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영가현각 선사의 발원
26. 영가현각 선사의 발원
  • 고명석
  • 승인 2020.02.18 10:14
  • 호수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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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과오 찾지 않고 나의 선 입에 안 올리느니” 

8세에 출가, 배우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알았다고 할 정도로 총명
경율론 삼장 능통했으며 천태대사 지관 수행과 그 법문에도 정통
선수행 핵심지침서인 ‘증도가’와 ‘선종영가집’ 통해 선종의 길 안내
중국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소림사의 탑림. 이곳에는 역대 선사와 조사님들의 수 많은 탑이 조성되어 있다.
중국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소림사의 탑림. 이곳에는 역대 선사와 조사님들의 수 많은 탑이 조성되어 있다.

계율의 달과 자비의 꽃이 삼공(三空)을 비추어 밝게 빛났으며, 서리 맞은 소나무처럼 청결한 지조와 물에 비친 달처럼 빈 마음을 지닌 이. 도가 높아 수많은 백성과 지식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정도로 사모의 마음을 듬뿍 받은 사람. 인도승에 의해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어 동방의 대승경전으로 알려진 ‘증도가’를 지은 스님. 바로 영가현각이다. 그는 ‘선종영가집’에서 공(空)의 참 가치를 일깨운다. 

“마음이 공에 상응하면 나무람과 헐뜯음 또는 칭찬과 기림에 대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기뻐하겠는가? 몸이 공과 상응하면 칼로 베든 향으로 바르든 무엇을 괴로워하고 무엇을 즐거워하겠는가?”(한자경 교수 번역)

영가현각(永嘉玄覺, 675~713) 선사는 당나라 시절 절강성 온주(溫州, 윈저우) 시 영가(永嘉, 융자) 현 사람이다. 속성은 대(戴) 씨로 이름은 명도(明道)다. 8세 때 출가하였지만 효심이 지극하여 출가해서도 어머니와 누나를 봉양했다. 그는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총명했다. 일찍이 경율론 삼장을 두루 살폈고 천태 대사의 지관(止觀) 수행과 그의 법문에 정통했으며 ‘유마경’을 보고 마음의 요지를 깨우쳤다. 그는 주로 온주 용흥사에 머물렀다. 어느 날 스승 없이 산 깊은 암자에 홀로 머물며 선관을 닦던 중 도반 현책(玄策)이 홀로 닦는 것은 옳지 않다는 충고에 따라 육조혜능 대사를 찾아뵙는다.

그는 혜능에게 생사는 중대한 일이며 더구나 삶은 무상 신속하므로 형식과 예의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혜능은 “어찌 그대는 무생(無生)을 체득하지 못하고 무속(無速)을 요달하지 못하는가”라고 묻자, “본래 모든 것의 본질은 무생이며, 본래 모습을 요달하면 무속입니다”라고 답한다. 혜능은 그가 무생의 진정한 뜻을 얻었음을 간파하고 인가한다. 무생, 거기에서는 빠름과 늦음, 이곳과 저곳, 앎과 무지의 상대적인 분별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는 ‘증도가(證道家)’와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을 후세에 남겼다. 두 책 모두 선의 중요한 수행지침서 역할을 한다. ‘증도가’는 깨달음의 노래, 깨달음을 증득한 중도의 노래다. 중도실상은 현각의 사상과 수행의 중심 논리다. 그 중도를 투과하고 있는 깨달음의 노래를 들어보자.

“진리도 구하지 않고 거짓도 끊지 않나니 /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아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중도는 참과 거짓, 모양(色)과 공(空), 불공(不空)을 나누지 않는다. 거기서는 고정된 생각이 무너져 내린다. 분별하는 생각이 무너지니 무생이다. 이 중도의 도리를 깨치면 바로 규정화 될 수 없는 실상의 문으로 뛰어들어 단박에 여래의 지위에 도달한다.  

이 즈음에 그의 ‘선종영가집’으로 들어가 보자. 선종이란 선을 으뜸으로 삼는 가르침이다. 이 저술은 현각 스님의 혜안을 통해 선종의 길로 우리들을 안내하는 책이다.  당나라 시절 지방도시의 감찰관격인 위정(魏靜)이 그를 그리워하며 이 책을 편찬하면서 서문을 썼다. 우리나라에서도 간경도감에서 언해본으로도 간행되었다. 그 핵심을 간추리면, 도(道)에 대한 사무침, 교만과 사치를 떠남, 사마타(선정)와 비파사나(통찰) 수행, 중도의 실천, 사(事)와 리(理)가 둘이 아님, 친구에게 진속불이(眞俗不二)를 말함, 마지막으로 서원을 발함이다.

현각은 공적한 가운데 실상을 통찰하며 근원으로 들어가는 마음의 묘한 성품을 강조한다. 이를 승조와 지눌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했으며 원효는 공한 성품이 스스로 신묘하게 아는 성자신해(性自神解)라 하였다. 적적성성(寂寂惺惺), 성성적적(惺惺惺惺)이라는 말이 있다.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 밝고 밝으며, 밝고 밝은 가운데 아주 고요하다는 말이다. 현각은 이 적적과 성성 두 가지가 중도로서 조화를 이룰 때 근원으로 들어가는 묘한 성품이 작용한다고 했다. 그것은 경계와 지혜가 하나가 되는(境智冥一, 경지명일) 자리다. 공성에 입각한 반야의 지혜는 나 자신도, 법도 비어 있음을 통찰하여 고착됨이 없이 마음을 낸다. 근원으로 향하는 사람은 나(주체)도 타자도, 큰타자인 법도 모두 무이고 공으로 결여되어 있기에 타자의 빈자리를 떠맡으며 주체적으로 행위한다. 죽음도 두렵지 않기에 죽음도 무릅쓴다. 이념과 제도, 편견에 멍든 나를 폐기하고 현실을 내 책임으로 껴안는다. 진리는 빈 주체다. 현대철학자 ‘라캉’과 ‘지젝’을 참조하면 그렇다.

공이기에, 무이기에, 또 그 공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기에 바로 이 삶 속에서, 한계 속에서 열반을 실현하며 거기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실상을 관조하며 다툼이 없이 평화롭다면 그것이 진정한 중도의 실천이다. 그래서 현각은 친구 현랑(玄朗)이 산속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자는 요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 생명을 다함없이 제도해야 연민하는 마음이 크고, 경계를 바닥까지 비추어야 지혜가 원만합니다. 지혜가 원만하면 시끄러움과 고요함을 동일하게 보고, 연민하는 마음이 크면 원수나 친구를 널리 구제합니다. 그렇다면 어찌 산과 계곡에 오래 머묾을 빌리겠습니까? 처한 곳에 따라 인연에 맡길 뿐입니다.”

그의 발원문 중 한 구절을 읽어보자. 그의 생각과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성품과 행동이 유연해서 남의 과오를 찾지 않고 나의 선을 입에 올리지 않을 지이다. / 중생들과 다투지 않고 원수와 친구를 평등이 대하며 분별을 일으키지 않을지이다. / 애증을 일으키지 않고 남의 물건을 바라지 않으며, 나의 재물에 인색하지 않고 남의 것 침범을 즐기지 않을지이다. / 항상 질박함과 정직함을 생각하여 마음이 급해지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낮추는 것을 좋아할지이다. / 입에는 나쁜 말이 없고 몸에는 나쁜 행위가 없으며 마음에는 아첨으로 왜곡함이 없어 삼업이 청정하여 있는 곳마다 편안하고 모든 장애나 어려움이 없을지이다.(한자경 번역)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25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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