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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금산사와 백곡 처능 스님

조선 유일 임금에 척불 항의하며 시정 촉구한 불퇴전의 호법승

국난 극복 결정적 역할한 스님들
말살하려는 임금과 사대부들에
‘간폐석교소'로 맞선 처능 스님

척불정책 잘못된 부분 지적하며
임금에 목숨 내놓은 반대 상소
결국 탄압 줄어든 결과 가져와

평생 후학지도와 전법활동 전념
입적 직전 모악산 금산사 향해
밤낮 5일 간 걸쳐 대법회 주관

​​​​​​​법회 회향 후 세수 64세로 입적
최근 들어 스님 위법망구 삶 조명
한국불교 배워야 할 불퇴전 용기

처능 스님은 입적 직전인 1680년 봄,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인 모악산 금산사에서 5일 밤낮에 걸친 대법회를 주관하며 대중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법문을 펼쳐냈다.

조선 중기 한반도를 덮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이익보다는 의로움과 명분, 본분에 맞는 삶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정명사상을 외치던 조선 사대부들의 추한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왜군에 의해 백성이 도륙당하는 처참한 전란 속에서 임금과 사대부들은 비대한 몸에도 불구하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빠르게 백성들을 버려두고 줄행랑쳤다.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 건설했던 한양이라는 거대한 도성에 백성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한양만이 아니었다. 임금과 사대부들이 줄행랑을 친 명나라 가까운 의주 인근을 제외하고 전 국토는 왜군의 조총과 칼날에 도륙되고 있었다. 이때 스님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사대부들의 탄압을 받으며 산속으로 들어가 불조의 혜명을 전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스님들이 손에 든 목탁과 죽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행하던 그 손에 칼과 창을 손에 쥔 채 오직 중생구제만을 염원하며 전쟁터로 달려나갔다. 의승군의 활약은 조선왕조의 국난극복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국난에서 벗어나자,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임금과 사대부들은 나라가 안정 되자 다시 불교를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조선 18대 왕 현종은 즉위(1659년)와 동시에 척불의 의지를 천명했다. 양민이 출가해 스님이 되는 것을 금했고 이미 스님이 된 이들도 환속할 것을 명령했다. 그 이듬해 정월에는 문신 유계(兪棨, 1607~1664)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이를 수용해 도성 안에 있던 비구니스님 사찰인 자수원과 인수원을 폐쇄했다. 선교(禪敎) 양종의 수(首) 사찰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도 철폐를 명하고 스님들을 내쫓았다. 사찰에 모셔진 선왕들의 위패를 땅에 묻어버렸고 사찰 재산도 몰수했다. 스님들은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연히 은둔적·체념적인 삶을 택하거나 반승반속의 삶을 살기도 했다.

이때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에 정면으로 맞선 스님이 있었다. 바로 백곡 처능 스님(1617~1680)이다. 처능 스님은 현종이 불교를 탄압하자 1661년(현종 2) 그에 항의하는 장문의 상소문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려 조선왕조의 척불정책과 배불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절대권력을 지닌 임금의 시책을 처능 스님이 목숨을 내놓고 반대를 한 것이다. 

8150자에 달하는 ‘간폐석교소’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긴 상소문이었다. ‘간폐석교소’의 주된 내용은 첫째 폐불 이유로 추정되는 여섯 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이며 둘째 불교 무용론(無用論) 여섯 가지 조항의 반박 내용이다. 전자나 후자 모두 여섯 가지 조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주로 폐불 이유로 거론되고 있는 사항들에 대한 처능 스님의 강한 반론이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사대부의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 스님의 상소는 이미 목숨을 내놓은 일이었다. 왕의 결정에 대해 스님이 상소문을 통해 드러내놓고 항의하며 시정을 촉구한 것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간폐석교소’가 유일하다. 워낙 논리가 정연하고 명분이 명확했기에 비록 왕이라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목숨을 건 상소 덕분에 봉은사와 봉선사는 명맥을 유지하게 됐으며, 오히려 현종 말년에 봉국사가 세워지는 등 불교에 대한 탄압이 잦아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이유로 처능 스님은 시대적인 질곡을 극복하려 했던 호법승(護法僧)으로, 뛰어난 사상가로 조선 불교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겼다.

원행 스님이 감수·해제하고 자현 스님이 쓴 ‘백곡 처능, 조선불교 철폐에 맞서다'(2019, 조계종출판사)에 따르면 처능 스님은 광해군 9년,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시름하던 조선 중기에 태어났다. 12세에 의현 스님에게 글을 배워 불경을 읽고, 그 깊은 이치에 깨달은 바 있어 15세에 출가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2~3년 동안 불법을 배웠다. 17~18세 무렵 서울에 올라간 처능 스님은 불학보다는 한문과 유학에 전념했는데 이 무렵 주로 동애 신익성(1588~1644)의 집에 머물면서 책을 읽고 시문을 체계적으로 배워 사대부와 교류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금산사 부도전에 있는 백곡 처능 스님 부도.

처능 스님이 ‘호법승’뿐 아니라 일목요연하고 강단 있는 ‘문장가’로서 위상이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숙종대 척신이자 관료였던 식암 김석주(1634~1684)도 “(처능)대사의 문장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해 마치 계곡의 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고 강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숙종대 고승 자수무경 스님(1664~1737)도 “우리나라 시승은 고금(古今)에 수가 많지만 문장과 도덕을 함께 갖추고,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분은 오직 처능 스님뿐”이라면서 “기이한 자취가 신출귀몰해 하늘의 별처럼 빛났으며, 유풍과 여운은 하늘을 떠받치고 우주에 뻗어서 한없는 곳으로 미쳤으니 그 문장과 도덕이 큰 기운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익성의 집에서 4년을 지낸 처능 스님은 어느 날 문득 지식이나 뛰어난 문장이 하잘것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리산 쌍계사 벽암 각성(1575∼1660) 스님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됐다. 각성 스님은 부휴 선수 스님(1543∼1615)의 600여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고승이다. 벽암 각성 스님의 법을 전수한 처능 스님은 곧 부휴 선수 스님 의법손이 됐다. 이미 15세 때 속리산에서 출가한 몸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출가는 이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20세를 조금 넘겼을 때였다. 

각성 스님의 문하에서 20여년 간 수행에 전념한 처능 스님은 수선(修禪)과 내전(內典)을 익힌 후 서울 근교 산사에 머무르다 1674년(현종 15년) 김좌명의 주청으로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후 남북을 오가는 운수행각을 하며 속리산·성주산·청룡산·계룡산 등지에서 산림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전법활동에 전념했다.

처능 스님은 대둔산 안심사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지만 입적 직전에는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인 모악산 금산사로 향했다. 1680년(숙종 6) 봄, 금산사에서 처능 스님은 밤낮으로 5일간에 걸친 대법회를 주관했다. 

법회 소식에 각지에서 구름처럼 대중들이 모여들었다. 세납 64세의 노승은 금산사에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며 대중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사자후를 펼쳐냈다. 스님은 화엄에 미륵 신앙 요소가 가미된 법문으로 전쟁과 탐관오리의 전횡으로 지친 대중들의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불철주야 금산사에서 펼쳐진 5일간의 대법회는 교육과 신앙 실천이 조화를 이룬 전법과 발원의 장이었다.

대법회를 여법하게 회향하기 전부터 처능 스님은 육신이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억불이라는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스님의 삶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법회 회향 뒤 얼마 후인 7월1일, 스님은 금산사에서 세수 64세, 법랍 49세로 고요한 선정에 들었다.

법구를 수습해 다비를 마치자 세 조각의 사리가 수습됐다. 사리들은 스님이 가장 오래 주석한 대둔사 안심사와 입적처인 모악산 금산사, 그리고 문도와 관련된 계룡산 신정사(현 신원사)에 부도와 함께 모셔졌다. 현재의 금산사에서 심원암으로 가는 동쪽 길을 300m쯤 오르면 왼쪽 산기슭에 스님의 부도가 있다.

불교에 대한 탄압이 살기를 드리운 시절, 임금에게 목숨을 건 상소문을 보내 조선불교를 살려냈던 처능 스님의 삶은 부처님의 삶에서 한 치 벗어남이 없는 위법망구의 전형이었다.

처능 스님의 상소문이 있은 지 3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때 조선불교를 기사회생시킨 주역 처능 스님의 삶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불퇴전의 용기와 위법망구의 삶이 조금씩 세간에 드러나고 있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무불의 시대에 당당히 왕을 향해 부당함을 외쳤던 처능 스님의 삶은, 오늘날 무기력한 한국불교가 배워야 할 불퇴전의 결기를 보여준다. 

김제=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13호 / 2019년 1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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