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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난한 볼펜, 만년필을 품다  ② - 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만년필 선물받고 만년설 같은 글쓰기 발원하다

나의 첫 만년필은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선물받아
그 전에는 꿈도 꾸지못한 로망
​​​​​​​
몽블랑은 산위 녹지않는 만년설 
만년 지나도 가슴에서 녹지않고 
강물되어 끝없이 흐르는 글 의미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만년필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이다. 만년필이란 말만 들어도 왠지 가슴이 설레며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요즘은 하도 필기구들이 많아 만년필이란 것을 구경조차 못한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이 쓰는 볼펜도 예전에는 쓸 때마다 찌꺼기가 묻어나와 옆에 따로 똥(?)닦는 종이를 두어야 했다. 이제 대부분의 글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종이가 아닌 기계 속에다 저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맘대로 썼다가 지우고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복사해서 옮기기도 하니 이 얼마나 편리한 도구인가. 문명의 이기에 밀려 손으로 쓰는 필기구는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연필을 썼다. 육각 모양의 연필을 살살 조심해서 깎으면 향나무 냄새가 솔솔 나는 나무속에 까만 심이 드러났다. 부잣집 애들은 연필을 넣고 돌리기만 하면 자동으로 깎이는 연필깎이도 가지고 다녔다. 그곳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어찌나 매끈한 몸매가 되어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고학년이 됐을 무렵 나무를 깎지 않아도 머리만 꾹꾹 누르면 가느다란 심이 조금씩 나오는 자동연필이 나왔다. 단연 최고의 인기였다. 애들이 연필을 쓰는 이유는 글씨를 잘못 써도 지우기가 쉽기 때문이다. 필기구도 어떤 것을 쓰느냐에 따라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중학교 들어 갈 때쯤 진학의 최고 선물은 단연 만년필이 1위였다. 그 때는 ‘파카’나 ‘워터맨’, ‘몽블랑’ 같은 외제는 비싸 엄두도 못 내었고 그나마 서민용인 ‘빠이롯트’나 ‘아피스’ 등이 인기였다. 나는 조그만 잉크병에 스펀지를 넣어 꾹꾹 찍어 쓰는 철필을 썼다. 어쩌다 펜대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볼펜대에 펜촉을 끼워 사용하기도 했다. 나의 첫 만년필의 꿈은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이루어졌다. 유명한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만년필을 가졌다는 기쁨에 며칠 동안 가슴이 설레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다. 한번 잉크를 주입하면 술술 잘도 써지는 만년필. 은은하게 묻어나오는 잉크 향을 맡으며 글을 쓴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유난히 나를 챙겨 주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방과 후에 교무실로 불렀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그 시절 꽤 비쌌던 두꺼운 대학노트를 펼치며 만년필을 꺼내셨다. 그리고 속표지에 이렇게 쓰셨다.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학창시절 힘들게 공부를 했단다. 상진이도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생일을 축하하며 선생님이···.” 

그 시절 객지에서 어렵게 자취 생활하며 공부하고 있던 나의 가정환경을 잘 아시고 일부러 생일선물을 준비하신 것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학창시절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지만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선생님은 바로 그 분이다. 그 때 선생님께서 쓰시던 꽁지가 하얗던 그 만년필. 나는 그때부터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저 멋진 만년필을 가슴에 꽂고 다니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만년필은 학생이 가지기에는 너무 비싼 ‘몽블랑’이란 만년필이었다. 어쩌면 지금 신문에 글을 연재하게 된 인연도 그 때 선생님께서 격려해주신 말씀과 만년필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후 시절인연 따라 이런저런 만년필을 사용해 봤으나 늘 머리에 하얀 별을 이고 있는 ‘선생님의 몽블랑’ 만년필 하나 갖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은 출가한 후에 이루어졌다. 해인사 학인 시절, 몇 년의 용돈을 모아 드디어 그 몽블랑 만년필을 샀다. 그나마 싼 것이 30여만 원 정도였다. 길쭉하게 생긴 특이한 보충용 잉크 한 병을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처음 글을 써보던 감격을 잊지 못한다. 별로 글 쓸 일이 없어도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만 해도 왠지 시상이 절로 떠오를 것 같은 뿌듯한 몽블랑 만년필. 꽁지에 마크처럼 붙어 있는 하얀 별은 상류사회의 상징이려니 했었는데, 몽블랑 산 위의 녹지 않는 만년설을 상징한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그러니까 만 년이 지나도 가슴에서 녹지 않고 강물이 되어 흐르는 글을 써야 하는데 아직 나는 그 만년필을 쓸 자격이 부족하다.

지금도 걸망에 넣어 다니긴 하나 가끔 원고 청탁을 받거나 시를 쓸 때 원고지를 펼쳐놓고 사용할 뿐 보통 땐 잘 사용하지 않는다. 얼마 전 만행 중에 짐을 정리하다가 걸망 한 구석에서 파란실로 짠 옷을 입고 있는 그 소중했던 만년필을 발견했다. 문득, 학인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한때 문학을 향한 열정이 있었던 때를 돌아보며 가만히 어루만져 보았다. 지난번 지인을 거리에서 만나 연락처를 묻길래 만년필을 꺼내 주소를 적어 줬더니 아주 신기하게 쳐다보며 “이야~ 요즘도 만년필 쓰는 사람이 다 있네”하며 놀라워했다. 

잘 쓰지도 않는 만년필을 아직도 걸망 속에 품고 다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힘들게 공부하던 시절 지남(指南)이 되어주신 선생님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며, 학인시절 그 풋풋했던 초심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가끔 노을 지는 언덕에 앉아 내 삶의 단상들을 수첩에 기록하는 것은 덤이다. 어떤 필기구도 대신할 수 없는 만년필만의 촉감이 있다. 종이에 닿을 때마다 서걱이는 거친 느낌이 참 좋다. 볼펜은 결코 그 흉내를 낼 수가 없다. 시대에 따라 나도 웬만한 글들은 컴퓨터 자판으로 쓰긴 하지만 직접 손 글씨로 영혼에 각인하는 글들을 따라갈 수는 없다. 

일전에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저장되어 있던 모든 글들이 다 날아갔다. 연재하던 초고들을 틈틈이 모아 두었었는데 그것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 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시로 백업을 해 두었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큰 일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세상의 편리함에 잠시 젖어 기본을 잊어버린 과보였다. 다시 한 번 뼈저린 후회를 하며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될 글들은 반드시 만년필로 적어 보관하기로 다짐을 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역시 종이에 쓴 글이라야 맘이 놓인다. 오늘밤은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 영혼 한 구석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파란 잉크를 가득 넣어 다 마를 때까지 아름다운 삶의 노래를 쓰고 싶다.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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