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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업타령

기자명 이제열

“보살님, 전생 업 때문이 아닙니다”

업은 불자들 삶에 큰 영향 줘
자칫 운명론으로 흐르기 십상
“전생과는 무관하다”고 설득

불자들의 관심사는 심오한 불교지식보다는 자신의 생활과 밀접하고 쉬운 가르침을 선호한다. 불자들이 유독 관심을 보이는 불교의 내용들이 업, 천도재, 윤회, 가피 등으로 교리보다는 신앙 성격을 띤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중 업은 불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이다. 마치 기독교의 원죄설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듯 불교의 업설은 불자들의 마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많은 불자들은 현재의 삶은 전생에 지은 업의 영향을 받으며 그로 인해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믿는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는 ‘자업자득 자작자수(自業自得 自作自受)’의 논리로써 현생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가령 남편이나 자식이 속을 썩이면 전생에 내가 그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해서 그 빚을 받으려고 나와 만나 고통스럽게 한다고 생각한다. 또 돈이 없어 궁핍한 것은 전생에 남을 부려먹기만 하고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라거나, 몸이 아픈 것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과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이 같은 믿음은 자연스레 운명론으로 빠져들게 한다. 현재의 모든 고통이 전생에 지은 내 잘못이자 내 업보라고 받아들이고 이를 달게 받는 것이 불자의 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견해와 믿음이 잘못됐다는 판단을 내리는 불자는 그리 많지 않다. 불자들이 이런 믿음을 지니게 된 데에는 불자들을 이끄는 인도자들의 탓이 적지 않다. 실례로 한 노보살님의 경우 완고한 남편을 만나 평생 기 한번 못 펴고 살다가 부처님 법을 만나 스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전생에 보살님이 남편에게 나쁜 업을 지어 그 과보가 오는 것이니 지금부터 그 남편을 절대 원망하지 말고 부처님 위하듯 잘 받들어 모시세요. 그러면 업장이 녹고 남편의 마음도 함께 녹아 보살님을 잘 대해줄 것입니다.”

그 뒤로 노보살님은 늘 남편에게 지은 과거 생의 잘못을 녹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남편이 힘들게 해도 자신의 빚을 갚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했지만 정작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나이 들수록 남편의 고집과 독선은 더해만 갔다. 늘 고압적인 자세로 노보살님을 대했고 간섭과 잔소리는 늘어갔다. 노보살님은 견디다 못해 이젠 기도고 뭐고 하고 싶지 않았고 부처님을 향한 신심마저 희박해져갔다.

그 무렵 노보살님과 인연이 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 분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보살님이 전생에 남편에게 나쁜 업을 지어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는 생각지 마세요. 남편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지도 마세요. 다만 남편이라는 경계를 만나 일어나는 마음을 항복받기 위해 노력하고 정 힘들면 다른 방법을 써서 보살님이 평온해질 수 있는 길을 찾으셔야합니다.”

그러자 노보살님의 표정이 환해지며 남편에 대한 짐을 모두 벗었고 다시는 전생의 업타령을 않겠다고 답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업을 설하고 때로는 강조도 했다. 그러나 중생들이 받는 현재의 고락이 모두 전생의 업 때문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맛지마니까야’에는 부처님이 외도 니간타를 꾸짖으며 “여래는 중생들이 받는 현세의 고락이 모두 전생의 업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여래는 중생들이 받는 현세의 고락이 전생의 업과 무관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 말씀은 ‘전생의 업은 고칠 수 없다’는 니간타의 기계론적 업설을 비판한 것으로, 부처님은 전생의 업은 연(緣: 조건)에 따라 나타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연기적 중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설한 것이다. 업에 묶이느냐 업으로부터 벗어나느냐 하는 것은 업을 해석하는 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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