현행원이 ‘보현행원품’으로 보완되어 있다. 

‘법성게’에서도 증분의 법성성기 세계가 선교방편에 따라 연기로서 현전하여, 일체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 이타행도 있고 수행의 방편과 성취도 보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실제 중도 자리에 앉으니, 예부터 움직이지 않음을 부처라 한다[舊來不動名爲佛]고 마무리된다. 

이 “구래부동명위불”에 대하여 앞에서 다섯 가지로 접근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일단 요약해보고 이어서 구래불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기로 한다. 

①‘예부터[舊來]’란 번뇌를 다 끊고 복지를 이루어 마친 때부터이다. 본래 성불이니 비유하면 침상에 누워 잠들고 꿈꾸기 전부터이다. 
②‘움직이지 아니함[不動]’이란 비유하면 비록 꿈에 돌아다니나 실은 움직이지 않고 침상에서 누워 있을 뿐임을 말한다. ‘법성게’에서 30구를 펼치는 것이 동(動)이라면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부동(不動)이니, 법성으로 시작해서 다시 법성으로 돌아와, 법성 하나뿐임을 말하는 것이다. 
③‘구래부동의 부처님’은 나의 몸과 마음인 법성신(法性身)이 증분의 십불로 출현한 부처님이다. 
④‘예부터 부처[舊來佛]’라면, 미혹을 끊는다는 단혹은 무엇인가? 단혹은 반정(反情)이며 허공단(虛空斷)이고 구래단(舊來斷)이다. 꿈에서 돌아다닐 때도 침상에서 움직이지 아니한 상태이지만, 그것을 아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 때이므로 잠깨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발심(發心)의 연으로 법계법이 단박에 일어나는 것이 닦을 것이 없는데 닦는 것이다. 
⑤“구래부동명위불”이란 제법이 본래 고요한 자리에서 본래 평화로운 것이다. 행행본처(行行本處)이고 지지발처(至至發處)이다. 

그러므로 나의 몸과 마음이 본래 원융한 법성인줄 알면 오척되는 자기 법성신이 온전히 십불로 출현하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출발하고 도달한 자리가 다르면서 다르지 아니한 도리를 이러한 육상방편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육상원융이 방편인 연기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닌 그 자리가 바로 융삼세간의 지정각세간이고, 법성가내의 진실덕용이며, 실제의 중도 자리인 구래불이라는 의상의 불신관을 잘 보여준다. 불과 중생의 관계를 ‘진수기’에서 육상으로 설명한 것은, ‘반시’를 육상원융으로 설명한 곳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구래불과 구래단을 육상으로 풀이한 내용이 ‘고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br>
화엄경변상도 십지품부동지 제38권 고려목판.
화엄경변상도여래출현품 제50권 고려목판.

일승 가운데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수행하지 않은 중생이 이미 부처님을 이루었다는 뜻이고, 둘째는 이미 이룬 모든 부처님이 본래 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육상을 쓰면 이 뜻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총상이 되고 중생은 별상이 된다. 일체 중생이 부처님인 뜻이 같음을 동상이라 하고, 일체중생이 각각 상즉하지 않음을 이상이라 한다. 일체 중생이 연기의 구경이니 곧 바로 부처님인 것을 성상이라 하고, 일체 중생이 각각 자기의 자리에 머물러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 것을 괴상이라 한다.

‘고기’에서는 또 ‘이미 성불했는데 처음부터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았음’을, 특히 동상과 이상의 도리에 의해 신림 대덕이 이해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신림 스님은 총과 별의 원융으로 법을 평등하게 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티끌, 한 마리의 개미가 노사나불과 더불어 원래 한 몸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균여 스님도 오척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시방삼세에 두루 하니, 움직이지 않는 범부의 몸이 곧 자체의 비로자나불이며 내지 화장세계임을 관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의상 스님은 또한 이 구래성불을 ‘초발심한 때에 바로 정각을 이룬다’는 상즉상입의 무애도리에 의해서도 나타내고 있다. 부동인줄 아는 것이 잠을 깸에 의해서이므로 발심의 연이 필요하다. 초발심이란 믿음의 지위에 있는 보살로서 제자위이며 정각을 이룸은 불지(佛地)인 대사위로서 위와 아래가 같지 않으나, 원교일승법은 삼승의 방편설과 달라서 머리와 다리가 하나[一]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날이 같다[同]는 것이다. 

‘하나’란 무분별의 뜻이며, ‘같다’란 무주의 뜻이다. 무분별·무주이기에 처음과 끝이 같은 자리이며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하여, 원교일승 연기법의 구극은 바로 법성성기의 여래출현과 같은 경계임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법성게’에서 ‘법성’을 ‘구래불’로 바꾸어 이름하고, 움직이지 않는 내 몸 그대로가 오척법성으로서 부처임을 깨닫게 한다. 이 구래불은 미혹을 다 끊고 복덕과 지혜가 원만 구족한 부처님이니 곧 ‘화엄경’의 십불이다.

의상 화상이 태백산 대로방(大蘆房)에 머무를 때, 진정(眞定) 스님과 지통(智通) 스님 등을 위하여 설하였다. 

“수행인이 열 부처님[十佛]을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안목(眼目)을 지어야 한다.”

지통 스님 등이 여쭈었다. “무엇이 안목입니까?”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화엄경』으로 자신의 안목을 삼는다. 이른바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이 모두 열 부처님이니 이 이외에 부처님 보기를 구한다면 세세생생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
(총수록 고기)

‘화엄경’에서는 십불의 명호를 여러 품에서 설하고 있는데, 이를 크게 해경(解境)과 행경(行境)의 두 가지 십불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인 측면과, 깨달으신 부처님을 각기 원만수인 십불로 이름한 것이다. 그중에서 해경십불은 ‘십지품’의 십불, 행경십불은 ‘이세간품’의 십불이 대표된다. 

의상 스님은 중도에 칭합한 득이익의 구래불이 ‘이세간품’의 십불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법성게’의 연기분에서도 십불이 언급되어 있는 점에 대하여, ‘대기’에서는 만약 ‘불(佛)’ 자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증분의 십불이고, 만약 ‘보(普)’ 자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교분의 십불이라고 설명한다. ‘일승법계도’에서 ‘십불이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오묘한 핵심이어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씀한 것도 증분과 교분의 둘에 통틀어 십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오직 증분 가운데에만 열 부처님이 있다면, 증분이 교분의 근원이기 때문에 ‘참된 근원’이다. 그런데 실은 증분 중에는 열 이름이 없다. 그렇다고 이 열 부처님의 이름이 증분의 바깥인 것은 아니니, 증분 가운데 실제 이름이 있다고 한다. ‘대기’ 역시 증분의 십불에 중점을 두고 교분의십불을 거두어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의상 스님이 구래불을 설명한 십불에 대하여 ‘법융기’는 ‘오직 내 몸과 마음인 참 부처가 지니는 도리를 열 가지 이름으로 설하여 보인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의상 스님의 불타관인 구래불과 십불을 오척법성과 연관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의상 스님의 십불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세간품’의 경문을 인용해 본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로 부처님을 봄[見佛]이 있다.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무착불이니 세간에 안주하여 정각을 이루는 까닭이다. 원불이니 출생하는 까닭이다. 업보불이니 믿는 까닭이다. 지불(持佛)이니 수순하는 까닭이다. 열반불이니 영원히 건너간 까닭이다. 법계불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르는 까닭이다. 삼매불이니 무량무착인 까닭이다. 성불(性佛)이니 결정된 까닭이다. 여의불이니 널리 덮는 까닭이다.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견불이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법에 안주하면 능히 위없는 여래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이세간품’의 십불설은 열 가지로 부처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여의불’은 80권 ‘화엄경’에서는 수락불(隨樂佛)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세간품’의 십불에 의상 스님이 설명을 더한 십불 법문이 ‘총수록’에 전하고 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08호 / 2019년 10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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