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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화엄사와 차일혁 경무관

기자명 이병두

전화 속 목숨걸고 천년고찰을 지키다

남부군 토벌작전 경찰지휘관 
빨치산 근거지 불태우란 명령
문짝 하나 태워서 화엄사 살려
조계종 감사장·정부 문화훈장 

2013년 8월21일 구례 화엄사에서 차일혁 경무관의 공덕을 기리는 비 제막식이 엄수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근거지인 화엄사를 태우라는 명령을 문짝 하나 태우는 것으로 대신해 절을 지켰다.
2013년 8월21일 구례 화엄사에서 차일혁 경무관의 공덕을 기리는 비 제막식이 엄수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근거지인 화엄사를 태우라는 명령을 문짝 하나 태우는 것으로 대신해 절을 지켰다.

사진에서 보듯이 2013년 8월21일 오후 구례 화엄사에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돌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는 내용으로 고(故) 차일혁 경무관(1920∼1958)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새로 세우는 제막식이 열렸다. 9월1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013 박경랑의 춤 영웅찬가’에서 그를 추모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차일혁(이하 ‘그’로 칭함)은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토벌작전 경찰지휘관으로 참가했을 때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과 암자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고서도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고 항명하며 화엄사 각황전의 문짝만을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해 화엄사를 살려냈다. 그는 화엄사 뿐 아니라 하동 쌍계사와 구례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여러 사찰과 김제 금산사,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했다.

이런 공적을 인정해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스님은 1958년 5월 감사장을 수여했고, 정부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문화재를 살려낸 공로를 기리며 2008년에 경찰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후배 경찰들의 귀감이 된 그의 업적을 재조명한 경찰청에서도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했다.

마흔살도 되기 전 세상을 떠나 큰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차일혁, 그는 짧지만 굵은 삶을 살았다. 화엄사를 비롯한 천년 고찰과 그 안에 전해져 내려온 숱한 문화재를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일뿐만이 아니다.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1953년 9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해 토벌작전을 마무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에도, 사살된 이현상 시신을 훼손시키지 않고 거둬 화장한 뒤 뼛가루를 섬진강에 뿌리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 일이나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 명령을 어겨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천년고찰을 지켜낸 일 모두 타고난 성품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민족의식에 눈을 뜬 뒤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군과 조선의용대 소속 항일군으로 활동했다. 해방 뒤 귀국해서는 일제의 악질 경찰 사이가 시치로(齋賀七郞) 암살을 주도했다. 그러니 일제 협력자들이 주도하고 있던 당시 경찰 조직에서 살아서는 경무관 승진을 못한 채 총경에 머무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세상을 떠난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그를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의 부친은 증산교의 일파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기 전 수백만 신도를 자랑하던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었다. 보천교 해산 뒤 1937년에 정읍의 본부 건물 일부를 옮겨 세운 것이 현 조계사 대웅전이니, 그의 가족은 대를 이어 불교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것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10호 / 2019년 10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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