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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2대 총무원장 서운 스님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 최고령 총무원장 기록 보유

1950년 47세 나이로 늦깎이 출가
행정경험으로 불교정화에 기여
1962년 총무원장 직무대리 역임
1983년 81세로 총무원장에 선출
조계사 담장 뚫고 총무원 접수해
논란 커지자 총무원장에서 사임

1983년 12월22일, 서울 조계사 담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속초 신흥사 폭력사건으로 출범한 비상종단 총무원장 서운 스님 측이 총무원을 접수하기 위해 뚫은 구멍이었다. 서운 스님 측은 인수인계를 거부한 진경 총무원장 측이 버스를 동원해 조계사 출입문을 봉쇄하자, 쇠망치로 가로세로 1m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이 구멍을 통해 서운 스님 등은 조계사에 진입했고, 경찰과 법원 집달관을 앞세워 총무원 청사를 접수했다. 이로써 1983년 9월8일 종정 성철 스님으로부터 조계종 22대 총무원장에 임명된 서운 스님은 봉은사 총무원을 나와 조계사 총무원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계사 담장을 부수고 총무원 청사를 접수한 이 사건은 오히려 서운 스님 측을 곤경에 빠뜨렸다. 커다란 담장 구멍을 통해 조계사로 향하는 서운 스님의 모습은 다음날 아침 주요일간지에 대서특필됐다.

종단 안팎에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진경 총무원장 측이 조계사 출입구를 봉쇄한 것이 빌미가 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종단 원로이자 총무원장이었던 스님이 사찰 담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은 쉽게 이해되기 어려웠다. 서운 스님은 “조계사 담을 뚫고 들어간 것은 종단 정상화를 앞당기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지만, 비판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서운 스님은 조계사 총무원에서 업무를 시작한 지 27일 만인 1984년 1월17일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서운 스님의 사퇴는 당시 비상종단의 도덕성에도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현대조계종사에서 서운 스님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47세 늦깎이로 출가해 수행으로 일가를 이뤘고,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어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산파역할을 담당했다. 1983년 신흥사 폭력사태로 종단이 급격히 혼란해지자, 고령임에도 총무원장을 맡아 비상종단을 이끌었다. 당시 세납 81세로 총무원장에 오른 서운 스님의 최고령 총무원장 기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서운선사법어집(서운문도회, 1997)’에 따르면 서운 스님은 1903년 5월 경북 칠곡군 칠곡면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덕에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유학길에 올라 보성고보에 진학했다.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다니긴 했지만, 스님의 불연은 보성고보 재학시절 서울 각황사(조계사 전신) 불교학생회에 참여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각황사에는 대강백 한영 스님이 불교경전을 강의하고 있었다. 한영 스님의 지도로 불교경전을 익혔고, 유교경전도 독학했다. 보성고보를 졸업할 즈음엔 웬만한 불교경전을 읽었고, 유교의 ‘사서삼경’도 모두 섭렵했다. 

20대엔 김법린, 최범술 스님 등과 함께 불교청년운동에 나섰다. 만해 한용운 스님과의 인연으로 독립운동의 당위성과 출세간의 자유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이는 불교에 심취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9세 되던 해 참선수행의 원력을 세우고 파계사 성전암을 찾아 재가자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방부를 들였다. 그곳에는 금오․전강 스님 등 당대 이름난 선객들이 참선수행에 매진하고 있었고, 기라성 같은 수좌들과 함께 하안거를 마쳤다. 이후에도 제방선원의 선지식을 찾아 스님들과 함께 정진했다. 나중에는 수좌 못지않은 정진력으로 제방선원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당대 대선사로 유명했던 제산 스님이 ‘득장’,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전 종정이었던 석우 스님이 ‘백룡’이라는 호를 내릴 정도였다. 

출가인연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서야 찾아왔다. 한국전쟁으로 아끼던 외동딸을 잃게 되자 삶의 무상함을 체감했다. 그길로 공주 마곡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제산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고, 삭발염의했다. 이 때 서운 스님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록 늦은 나이의 출가였지만 스님의 공부는 남달랐다. 파계사 성전암에서 수선안거를 시작한 이래 전국의 제방선원을 돌며 정진했다. 이미 재가자로서 수행의 깊이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스님은 치열한 정진으로 출가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오도의 경지를 체험했다.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54년 상주 갑장사 선원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서울 선학원에 주석하던 동산․효봉 스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그길로 상경한 스님은 선학원에 상주하며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스님의 활약은 눈부셨다. 출가 이전 공직에 진출해 서울전매서장까지 지내는 등 30여년 간의 풍부한 행정경험은 비구 측에 천군만마였다. 회의록 작성에서부터 소송관련 서류 준비, 회계장부 처리까지 모두 스님의 손을 거쳐 갔다. 이는 스님이 1954년 11월 선학원에서 열린 제2회 비구측 임시종회에서 재무부장으로 발탁되는 배경이 됐다. 출가한 지 불과 4년째 되던 해였다. 

풍분한 행정경험을 갖춘 서운 스님(사진 앞줄 맨 우측)은 불교정화운동에  기여했다. 1955년 조계사에서의 기념촬영. ‘서운선사법어집’

그러나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시련도 적지 않았다. 불교정화운동이 막바지에 이른 1960년, 스님은 조계사 대웅전에서 단식기도를 하던 중 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었으며, 개운사에서도 폭력배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장기 입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청정승단을 회복해야 한다는 스님의 원력은 꺾이지 않았다. 스님은 속가에 남아 있던 전 재산을 처분해 비구 측의 소송 자금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등 불교정화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에도 종단의 주요소임을 두루 맡았다. 1962년 8월 통합종단조계종 총무부장에 선출됐고,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이 비구 측 중심의 종단 운영에 반발해 물러나자, 3개월 간 총무원장 직무대리를 맡기도 했다. 이후 동화사, 동학사, 남장사, 봉은사, 흥국사 등 주요사찰의 주지를 역임했고, 동국대 이사장, 총무원 감찰원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1980년 동화사 주지를 끝으로 종무행정의 일선에서 물러난 스님은 그해 강화 전등사 조실로 추대됐다. 1982년 6월에는 조계종 원로의원에도 추대됐다. 

1983년 8월6일 속초 신흥사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는 종무행정의 일선에서 물러났던 서운 스님을 다시 종단의 전면에 나서게 했다. 주지임명을 둘러싼 갈등으로 스님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큰 부상을 입은 이 사건은 세간을 경악케 했다. 따가운 비판이 조계종으로 향했다. 당시 총무원장 진경 스님은 참회문을 발표하고 수습에 나섰지만, 비판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중앙승가대를 비롯해 전국 강원학인들로 구성된 청년불교도연합회 소속 스님들은 8월19일부터 불교회관 1층에서 호법구종법회를 열어 총무원장 사퇴와 종회 해산 등을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을 시작했다. 전국신도회도 8월26일 성명을 발표하고 집행부 전원사퇴와 종정에게 종권을 이양할 것을 촉구했다. 한번 타오른 비판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급기야 8월27일 원로회의는 봉은사에서 모임을 갖고 종단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총무원 집행부의 전원사퇴와 중앙종회의 해산을 촉구했다. 그러나 진경 총무원장 측은 집행부 총사퇴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원로회의와 청년불교도연합회장 지형(중원) 스님 등 소장파 스님들은 1983년 9월5일 전국승려대회를 추진했다. 승려대회를 통해 총무원 집행부를 사퇴시키고, 중앙종회 해산을 통해 종권을 넘겨받으려는 계산이었다. 

당시 승려대회를 주도했던 중원 스님은 2016년 비상종단종책연구회가 발간한 ‘1983년 비상종단 기억과 평가’에서 “(승려대회를 통해) 종권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승려대회만 가지고 뭐가 되는 게 아니거든, 중앙종회를 해산시켜야 했다”면서 “벽파, 의현, 원두, 명선 스님 등 범어사 문중스님들에게 ‘중앙종회를 해산하는 데 협조해라. 다음 새로 구성하는 데 주역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이분들이 내 약속을 믿고 중앙종회를 해산해 준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 때문인지 중앙종회는 9월5일 79회 임시회를 열어 △중앙종회 권한 원로회의에 이양 △현 집행부 간부 해임 △중앙종회 해산을 결의했다. 

‘경향신문(1983년 9월8일자)’에 따르면 승려대회는 9월5일 1500여명의 스님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조계사에서 열렸다. 승려대회에서는 총무원장 사퇴와 중앙종회 해산을 재확인했으며 개혁을 추진할 비상종단운영회의 출범을 결의했다. 이어 원로회의는 비상종단운영회의 위원장 겸 총무원장으로 서운 스님을 추대하고, 비상종단운영회의 의원 89명도 선발했다. 원로회의는 9월15일 다시 회의를 열어 종헌개정과 비상종단운영회의법을 제정해 종단의 대표권자를 종정으로 변경했으며, 종단개혁의 전권을 비상종단운영회의로 넘겼다. 이로써 종단개혁의 기치를 내건 ‘비상종단’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진경 총무원장 측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불교신문(1983년 10월2일자)’에 따르면 진경 스님은 9월27일 담화문을 발표하고 “비상종단운영회의는 불법단체”라며 “종권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문공부는 종단 대표권자를 종정 성철 스님으로 바꾸는 비상종단의 종단 대표권 변경신청을 10월6일 승인했다. 이는 조계종의 정통성이 비상종단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비상종단은 10월13일 원로회의가 총무원장으로 추대한 서운 스님을 비상종단 총무원장으로 선출하고, 집행부 구성도 완료했다. 총무원 임시사무실도 봉은사내에 설치했다. 

그러자 진경 총무원장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진경 스님 측은 10월14일 △서운 총무원장 임명행위 무효 △79차 임시중앙종회에서 행한 종헌개정 무효 △원로회의의 종헌개정 및 비상종단운영회의법 제정 무효 △조계종 대표권자 변경 무효 확인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앞서 서운 총무원장을 상대로 직무집행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도 냈다. 진경 스님 측으로서는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러나 서울민사지법은 11월16일 진경 스님 측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 대해 “진경 총무원장의 사퇴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에 더 이상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볼 수 없다”며 기각을 결정했다. 진경 스님은 사면초가에 내몰렸다. 더 이상 버틸 여력도 남지 않았다. 결국 진경 스님은 12월1일 총무원 청사를 나와 마곡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진경 스님을 따르던 일부 집행부스님들은 인수인계를 거부했다. 서운 스님 측은 이들을 상대로 업무방해금지가처분을 신청했고, 법원은 12월8일 이를 인용했다. 그럼에도 구 총무원 집행부 측은 버스를 동원해 조계사 입구를 봉쇄하며 완강히 버텼다. 

조계종 22대 총무원장 서운 스님은 인수인계를 거부한 진경 총무원장 측이 버스를 동원해 조계사 출입문을 봉쇄하자, 쇠망치로 가로세로 1m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이 구멍을 통해 서운 스님 등은 조계사에 진입했고, 경찰과 법원 집달관을 앞세워 총무원 청사를 접수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서운 스님은 따가운 비판에 내몰렸다. 동아일보 1983년 12월23일자 캡쳐.
조계종 22대 총무원장 서운 스님은 인수인계를 거부한 진경 총무원장 측이 버스를 동원해 조계사 출입문을 봉쇄하자, 쇠망치로 가로세로 1m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이 구멍을 통해 서운 스님 등은 조계사에 진입했고, 경찰과 법원 집달관을 앞세워 총무원 청사를 접수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서운 스님은 따가운 비판에 내몰렸다. 동아일보 1983년 12월23일자 캡쳐.

서운 스님은 조계사를 찾아 구 집행부 측과 대화를 시도하며 설득에 나섰지만 끝내 이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결국 12월22일 서운 스님 측은 작업인부를 동원해 조계사 담을 뚫고서야 총무원 청사에 진입할 수 있었다. 총무원 청사를 탈환한 서운 스님은 12월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종단이 대내외적으로 물의를 빚은데 종단책임자로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현대사조에 맞춰 수행하는 교단, 교화하는 교단의 면모를 갖춰 나가겠다”고 밝히면서 종단체질 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조계사 담을 뚫고 총무원 청사에 진입한 것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스님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이듬해 1월17일 자신이 소집한 비상종단운영회의 상임위원회에 앞서 총무원장직을 사임했다. 공식적인 사퇴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였다. 

그러나 서운 스님은 사퇴의사를 밝히기 불과 며칠 전까지 총무원장으로서 종단개혁에 강한 의지를 피력한 바 있고, 총무원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비상종단 상임위원장을 맡았다는 점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보기는 어렵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서운 스님은 그해 8월1일 비상종단이 해체수순을 밟을 때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비상종단 해체와 함께 서운 스님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전등사 조실을 맡아 후학들을 이끌었다. 1995년 11월15일 세수 93세, 법랍 45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13호 / 2019년 1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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