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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명 작가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

기자명 유응오

남성중심사회에 자비로 맞서다

할머니, 여자 이유로 냉대
지장보살님께 절하며 위안
불교사상은 여성주의 근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예토와 정토가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예토와 정토가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여성주의를 다룬 작품이지만, 남성중심사회에 여성들이 맞서 싸우는 대결구도를 띠지는 않는다. 작품 속에서 남성중심사회의 폭력성에 맞서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니라 불교의 자비정신인 것이다.

작품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숙이가 어머니와 함께 사찰의 지장보살상에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다. 숙이는 달걀을 구하러 갔다가 어미닭이 버린 병아리를 발견하고 뽀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성껏 키운다. 그러던 중 해송이 몸살에 걸리자 할머니는 숙이가 보는 앞에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고, 저녁 밥상에 보란 듯이 삼계탕을 올린다. 아버지와 해송이 삼계탕을 먹는 모습을 보고서 구토를 한다. 이날 이후 해송은 닭을 먹지 못하게 된다. 이 장면은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인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대목과 유사하다. 영혜를 아프게 한 것이 학대당해서 핏물이 고인 개의 눈을 바라봤던 기억이었듯이 숙이를 아프게 한 것은 모가지가 꺾인 채 핏물을 토하는 뽀뽀를 바라봤던 기억이었을 것이다.

이런 숙이를 데리고 어머니는 사찰의 지장보살상 앞으로 향한다. 절을 올린 뒤 어머니는 숙이에게 “사람은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거나 평생 굶주리거나 아니면 짐승으로 태어나지. 뽀뽀가 닭으로 잠깐 태어났을 때 너를 만난 건 지장보살님께서 뽀뽀에게 준 큰 축복이지”라고 말한다. 숙이는 집에 돌아와 잠을 잔 뒤 마루에 나와서 지장보살이 뽀뽀를 손에 들고 날아가는 환영을 본다.

기실 불교사상은 여성주의의 근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처님 재세 당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수도자 중에는 비구니도 적지 않다. 빔비사라의 자랑거리였던 유녀 암바팔리와 어머니에게 남편을 뺏기고 재가한 남편을 딸에게 빼앗기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우파라반나의 일화는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절세미녀였던 암바팔리는 빔비사라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출가시킨 것은 물론이고 자신마저도 비구니 승원으로 출가했다. 암바팔리는 늙어서 볼품없어지는 자신의 외모를 화두로 삼아 정진한 끝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의 진리를 깨닫고 최상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우파라반나는 신통 제일로 불렸던 비구니이다. 우파라는 청련화를, 반나는 빛깔을 뜻한다. 어릴 적부터 피부색이 아름다운 연꽃처럼 푸른빛 윤기가 났으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초기 경전에는 우파라반나가 목건련을 만나 불법에 귀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불법에 귀의한 후 우파라반나는 비구니 승원을 이끌었다고 한다. 우파라반나의 기구한 운명은 오이디푸스의 신화와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파라반나는 기구한 운명의 근원이 애욕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고 무상의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된 반면, 오이디푸스는 두 눈이 먼 채 아득한 심연의 덫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비록 다소 상투적이긴 하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여전히 남성중심주의가 만연해 있는 한국사회에 다시 한 번 남녀평등이 왜 필요한지를 일깨워줬고,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폭력으로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자비를 펼쳐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작품 속 지민이 숙이에게 건넨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청결하게 자라나는 꽃”이라는 말은 예토(穢土)와 정토(淨土)가 다르지 않음을, 다만 세상을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한다.

유응오 소설가 arche442@hanmail.net

 

[1526 / 2020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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