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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처님의 시성정각 (始成正覺) 보리도량 장엄 (세주묘엄품)

기자명 해주 스님

보리도량은 시방세계를 다 용납하는 평등의 법계 도량

세주묘엄품은 화엄경 서분…독립 유통되다 경 편찬 때 편입
보리도량의 4종10중 장엄, 보리수의 고졸한 성도지와 달라
부처님 신통으로 나타난 깨달음의 세계로 의정불이의 장엄

해인사 장경판전.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始成正覺]’에서 시작하여 ‘불공덕 찬탄’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의 유통을 분부하는 유통분이 어디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유통분이 보이지 않아서 ‘화엄경’ 설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 불세계에 이르게 하는 보현행원의 발원내용을 ‘보현행원품’에서 10대원으로 담아 추가하게 된 것도 이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화엄경’의 첫 품은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으로서, 80권 가운데 처음 다섯 권에 해당합니다. 첫 품이라 함은 전체 39품의 전후 차례에 의한 첫 번째 품을 말하는데, 실은 차례 없이 동시에 나타나는 모든 품에서 첫째라는 의미입니다.

경전성립사적으로 말한다면 ‘세주묘엄품’도 여타 화엄부 경전처럼 처음에는 독립적으로 따로 유통[別行]되다가, 화엄대경의 편찬 시 그 첫 품으로 자리한 것이라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39품이 각각 놓인 순서가 있으면서 순서가 없고 차서가 없으면서 차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작과 마지막이 둘이 아니고, 차례로 닦아나가는 차제 수행법과 하나를 닦으면 전체가 다 이루어지는 원융의 수행방편이 정립됩니다.

‘세주묘엄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간의 주인들이 미묘하게 장엄하는 품’입니다. 이 품명을 우선 피상적으로 풀이한다면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시니까 그 보리도량에 운집한 청법대중인 세주들이 부처님을 찬탄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미묘하게 장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엄세계를 더 자세히 관해보면 청법 대중들만이 세주가 아니고, 묘엄도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찬(偈讚) 만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묘(妙)’ 란 ‘미묘하다’ ‘오묘하다’ ‘교묘하다’ ‘신비하다’ 등의 의미로 이해되는데, 이 말은 흔히 그 의미를 참으로 알기 어려울 때 씁니다. 그렇다고 묘엄의 장엄상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세주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며, 불세계는 어디인가? 묘엄이란 무엇으로 어떻게 장엄하는 것인가? 장엄상은 어떤 모습인가? 더 나아가 화엄과 세주묘엄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러한 등의 많은 내용이 세주묘엄이라는 품명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주묘엄품’은 ‘화엄경’ 전체의 서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경전의 서분에서처럼 6성취(信·聞·時·主·處·衆成就)로 되어 있습니다. 6성취란 여섯 가지 갖추어야 할 경전의 편찬양식입니다.

먼저 경문의 처음 시작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一時) 불(佛) 在(재) 마갈제국(摩竭帝國) 아란야법(阿蘭若法) 보리장중(菩提場中) 시성정각(始成正覺).

이와 같은 말씀을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제국의 아란야법 보리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셨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부처님의 교법을 결집할 때 아난 존자가 부처님에게서 들은 그대로 송출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인데, 대승경전도 또한 그 형식을 따라 ‘여시아문’을 서두에 두고 있습니다. ‘여시’는 부처님의 교법이 확실하다는 의미에서 신성취이고, ‘아문’은 부처님에게서 들었다는 의미로 문성취에 해당합니다. 이어서 설법하신 때[時]와 설법주인 부처님[主] 그리고 설법장소[處]를 밝히고 있습니다.

‘일시[一時]’란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을 이루신[始成正覺] 때로서, ‘화엄경’이 설해진 때입니다. 그리고 시성정각하신 그 자리는 마갈제국의 아란야법 보리도량, 즉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 부근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입니다.

이러한 설시(說時)와 설처(說處)는 두 가지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화엄경’이 모든 경전 가운데 가장 최초로 설해진 경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을 그대로 설하신 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과 장소는 현상계의 차별적인 시· 공간인 것만이 아닙니다. 일체 법은 현상[事]과 이법[理]의 양면을 다 갖고 있습니다. 현상계로 보면 일시(一時)가 분단이 있는 시간이고, 아란야법 보리도량도 영역이 구분된 장소입니다. 한편 이법상으로 보면 일시가 일체 시(一切時)이고 보리도량 또한 일체 처(一切處)입니다. 아란야법이란 공부하기 좋은 고요한 수행처를 뜻합니다. ‘아란야’는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용한 곳이고, ‘법’ 역시 적정한 이법이라서 고요함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러한 보리도량은 티끌처럼 좁은 공간이라도 시방세계를 다 용납하는 평등한 법계의 도량인 것입니다.

신라 의상(625~702) 스님도 한 순간이 긴 세월과 다르지 않고, 미진과 시방세계가 걸림 없음을 ‘법성게’에서 읊고 있습니다.

화엄교학에서 ‘화엄경’의 설처를 ‘불리수왕 라칠처어법계 (不離樹王 羅七處於法界)’ 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지상과 천상의 일곱 장소에서 법을 펴시는데, 그 곳이 모두 법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화엄경’이 전체적으로 7처에서 9회에 걸쳐 39품을 설하고 있음을 ‘화엄경약찬게’에서는 ‘육육육사급여삼 일십일일역부일 (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 이라 읊고 있습니다. 즉 초회부터 마지막 제9회까지 각각 차례로 6·6·6·4·3·1·11·1·1 품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의 구성을 도시하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화엄경’에서는 중성취에 해당하는 청법 대중을 소개하기 전, 보리도량의 장엄과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에 대한 말씀이 위의 인용문 다음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아란야법 보리도량의 장엄[處嚴]이 4종10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땅의 장엄[地嚴], 보리수 장엄, 궁전 누각 장엄, 사자좌의 장엄 등이 무진하게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땅은 견고하며, 보리수는 높고 특수하며, 궁전은 시방에 두루 너르며, 사자좌는 높고 넓고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금강·마니·영락·유리 등의 보배와 연꽃을 비롯한 갖가지 꽃으로 장엄되어 빛났고, 또 갖가지 장엄구에서 광명을 비추고 향기를 풍기며 미묘한 소리로 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 의보의 장엄 안에 불보살 세계가 펼쳐져 있고, 보살이 출현하여 설법을 하고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보리도량의 장엄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항마성도의 장소와는 매우 달라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고, 보리수(필발라수) 아래에 풀을 깔고 결가부좌 하셨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도하신 직후의 주변상황 역시 성도하시기 전에 비해 별반 달라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리도량의 장엄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지금은 보드가야의 마하보디대탑만 보아도 그 웅장함에 절로 경탄하게 됩니다만, 당시의 성도처는 달리 상상하기 어렵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화엄경’이 대승불교 경전이고 대승 중에서도 일승 경전임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대승불교의 특징 중에는 무소유 정신이 공동소유로 실천되고,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도모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무소유정신이 공동소유로 실천된다는 것은, 소유를 인정하되 개인만을 위한 소유가 아닌 것입니다. 설사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더라도 중생이 원하면 관세음보살처럼 그들을 위해서 다 줍니다. 분황사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해서 희명의 5살 된 딸이 눈을 뜬 일이 ‘삼국유사’(분황사 천수대비맹아득안조)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눈이 천개나 되시는데 우리아이는 두 눈이 다 어두우니 눈 하나 주십사’고 기도해서 아이가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또 화엄세계에서는 물질도 실은 그냥 물질이 아닙니다.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방편으로 중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물질로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중생들 입장에서 제일 귀하고 좋다고 여기는 것으로 깨달은 세계를 장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보리도량 장엄에서 무엇보다도 특이하고 중요한 점은 그 모든 경계가 시성정각하신 여래의 신통력으로 이루어지고 위신력으로 장엄된 의정불이(依正不二)입니다. 보리도량은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도량이니, 수행의 결과인 불과가 의보(依報)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통현론’에서는 ‘마치 용이 날면 구름이 일고, 범이 달리면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보리도량의 의보장엄은 정보(正報)인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나타난 의정불이의 장엄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같이 보리도량의 장엄은 바로 깨달음의 세계가 드러난 모습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이나, 그 장엄은 영상으로 무진장하게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주묘엄의 묘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처님 또한 장엄 그 자체이고, 모여든 청법대중(衆成就)들의 묘엄에 대해서는 아직 거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경에서 설하고 있는 시성정각의 정각불(正覺佛)과 화엄회상 대중들을 중심으로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21호 / 2020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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