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클레오파트라의 음행
134.  클레오파트라의 음행
  • 김정빈
  • 승인 2019.11.12 16:26
  • 호수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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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략 위해 무엇이든 수단으로 이용했다” 

서양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혼인 상태에도 다른 남자와 외도
독사에 물려 여왕으로서 삶 마쳐
승가에선 큰범계, 추방으로 처벌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서양(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 Philopator, 기원전 69~30)는 이집트 여왕의 아버지는 라지드 왕가의 프톨레마오스 12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매우 영특해서 어려서부터 여러 공주들 중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여러 나라의 언어에 능통했으며, 대수학, 서사시, 역사, 수사학, 정치학 등에도 조예가 있었고, 미용술에 관한 책을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오고 있다. 그녀는 지적이고 교양이 높으며 대화에 능했다. 그녀의 타고난 미모는 당대로서 가장 선진적인 이런 문화 교양으로 인해 더욱 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클레오파트라는 궁정 세계의 변화무쌍함을 보며 자랐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고, 그것에 저항하는 백성들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로마의 힘을 배경으로 복귀했는데,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아버지를 따라 같이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동안 왕에게 배신행위를 해오던, 그의 정실부인에게서 난 공주가 추방되었고, 이로써 당시 열네 살이던 클레오파트라는 왕위 계승 1순위자가 되었다. 그녀를 뒤이어 아홉 살 난 여동
생, 여섯 살, 네 살 난 남동생들이 왕위 계승권자의 순위를 차지했다.

아버지가 죽고 난 기원전 51년, 클레오파트라는 라지드 왕가 사람들이 친족들끼리 결혼을 하는 관습에 따라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을 한 다음 각각 왕과 왕비(여왕)가 되었다.

문제는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주변에는 어린 왕을 꼬드기는 세력들이 있다는 데서 생겼다. 그들은 왕이 열세 살, 클레오파트라가 스무 살이던 때, 여왕을 반역죄로 고발했고, 클레오파트라는 라지드 왕국의 동쪽 시리아 속주 근방으로 도피했다.

얼마 후, 로마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 전투에서 패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망명해 왔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들은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 얼마 후에 도착한 카이사르의 중재에 의해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왕비 자리에 복귀했다. 

카이사르는 40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고, 그에 반발하여 기원전 48년에 아틀라스라 장군이 보병 2만, 기병 2000명과 함께 지방에서 봉기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러나 그는 곧 본국인 로마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을 제압했고, 그 과정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음으로써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하지만 남자 단독 왕은 허용되지만 단독 여왕은 허용되지 않는 불문율에 따라 그녀는 또 다른 남동생인 열세 살짜리 동생과 결혼을 하고 그와 함께 공동 왕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석 달(또는 2주) 동안 머물렀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나일강을 함께 여행하기도 하는 등, 얼핏 보기에는 연인들처럼 행동했다. 기원전 46년,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남편이자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여러 수행자들을 동반하고 로마를 방문한 후 1년 반 동안 체류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카이사르가 마련해준 저택에서 지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카이사르가 공화파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고, 클레오파트라는 서둘러 귀국해야 했지만 그녀는 임신 중이어서 약간 지체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아들을 낳았는데 ‘카이사리온’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라 불린 그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기원전 44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복귀했으며, 열다섯 살 되던 남동생이자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귀국 직후에 사망했는데, 역사가들은 그가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본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위험에 빠졌던 기억 때문에 그녀가 동생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전통이 문제가 되었다. 그를 해결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는 왕가의 유일한 남자인 자신의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와 결혼을 함으로써 이집트의 여왕이자 섭정이자 왕의 어머니이자 아내가 되었다.

로마의 사정은 많이 변하여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생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세 실권자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의 애인이자 정치적 동맹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안토니우스는 결국 경쟁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고 말았다.

카이사르와의 관계는 애인보다는 정치적인 결합이라는 쪽이 강했지만 안토니우스의 경우는 정치적 결합 못지않게 애인으로서의 관계가 깊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매력적인 이집트 여왕에게 머물러 그녀에게 빠져 지냈고, 둘 사이에서 자식도 여럿 태어났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같은 로마인끼리 내전을 벌인다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 안토니우스가 아닌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었다. 그 전쟁에서 패배하여 안토니우스가 죽은 상태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남은 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로 끌려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혹시 자살을 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로마에 끌려가는 수모를 견뎌내기에 클레오파트라의 자존심은 매우 강했다. 그녀는 시녀들로 하여금 자신을 독사에 물리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여왕의 차림을 한 채 자살했는데 때는 기원전 30년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매력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녀는 정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었다. 비록 전통에 따른 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기이하기 짝이 없게도, 그녀는 남동생 두 명과 결혼을 했고, 심지어는 아들과도 결혼했다.

나아가 그녀는 혼인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외간 남자와 외도를, 그것도 드러내놓고 자행했다. 

비구를 위한 승려의 계율에서는 첫 번째로, 일반 신자를 위한 오계에서는 세 번째로 불사음을 권한다. 불교의 입장에서 일반 신자가 불사음계를 어길 경우 처벌하는 규정은 따로 없지만 승려의 계율은 그 경우 범계자를 옷을 벗겨 승단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반 신자가 불사음계를 어길 경우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는 것은 그 재정(裁定)을 다르마(Dharma)에 맡긴다는 의미가 있다. 다르마의 재정은 현생에서도 이루어지고 내생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녀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것이 다르마 내지 인과법에 의해 벌어진 일인지 아닌지는 그가 다르마에 대한 신심이 어떠한지에 따라 갈릴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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